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언어로 생활하는 것을 흑백의 시선이라 가정하면 두 가지 언어로 사는 것은 컬러가 되고, 세 개 이상의 언어로 살아가는 것은 3D컬러의 삶이 아니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언어 하나를 배울 때마다 새로운 관점에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입체적 정체성을 경험한 사람의 당당한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 영어가 모어인 미국 시민 로버트 파우저는 고교시절 스페인어를 배웠고,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몽골어를 취미처럼 공부했다. 한국말도 잘하는 그가 영어 아닌 한글로 직접 쓴 한국인을 위한 에세이를 발표했는데,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교육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전통에 대한 역사관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무너졌고 그 후 일본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조선과 조선이 섬긴 중국이 `후진`이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중략) 문제는 조선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노예가 있었고, 미국의 1865년과 브라질의 1888년보다 늦은 1894년에 금지되었다. (중략) 조선이 무조건 ‘위대하다’면 민주주의의 위상은 작아지고 보수적 권위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러한 조선시대의 사상을 악용할 수도 있다. 반면 조선이 무조건 ‘후진하다’면 친일적 역사관을 재생하는 것이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부분을 무시하게 된다. 균형 있는 역사관을 만들려면 조선의 전통뿐만 아니라 외래 사상인 민주주의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것`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중략) 비록 한국 역사에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없지만, 한국 사람이 싸워서 스스로 얻은 것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되고, (중략) 이것은 민족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p195~p197)

열일곱에 단신으로 일본 홈스테이에 도전했을 만큼 문화적응력이 뛰어난 저자는 1982년 8월, 스물한 살에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 사람들의 인위적 친절과 구분되는 한국인의 자발적 친절(情)에 매료되어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한국의 문화에 익숙해지면서부터 다양한 시간과 시각의 차이를 두고 입체적 한국 관찰자가 되었다. 교토대학에서 일본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과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최초의 외국인 교수라는 독특한 경력에 ‘서촌주거공간연구회’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체부동의 낡고 작은 한옥을 고쳐서 생활한 경험마저 예사롭지 않다.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생활하다가 헬조선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당신들은 그렇게 못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자학적인가?’를 반문한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지켜봤고 감동했으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며 차츰 정권에 길들여져 가는 시민 아닌 국민들의 모습에 당황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관점이 현 정부의 공허하고 무책임한 구호와 비슷한 입장으로 읽어지기도 하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이명박 정부가 신속하게 잘 대처했다는 언급에서 섣부르게 정치적 성향을 규정하는 독법도 경계해야 한다. 저자는 입체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특정 집단에 치우치거나 선과 악으로 규정한 시선도 배제하고, 잘한 것은 잘했다 못한 것은 못했다고 냉정하게 역사적 사실에서 원인을 찾아 나름의 평가도 덧붙이는 생각의 궤적을 드러낸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우리 한옥 보존 업적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공원화 사업도 결과적으로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위에서 내려온 일방적 의사 결정의 성과임을 경계했어야 한다는 것도 맥락을 잘 읽어야 한다. “한국 사람은 때리지 않으면 말을 안 들어”라는 한 택시기사 발언의 인용에서 우리 안에 잠재된 뿌리 깊은 노예근성을 읽었다. 21세기에 들어온 지 이미 16년이나 지나갔지만 변화를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의식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프지만 명확한 지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권위를 내려놓고 권력을 분산시키며 민주주의를 실천한 참여 정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중요한 것은 1980년대 식의 가두 시위나 2000년대 식의 촛불 집회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승리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 인터넷과 SNS시대에 광화문에서 100만 명이 모여 민의를 보여줘도 영향력이 별로 없고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낡은 1980년대 투쟁 방식의 틀에서 벗어나 어렵게 도입한 자유선거를 통해 승리한 뒤 시민의 대표 자격으로 변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p142)

서울대 교수 시절의 고뇌와 푸념으로 시작되는 제 5장은 감성적인 배부른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나, 전반을 놓고 다시 읽어보니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공고한 한국사회의 벽이 얼마나 문제인가를 보여주는 과정일 뿐이었다. 세월호 사건을 경험하고도 점점 더 악화되는 사회안전망과 누가 몇 억을 해먹어도 무덤덤할 만큼 만연된 도덕불감증,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사회적 자본에 집중하는 문화들은 민주주의 강화를 통해 극복하자고 주장한다. 지도자 한 사람 바뀐다고 우리 사회가 갑자기 좋아질 리가 없는 시대에 과거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것도, 남을 짓밟고 일어서야만 살아남는 경쟁사회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하고 모순되는지도 깨어 있는 시민의식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위로한다. 여러 선진국들의 사례를 통해 권력의 집중을 고민하며 연방제나 재벌 해체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안내도 결국 시민의식의 강조에 방점을 찍는다.

자기 입맛에 맞게 희망을 정의하고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권력층의 비민주적인 사고방식도 문제지만,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희망’을 혁명으로 해석하고 이를 지도하려는 극좌파도 비민주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작금의 한국 정치구도에선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이해 못하는 극우 극좌 세력이 많아 더 깊은 민주주의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따라서 공동체 의식 속에 비민주적 집단주의를 민주화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지 못하고 감정적 사건에 반응하거나 감정적 이슈를 찾아내어 떠들어 댄다면 어떤 미래가 있을까?

시민이 무식하다고 여긴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 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식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어떻게 보면 `유신`이란 말에는 현명한 왕이 사회를 지도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유신체제하에서 대통령은 간접 선거를 통해 뽑았고 국회의 2/3은 대통령이 지명했다. 박정희가 암살을 당하고 정치적 혼란 속에 권력을 잡은 전두환도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지만 박정희 만큼 통치력이 없었고, 한국 내부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1995년 지자체 선거를 도입함으로써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를 확대했다. (p19)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해방 이후 인민이라 불리다가 군사독재 시절부터 국민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적 관점의 ‘국민’을 탈피하여 우리는 미래로 가야한다. 그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 중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도 새롭게 번역하여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명구를 되새겨 본다. 애국심 많은 국민이기보다 세상을 더욱 이롭게 하는 공동체적 시민이 되어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다. 여럿이 함께...

안중찬 ahn0312@gmail.com 장거리 출퇴근길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나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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