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출신의 아멜리 노통브는 ‘아버지 죽이기’라는 유쾌한 성장 소설을 통해 “모든 사람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는 다소 오해할 수 있는 은유적 표현을 했다. 그것은 아버지 뛰어넘기란 의미의 오래된 메시지인데, 최고의 부모도 자식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으므로 의식 속에 자리 잡은 부모 특히 아버지를 지워내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이상적이고 자유로움을 준다는 의미이다.

어른들은 언제부터 어른이었을까? 늘 무섭고 권위 넘치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어쩌다 듣게 되더라도 공감이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어른이었고 언제나 변함없이 어른이었으며, 노인이 되어서는 더욱 어른의 자리가 공고해지는 평생의 어른이일 뿐이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잠든 아버지의 모습이나 숨바꼭질을 하거나 냇가에서 수영하는 어린 아버지 모습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마음으로는 공감되지 않는 묘한 세계였다. 젊은이들의 놀이터라는 인스타그램에 가입하던 날, “아저씨가 주책이다. 여기 왜 왔느냐? 물 흐려진다. 나가라!”고 농담 같은 진담으로 면박을 주던 조카가 올 가을이면 결혼을 한다. 마치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조용히 어른이 된다.

조국 근대화를 향한 전 국민의 열망이 하늘 높이 치솟던 개발독재 시대의 춘천. 그 호반의 도시를 근거로 만화와 영화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노래로 청승을 떨던 애국소년이 있었다. 지방 도시의 문화적 한계는 당대 서울에 비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작금의 대한민국 중년들 평균 눈높이는 맞춰줄만한 추억을 관통한다. 남의 집에 기웃거리며 시청하던 KBS 중심의 흑백 TV 프로그램과 아직 FM 방송은 꿈만 같았던 AM 라디오의 시대, 어깨동무, 소년중앙, 새소년에 연재된 수많은 만화들에 열광했고, 각종 성인만화는 물론 동네 극장의 다양한 영화들을 골고루 체험하며 자란 그 소년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만화와 영화, 소설과 TV, 대중가요를 좋아했고,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던 모범생 소년이 대학에 들어가 겪은 경험은, 말하자면 나를 키운 아버지를 죽이는 일종의 살부의식(殺父儀式)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학에 와서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노래를 들으면서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그릇이 깨어져 나가고 새로운 그릇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비로소 나는 어른이 혹은 청년이 될 수 있었다.” (309쪽)

수요일이면 땡볕도 마다 않고 축구를 즐기는 백발의 청춘.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를 만든 사람답게 기타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영원한 오빠 가수,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사단법인 더불어숲 이사장, 한국대중음악회 회장, 우리만화연대 고문,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문화대학원 교수로 다방면에서 활약 중인 김창남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책은 선생의 유·소년기 문화적 경험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다.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으며, 페이스북을 통해 연재 되면서 몇몇 조언자들의 기여로 보다 충실해질 수 있었지만 서문에서 밝혔듯이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불완전한 기억의 기록이다. 격동기 세대가 성장하며 겪은 여러 가지 문화 경험 중에서 운동권 문화나 민중문화를 제외하고 오로지 대중문화에 집중하며 대한민국 B급 문화의 유쾌함이라 선언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찾아 떠난 추억 여행은 동질감을 느끼는 기성세대 독자와 역사서를 읽듯이 접근하는 다음세대 독자들의 이해와 공감이 교차하는 빛나는 기억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국민학교 시절 양구와 주문진에서 1년 남짓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춘천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조국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1965년 춘천댐, 1966년 의암댐, 1973년 소양강댐의 준공을 근거리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동양최대의 사력댐인 소양강댐은 폭격을 맞으면 붕괴되는 콘크리트 댐과 달리 폭격 맞은 자리에 웅덩이만 생기도록 모래와 자갈을 쌓아 만든 의미에서 사력댐이라 불리었는데, 만수 시 붕괴의 위험이 있어 미리 방류했던 것들도 냉전시대 접경지역의 진지한 역사성을 담고 있다. 그렇게 조성된 거대한 인공호수들로 인해 춘천이 호반의 도시이자 안개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으니 그런 애칭도 알고 보면 저자 보다 한참 젊은 것이다.

군사도시 춘천 한복판에 자리 잡은 ‘캠프페이지’로부터 비롯된 양키시장, 양색시촌, 미군 클럽과 그곳에서 흘러나온 플레이보이, 팬트하우스 등 도색잡지들의 추억과 미국독립기념일에 군부대에 초대받아 들어간 기억이나, 반공 포스터와 글짓기, 표어에 열성이었던 일상의 기억들은 TV와 만화의 세계는 물론 풍요로운 극장문화로 확산되면서도, 왜곡된 미디어 캠페인과 교사들의 육성을 통해 복잡한 세계관을 형성시켜 나갔다. 그 감성의 원형질은 대체적으로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만남과 학습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근원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스스로의 일상을 지배한다는 고백 앞에 저자의 내면을 짐작하여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을 이해하는 밑거름이자 저자를 깊이 이해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소년은 유치원을 건너뛰고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한글을 익혔고 책 읽기를 즐겼다. 주로 도서관이나 친구들 책을 빌려 봤는데, 알프스 소녀 하이디나 작은 아저씨들은 물론 15소년 표류기, 플랜더스의 개, 보물섬, 타잔, 정글북 등 가리지 않고 읽었다. 몽테 크리스트 백작이나 레미제라블은 원작을 대폭 축약한 어린이용 버전 암굴왕이나 장발장이란 제목으로 접했다고 한다. 국민교육헌장을 자랑스럽게 외우며 공인된 애국소년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육영재단이 주관한 ‘전국자유교양경시대회’에 강원도 어린이 대표가 되어 처음 서울에 진출하는 영광도 누린다.

그 시절 만화는 내게 세상을 읽어내는 창이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지를 알게 해준 감성의 교과서였다. 김종래를 읽으며 슬픔이 무엇인지, 조국애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임창의 만화를 보면서는 사랑과 우정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손의성과 이근철의 만화를 통해 정의감에 대해 배웠고, 고우영과 길창덕을 통해 유머 코드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만화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샘터였다. 내가 가진 다소나마의 상상력이란 게 있다면, 그건 순전히 그 시절 만화를 통해 형성된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입시에 매달리면서 만화는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멀어졌지만, 어린 시절 만화 편력의 경험은 두고두고 내 정신의 자산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늘 자신 있게 말하곤 한다.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들을 만화에서 배웠다” (56쪽)

동네 만화가게와 원주 이모네 만화가게에서 생활하던 추억은 영화에 대한 새로운 환상을 갖게 한 임창의 ‘땡이와 영화감독’, 전후 세대의 비극을 그린 김종래의 ‘눈물의 수평선’, ‘엄마 찾아 삼만리’, ‘어머니’, 협객들의 액션과 추리의 세계를 보여준 손의성의 ‘매국노’와 ‘동경 4번지’, 할리우드급 재미를 선사한 이근철의 ‘기관단총 케리’나 ‘조국을 등진 소년’, 요절한 고일영의 작품을 이어받아 연재한 아우 고우영의 ‘짱구박사’, 가라데의 명인 대머리 최영의를 태권도의 명인 장발의 최배달로 미화시킨 ‘대야망’을 통한 당시의 깊은 감명은 전율이었다. 훗날 대학생이 되어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오이 소주를 들고 찾아온 이웃집 아저씨 고우영이 B급 선(?)으로 표현한 마릴린 먼로와 제인 맨스필드에 대한 썰렁한 농담을 공유하는 즐거움도 빠트릴 수 없는 일화다.

집에 TV가 생기기 전까지 언제나 남의 집 브라운관을 훔쳐보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매일 저녁 동생 손을 잡고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신혼부부 집에 찾아가 밤늦도록 눌러앉아 눈치와 염치보다 앞선 TV를 향한 꼬마의 욕망을 어찌하랴? 일부가 스크린으로 옮겨지기도 했던 반공드라마 ‘실화극장’,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의 프로레슬링, 장소팔과 고춘자, 서영춘과 백금녀의 만담, MBC의 '웃으면 복이 와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유명세가 시작된 외화 ‘로하이드’,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보난자’에 대한 기억은 요새로 치면 영락없는 미드 붐을 방불케한다.

이발소 그림을 통해 밀레의 예술 세계에 입문하고, 극장의 간판들에 새겨진 수많은 난해한 글자들을 바라보며 어려운 한자들을 익히고, 대한뉴스와 문화영화와 함께 극장 문화를 기억하는 소년의 경험은 비교적 풍요로웠다. ‘우주괴인 왕마귀’, ‘대괴수 용가리’, ‘홍길동’, ‘호피와 차돌바위’, ‘백발의 처녀’, ‘월하의 공동묘지’, ‘성난 송아지’는 당시 빈약한 콘텐츠 생산력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그 나름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홍콩 영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외화 ‘아듀 라미’를 통해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를 처음 만난 기억의 기록은 영화 속 명장면을 흉내 내며 자랐을 소년의 귀여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집안의 전축을 통해 어린이 왈츠 시그널송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성장한 소년은 ‘엄마야 누나야’에서 감상에 젖어 눈물 뚝뚝 흘리기도 하고, 이승복 찬가와 맹호부대 찬가를 통해 비장미를 키우는가 하면 학사가수 최희준의 ‘하숙생’, ‘길 잃은 철새’를 따라 부르며 자란다. 코미디언 서영춘의 형 서영은이 작곡한 오기택의 ‘고향무정’을 통해 어린 나이에 당시 사회상을 어렴풋이 익혀 갔던 조숙한 모습도 그려진다. 이미자의 다양한 곡들은 물론 흑인 혼혈 가수 샌디김의 ‘잃어버린 고향’, 스물아홉에 요절한 가수 배호의 노래에 반하여 나훈아와 남진을 그 아류로 취급하는 등 꼬마 음악 평론가의 자질도 무럭무럭 자란다.

이 책은 1,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대체로 초등학교 시절까지의 이야기이고, 2부는 본격적인 청소년기의 기억이다. 대학생이 된 후의 이야기는 에필로그에서 간단하게 다룬다. 대학을 다니며 사고와 감성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지는 않고, 더 오랜 추억에 집중하는 것이다. 유신시대의 사춘기에 선데이 서울과 각종 성인만화,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를 읽은 기억은 훗날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을 흥미롭게 접근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김내성의 ‘청춘극장’, ‘쌍무지개 뜨는 언덕’, 중학교 때 스치듯 만난 소설가 전상국 선생님과의 짧은 만남, 동네 형들의 도움으로 여러 버전 ‘꿀단지’를 읽고, ‘김일성의 침실’, ‘세기의 여간첩 마타하리’라는 음란과 반공의 융합 문화는 물론 강철수, 고우영, 박수동 등이 그려내는 성인만화, 대통령을 미화시킨 부산일보 기자 김종신의 ‘0시의 횃불’ 등은 선명한 의식으로 남았다. 존 스타인 벡의 소설을 을유문화사의 강봉식 번역판 ‘분노는 포도처럼’으로 접했다는데, 그 작품에 감동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반에 알려진 ‘분노의 포도’ 보다는 당시의 그 제목이 훨씬 그럴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많은 가위질을 통해 편집된 계몽을 위한 외화들이 쏟아지는 시절에 지방의 소극장과 TV명화 등을 통해 수많은 영화들을 섭렵한다. 전쟁 영화로는 나바론 요새, 독수리 요새가 있고 풍운의 젠다성, 스카라무슈, 아이반호, 대장 불리바, 로마의 휴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을 통해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기준을 세워나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홍콩 영화의 추억들과 숀 코너리 시대의 007, 황야의 무법자와 튜니티 시리즈로 다져진 소년의 문화 코드는 대중문화의 역사에 중요한 중언이 될 것이다.

“가끔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놀기도 했다. 그럴 때 우리집은 가장 좋은 장소였다.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 술집에 갈 수는 없었고 야외에서 술 마시는 것도 눈치가 보였지만, 우리 집에서만은 아무 간섭 없이 시끄럽게 놀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지방 근무로 집에 거의 계시지 않았고, 어머니는 친구들과 술 마시며 노는 데 대해 관대하셨다. 가끔은 술을 사 주고 안주를 직접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어머니가 특별히 진보적인 교육관을 가졌던 때문은 아니었다. 어느 집이나 공부 잘하는 아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대한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었다. 1977년, 그러니까 고3이었던 해 입시를 앞둔 10월 언젠가, 박정희 정권이 금지했던 쌀 막걸리가 허용된 첫 날, 친구들이 어머니가 받아주신 쌀 막걸리를 마시며 놀았던 기억도 있다.” (277쪽)

우리 대중가요의 변화와 유신시대의 장발 단속이나 긴급조치, 대마초 파동, 외화 더빙의 추억 과 함께 결코 주체적일 수 없는 개발독재 시대의 제한적이고 수동적인 문화의 바다에서 그 나름 절절한 편력을 갖고 성장한 소년은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타의로 규정된 세월(노예 12년?)의 허물을 벗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아름다운 대학생활을 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시끄러웠고 친구와 선후배들은 격동의 현장으로 휩쓸려 나갔다. 재학시절에는 학교 노래 모임 ‘메아리’에서 활동했고, 졸업 후에는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를 결성하여 집단주의적으로 활동했는데,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관습을 부정한다는 관념이 앞선 데서 나온 무모한 도전이었노라 고백한다. 대중의 오해와 비난도 받아가며 기나긴 고난 속에서 짧은 영광을 누리기도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정작 듣고 싶은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의 결말은 아쉬운 여운을 남긴다. 대학생활 이후의 이야기는 에필로그로 짧게 다뤄지며 잔잔한 충격들을 던져주는데 언젠가 후속작으로 다시 쓰여지리라 믿는다.

출간 직후에 읽었던 이 책을 동네 독서 모임에서 이번 달 책으로 선정하는 바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읽었던 책을 거듭 읽으면 편하게 술술 읽히지만,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었다. 어떤 책이든 독후감을 남겨 놓지 않은 책은 기억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되도록 작은 메모라도 남기려고 노력한다. 읽는 것도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글로 쓰고 책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오래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 정리하며 기록하는 저자와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글을 다듬는 편집자의 보이지 않는 노력에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동네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구입해 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돌이켜보니 우리 모임은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책에 돈 쓰는 것을 주저하는 모임이었다. 무소유의 미덕으로 책 빌리기를 예찬하는 현장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를 견뎌가는 출판사의 아픔과 인세 수입이 거의 없는 작가들의 애환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기억은 과거의 것일 뿐 아니라 지금 나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다."라는 저자의 고백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청년들이 부모 세대의 의식과 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는 책이라 주변에 읽기를 권장하고 싶어졌다. 아니, 구입을 권장하고 싶어졌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책을 구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문화편력기’를 읽고, 글쓴이의 마음을 읽고, 출판사의 정성을 읽었다. 더 좋은 독자가 되고 싶어졌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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