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사회적으로 성공한 어떤 소설가와 함께 단체 영화 관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영화가 끝난 뒤 한 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선생님의 장래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가 이미 꿈을 이룬 사람이라 생각한 주변 사람들은 엉뚱하고 부적절한 질문이라며 웃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현대인의 장래 희망은 여행 아닌가요?” 그 다음 말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질문을 한 학생이 참으로 사고의 폭이 넓고 훌륭하다 싶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생각만큼 돈을 많이 벌지 못할 수도 있고, 늘 마감에 쫓겨 압박을 받을 수도 있으며, 결행할 수 없는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여행은 모든 사람의 장래 희망이라는 대답에 크게 공감했다. 여행에는 돈과 시간도 필요하지만 마음가짐도 중요한 요소이고, 적당한 용기와 사람도 필요하다. 여행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여름은 희망을 실천하는 계절이다. 많은 시민들이 여름휴가철에 희망을 찾아 떠난다. 온갖 테러 소식에도 불구하고 인천공항 출국장은 북새통이고 출국자 수는 연일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생각이 복잡한 일부 사람들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다음 계절을 기다렸다 떠난다. 심지어 비수기라 불리는 저렴한 계절에 보다 조용한 여행을 꿈꾸며 인적 없는 한겨울에 개성 있는 여행을 누리기도 한다. 여행 한 번 다녀왔다고 그 곳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기행문을 남겨 두지 않으면 남는 것은 망각뿐이다.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아직 여행하지 않은 이에게는 동경을, 이미 다녀온 이에게는 공감과 아쉬움을 주는 유럽여행기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추천할만한 형식과 즐거움을 주는 재치가 돋보이는 만화책이다. 여행 에세이로 분류되고 있지만 이것은 정말 누가 봐도 술술 읽히는 즐거운 만화책이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주인공은 자신의 블로그에 ‘갯강구 일기’라는 제목으로 그림일기를 연재했고, 독립출판의 길을 찾아 나섰다. 별다른 내용 없이 재미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기성세대들의 자비출판과 달리 자신만의 창의적인 기법으로 책을 만들어 스스로를 알리는 것이 독립출판의 미덕이다. 2013년 겨울에 유럽으로 떠난 30일간의 그림일기는 이듬해 독립출판의 형식으로 슬그머니 세상에 나왔다가 소멸될 뻔 했다. 다행히 이번 여름에 한 출판사의 관심과 노력으로 ‘갯강구 씨, 오늘은 어디가요?’란 제목의 기성출판물로 재탄생한 것이다.

갯강구는 저자의 필명이다. 우리나라 해안 바위 틈이나 해조류 부근 어디에서나 무리지어 발견되는 깨알 같은 등각류를 지켜보던 저자는 자칭 갯강구란 별명을 갖는다.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스스로를 그렇게 자존감 낮춰 부르다가 이후 정이 들며 관성처럼 필명으로 사용했고 이제는 자신의 이름이 최지수인지 갯강구인지 조차 헷갈릴 만큼 정든 것 같았다. 화풍의 특징은 공간이나 사물 중심의 그림 속에서 인물들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거나 디테일을 살리지 않고, 작은 벌레처럼 몸통으로 표정 지으며, 특히 주인공 갯강구는 머리 위로 솟은 두 개의 더듬이 같은 헤어스타일로 묘사된다. 저자 갯강구에 대한 단서를 찾기는 여간 어려운데,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존재의 특징을 찾아갈 수 있다. 처음에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물론 나이조차 짐작이 안 가던 그의 특징을 찾아가는 과정도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만화 자체가 즐겁다.

“파리에서 길을 잃다, 라고 하면 감수성 자극하는 수필 제목 같으나 현실은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갈 곳을 잃은 길치 어른 두 명이었다. 파리에서 길을 잃는 일은 관광 코스 중 하나란 말도 있지만 발붙이기 무섭게 헤매게 될 줄이야! 심지어 비까지 오기 시작. 종이 지도에 의지해 길을 찾는데 한계가 있었다. 고국의 데이터 무제한이 벌써 그리워진다. 인간의 기본 욕구 Wi-Fi는 더욱 간절해졌다. 40분, 길을 헤매고서야 떠오른 생각은 지하철역 안내센터로 돌아가 길을 묻는 것! 역무원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 길은 맞는 길은 아니었다. 현지인이라고 지도를 잘 볼 거란 생각은 오산. 사실 나도 종종 관광객들에게 길을 잘못 알려줬었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지만.” (9쪽)

글과 그림이 조화로운 지면에서 그림이 없다고 상상하고 글만 발췌해서 읽어봐도 충분히 재미있다. 그림 없이도 상황을 잘 표현한 글맛이 느껴지고, 글 없이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이 설명되는 매력이 있다. 여행 기간 동안 하루하루의 이야기가 3~6쪽의 만화일기 형식으로 진행되며 구성은 단순하다. 한겨울의 파리에서 9일, 브뤼셀에서 4일, 암스테르담에서 4일, 베를린에서 8일, 프라하에서 4일을 보내고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오는 30일 동안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매우 주관적인 여행기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와 유명 건축물 중심으로 답사를 하지만 일상에서 만난 사람과 돌발적인 사건들, 감상적인 느낌과 평범한 음식 이야기, 길 위의 단상들이 소소하게 펼쳐진다. 매번 시작되는 DAY 01, DAY 02, DAY 03, ...... , DAY 28, DAY 29, DAY 30의 모두 서른 가지 ‘DAY’ 타이포그래피가 각각 다른 감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있어 그것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파리에서 첫 밤을 보낸 겨울 아침, 루브르 보다는 근대미술품이 많은 오르세 미술관을 더 선호하는 작가의 취향은 오르세 미술관 국제학생증 소지자 중 예술관련 전공자는 입장료 무료라는 팁으로부터 시작된다. 공항 열차에서 만나 우연히 함께하게 된 동행이 밥 먹으러 안 가느냐고 하기 전까지 배고픈 줄도 모르고 명화에 푹 빠져 지내는 모습은 각 여행자의 개성과 차이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생동감의 서막이다. 관광지를 표현하는 화풍이 탁월하여 사진에서 오히려 발견할 수 없는 선명한 특징들을 감상하는 맛이 있다. 파리에서 가장 높다는 몽파르나스타워에 갔다가 오픈시간이 안 맞아 되돌아선 어설픈 여행자의 시련, 인근 공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몽파르나스 공동묘지를 배회하는 적응력, 소르본대학교 주변을 거닐다 들른 서점에서 잔뜩 책을 사고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못 따라가 아쉽다는 인간적인 고백들이 잘 녹아 난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라는 해발 129m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호구 생활을 체험하며 유난히 혹독하게 기억하는 주관적 느낌과 자잘한 에피소드도 즐겁고, 편집숍 콜레트에서의 자학적 표현은 직전까지 남성으로 오해했던 갯강구 씨가 여성임을 드러낸다. 비수기인 1월초 파리의 대대적 할인행사 풍경과 대형 쇼핑몰 ‘발 드 유럽’에서 누린 먹방의 추억도 여행 정보의 공유 차원에서 작은 즐거움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찾아 한겨울에도 두 시간이나 줄을 서서 입장해야 했던 그랑 팔레의 입장 풍경은 문화강국을 향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킨다. 포르트 드 방브역 근처 주말 장터에서 보낸 일요일 풍경과 우리에겐 조선 숙종 12년에 해당하는 1686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식당 ‘르 프로코프’에서 가장 저렴한 점심 메뉴를 시켜 먹는 작은 사치를 응원했다. 퐁피두 센터에서 지난 여행의 우울했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아마추어적이기에 더욱 인간적인 매력을 준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중에 소매치기도 당하고, 베르사유 궁전에 가려던 당일에야 휴관임을 깨닫고 노트르담 대성당 옆 공원에서 갈매기와 노닐던 덤벙거림도 잠시, 즉흥적으로 주변 갤러리를 탐방하고 카페에서 노니는 모습이 귀엽다. 센 강의 밤에 유람선 바토무슈를 타고 지나치는 에펠탑 아래 정시의 불빛과 눈 내리는 풍경은 아름답다. 우여곡절을 겪고서 도착한 한겨울의 담백(?)한 베르사유 정원에서 혹독한 찬바람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부르델의 웅장하고 생명력 넘치는 작품들에 감탄하면서 그곳 브르델 미술관의 입장료가 고작 2.5유로인 것에 미안해하던 태도, 1947년 파리국제박람회 당시 일반관에서 이름이 비롯된 현대미술관 '팔레 드 도쿄'의 화장실 픽토그램을 오해하는 바람에 발생한 민망하고 수즙은 추억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갯강구의 수호신이 되고픈 독자들을 양산할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신용카드를 찾는데 도움을 준 ‘몽주 약국’의 한국말 잘하는 종업원 이야기를 끝으로 파리를 벗어나는 갯강구는 묘한 성취감을 준다.

유럽의 이상 기후 탓에 파리에서 브뤼셀, 브뤼주, 암스테르담, 베를린으로 이어진 폭설 퍼레이드는 고생 속에서 빛나는 추억이 남긴다. 오줌싸개 동상의 도시를 활보하며 틴틴으로 대표되는 벨기에 만화박물관, 마그리트 박물관 등을 구경하고, 개성 있는 간판들에 감탄하며 벨기에의 베니스라 불리는 인접한 작은 도시 브뤼주도 다녀온다. 여행의 참맛은 현지 명언의 발견에도 있다. 유럽의 소매치기 천태만상을 되새기는 장면과 더불어 지하철에서 소매치기 당한 친구를 데리고 찾아간 경찰서에서 울상이 된 친구에게 자책하지 말라며 위로하던 경찰관의 한 마디는 따뜻한 울림이 되어 지금까지 기억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Don't blame yourself."

나흘간의 벨기에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눈폭탄의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여행에 지쳐가는 순간에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시달리는 경험은 좌절이었다. 하지만 브뤼셀 호스텔에서 스치듯 만났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과 재회를 통해 갯강구 씨는 새로운 활력을 찾아 새 도시에 적응해 간다. 공사 중인 고흐박물관을 대신해 임시로 작품 전시 중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감동하고, 빨래감 싸들고 간 세탁소에서 만난 주인장의 매력에도 빠져본다. 섹스박물관 앞에서 친구와 나누는 입을 다물 수 없는 담소, 그림으로 표현한 ‘여행 중에 만나면 무서운 것들은?’에 대한 정답은 글로도 즐겁다. 3위 취객, 2위 십대, 1위 취한 십대...

“직행열차로도 장장 6시간이 걸리는 암스테르담에서 베를린까지의 장거리 이동. 이동하는데 하루를 온전히 쓴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우고, 기차에서 먹을 간식을 잔뜩 챙겨서 아침 일찍 나섰다. 여행을 오면 낯선 곳에서 차분히 생각에 잠기거나,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바쁘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생각은커녕 당장 눈앞에 펼쳐진 이국적 풍경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이럴 땐 장거리 이동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6시간 동안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눈밭을 보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밖에 없었다.” (87쪽)

연착되는 베를린행 열차 안에서 빈곤한 영어를 탓하며 재수 시절을 추억하고, 베를린의 중심가 미테지구의 핵심에 자리한 숙소로부터 독일 여행이 시작된다. KW인스티튜트에 들러 'ONE ON ONE'이라는 독특한 전시회를 체험한 기록은 꼭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베를린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2005년 종전 60주년에 조성된 관을 형상화한 조각상들로 세워진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포츠다머 광장, 티어가르텐,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를 여행하면서 졸업전의 압박을 느낀다. 독일지하철 우반(U-Bahn)을 타고 이동한 마우어파크에서 구입한 털 달린 따뜻한 신발 하나의 추억은 그간 추위 속의 고생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의 판문점 역할을 하던 체크포인트 찰리, 나치의 역사와 만행을 기록해 놓은 토포그래피 박물관, 폴란드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디자인한 유태인 박물관의 강렬함, 박물관에 무심했던 베를린 숙소 주인장이 유일하게 추천했다는 '더 스토리 오브 베를린'은 1970년대 분단 독일 시절 만들어진 벙커투어의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Do you read me?’라는 이름의 서점, 고대 이집트 네파르티티 왕비의 흉상이 매력적인 박물관 섬(Museum Island), 그림의 떡이었던 TV타워 전망대 레스토랑, 베를린 장벽이 진화한 이스트사이드갤러리,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 ‘앤디 워홀’의 작품들을 구경하고 나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아 흥미롭다.

26일째 날에 유로시티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부터 5시간 걸려 도착한 프라하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다. 전체 여행 일정 리뷰하며 시작되는 프라하의 감상은 아쉬움의 시작이다. 동행한 친구와 있었던 사사로운 갈등들을 회상하며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되기를 바라는, 제발 잊어줬으면 하는 희망들이 사랑스럽다.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Old Town Square)에서는 보름간 지속된 악천후를 벗어난 행복이 있었다. 그곳의 랜드마크인 천문시계, 카를다리, 여러 가지 먹방과 함께 행복을 만끽한다. 체코 장식 미술가 알폰스 무하 박물관 vs 카프카 박물관의 조화, 성당의 종소리에 놀라 날아가는 새떼들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도 아름답다. 힘들게 오른 언덕 위의 프라하 성에서부터 객기를 부리는 통해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DOX 현대미술관, 선물 구입을 위해 들른 마누팍투라 쇼핑몰에서 마주친 소매치기, 일행들이 적극 추천한 벨벳 맥주의 환상적인 맛들이 한 달의 유럽여행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준다. 그리고, 귀국!

“저는 집이 멀어서 10시 출근합니다.” 수도권 최남단 동탄에서 수도권 최북단 파주로 출근을 시작한 7년 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표현이다. 새벽 첫차를 타고 환승에 환승을 거듭하여 도달하는 사무실까지의 고단한 여정은 화성시 → 오산시 → 수원시 → 의왕시 → 군포시 → 안양시 → 광명시 → 서울특별시 → 고양시 → 파주출판도시에서 끝난다. 사무실에 도착하는 시간은 아침 7~8시(時)지만 지나온 공간이 모두 10시(市)라서 넉살을 떨었다. 이동하는 구간마다 꽃도 철새도 다르며, 변화하는 날씨만큼 역동적이다. 타인에게 권장할만한 생활은 아니지만 불편함도 잘만 활용하면 풍요로운 독서와 다양한 만남, 일상이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번 주 서삼독은 갯강구를 통해 뭔가 대단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하루도 시끄러울 날 없는 세상을 벗어나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가벼운 만화책 한 권 소개하고, 독자 스스로도 개성 있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들려주고 싶었다. 나이와 경험이 쌓인다고 더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 속에서 희망을 실천하며 세상에 다가가는 청년의 감각과 그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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