1899년 3월 14일 페르디난드 폰 체펠린 백작이 미국특허청에 ‘항행할 수 있는 풍선(Navigable baloon)’이라는 이름의 경식(硬式) 비행선 ’체펠린(Zepplin)’선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다.

남부독일 뷔템베르크 출신의 젊은 육군 장교인 체펠린 백작 최초의 비행선 여행은 그보다 한참 전인 1863년 8월에 시작됐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중인 북군의 기동연습을 참관할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링컨 미 대통령은 체펠린 백작을 중립적 참관자 자격으로 북부군과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자격으로 그는 미국에서 밧줄을 매단 기구를 쏘아 올리는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잊고 있던 하늘에 대한 경험을 일깨운 것은 10년 후인 1874년의 일이었다.

그 주인공은 만국우편연합 설립자중 한명이자 우편엽서의 아버지이기도 한 독일 우체국장 하인리히 폰 슈테판이었다. 슈테판은 베를린 과학협회에 국제우편과 항공여행에 관한 조사를 의뢰했다. 그는 프랑스가 1870년에 파리에서 60기 이상의 비행선이 우편물과 승객을 신속히 운송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기구를 이용한 신속한 우편사업의 장점을 설파했다.

슈테판국장은 체펠린 백작이 설계한 경식 비행선의 잠재력에 빠져 들게 만들었다.

그는 일기에 “배만큼이나 큰 비행성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계획을 언급하며 비행선에 대한 생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뷔르템베르크의 군주에게 군사적,상업적 용도로 사용될 비행선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편지를 보냈다.

독일 체펠린사의 힌덴부르크 비행선이 1936년 5월 6일 미국공항에 도착하기 직전 폭발됐다.. 사진=위키피디아
독일 체펠린사의 힌덴부르크 비행선이 1936년 5월 6일 미국공항에 도착하기 직전 폭발됐다.. 사진=위키피디아

뷔르템베르크의 군주는 체펠린에게 콘스탄체 호수근처 만젤에 수상 격납고 건설을 승인했다. 격납고 안에서 직경 12미터, 길이가 무려 12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원통형 LZ1이 모양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 설계에 따르면 약 8미터 간격인 16개의 다각형 원고리가 긴 장대로 연결됐다. 프레임은 그물망으로 씌워졌고 총 1만세제곱미터의 수소가스 주머니를 담을 수 있었다.

1900년 6월30일. 유명한 여름 휴양지였던 콘스탄체 호숫가에는 체펠린선의 비행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잇따라 비행이 취소된 끝인 7월 2일.

“로스(Los, Let go란 의미의 독일어)”라는 구호와 함께 비행선이 서서히 날아 올랐다. 엔진은 최대출력으로 가동돼 갑자기 30미터 이상 솟구쳤다. 최대시속 20km의 맞바람에 맞선 LZ1의 크랭크 축 하나가 부서졌고 알루미늄 구조체가 휘어지며 급작스레 항로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행선은 공중에서 조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비행은 20분 만에 끝났다.

독일 언론들은 이 사건을 장문의 기사로 다루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백전노장이 이끄는 건물만한 기계가 중력을 물리졌다.”

이후 체펠린의 비행선 LZ10 슈바벤호는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여객선으로서 218회의 성공적 비행을 통해 4천358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체펠린선은 1930년대에서 여전히 살아남아 주요한 여객 및 우편운송수단으로 활약했다.

1930년대 대공황 시 체펠린사는 대다수 독일 기업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불황의 여파로 고통받고 있었다. 체펠린사는 이 비행선이 교통수단으로서 거둔 성공을 인정하는 독일내 투자가를 대신해 해외투자가가 나서기를 희망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점점 더 정부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제펠린사의 LZ129비행선. 힌덴부르크호로도 불린다. 나찌 문양이 또렷하다. 사진=위키피디아
제펠린사의 LZ129비행선. 힌덴부르크호로도 불린다. 나찌 문양이 또렷하다. 사진=위키피디아

1936년 체펠린사는 LZ1의 20배나 되는 비행선 힌덴부르크호를 제작했다. 힌덴부르크가 대서양을 건넌 지 1년이 지난 1937년 5월 6일, 힌덴부르크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국 뉴저지의 헤이크허스트에 착륙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불길에 휩싸인 힌덴부르크호는 이내 파괴되고 말았다.

레이크 허스트에서 일어난 사고는 사실 모두 알고 있었던 원인 하나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사고는 비행선에 사용되는 안정된 헬륨가스 대신 수소가스를 사용한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헬륨의 유일한 생산국이었던 미국은 1927년 의회의 결의에 따라 헬륨수출을 금하고 있었다. 힌덴부르크호에 헬륨을 이용하는 계획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포기상태였다.

미국정부는 힌덴부르크 사고 이후 헬륨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1938년 나찌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하자 갑자기 없었던 일이 돼 버렸다.

1938년 말. 헬륨을 얻지못한 나찌는 결국 비행선계획 중단이라는 결정을 내린다.

2년 후인 1940년 힌덴부르크호의 참사 3년째 되는 날, 나찌의 파괴 전문가는 프랑크푸르트의 비행선 전용시설을 날려버렸다.

크나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비행선의 시대는 이 비극적 사태를 계기로 막을 내렸다.

1969년 네 명의 영국젊은이들이 결성한 록밴드 레드 제펠린(Led Zeppelin)은 데뷰앨범과 2집 앨범을 잇따라 히트시키면서 일약 1970년대 로큰롤의 아이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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