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에로틱코리아를 선도한 영화 ‘아가씨’는 세라 워터스의 추리소설 ‘핑거스미스’를 각색한 작품인데 박찬욱 감독의 시공을 초월한 연출력으로 빛났다. 7년 전에 개봉한 동 감독의 역작 ‘박쥐’ 또한 기자와 평론가들로부터 비교적 호평을 받은 영화였지만 어두운 화면에 불륜과 폐륜의 부도덕이 버무려지는 것도 모자라 흡혈귀까지 등장하는 불편함으로 일반 관객들의 혹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체성과 나약함, 비겁함, 혼란스러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놀라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감독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존경심을 드러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은 전혀 새로운 소설 ‘박쥐’를 창조해 발표했다. 한편 박찬욱 감독은 소설과 영화의 관계가 꼬리에 꼬리는 무는 관계로 얽힌 의미 있는 작품임을 암시하며,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고백했다. 어떤 소설이란 말인가?

19세기 중엽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전근으로 엑상프로방스에서 성장한 예술과 문학에 심취한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에도 교육열 높은 어머니에 의해 명문 부르봉 중학교에 입학하여 폴 세잔, 장 바티스탱 바유를 만나 평생의 우정을 쌓아가지만 대학진학에 연거푸 실패하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절망에 빠진다. 좌절하던 스물두 살 청년은 명성 있는 아셰트 출판사의 발송 담당 직원으로 취직하고, 프랑스에 귀화한다. 시작은 비록 미약하였으나 청소년기에 쌓은 내공이 워낙 출중하여 콩트와 컬럼을 신문에 기고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청년은 이내 출판사 홍보책임자가 되었고, 날카로운 비평가로 명성을 쌓아가던 중 자전적 초기작품이 경찰의 관심을 받으면서 해고 된다. 1867년 여름, 실직에 좌절하지 않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던 스물일곱 청년은 그때까지 소수의 귀족이나 영웅 등 특별한 엘리트들의 몫이던 주인공의 자리와 주관적이고 과장된 표현 방식에 반기를 들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전혀 새로운 문학이론을 발명한다. ‘마담 보바리’로 촉발된 플로베르의 사실주의가 진일보함과 동시에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은 그렇게 탄생했다. 도전적이고 실천적인 청년이 새롭게 발명한 이론에 따라 창작한 소설은 마치 해부학자가 시체를 해부하듯 인간 영혼의 광기와 공포를 파헤친 명작으로 주인공 이름 그 자체가 제목이다.

“한길 끝에서 테레즈는 지나가는 경찰을 쳐다보았다. 로랑은 경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테레즈를 보고 가슴이 떨렸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면 즉시 체포될까 두려워 어느 문틈에 숨었다. 이렇게 숨어서 뒤를 쫓는 동안 그는 커다란 고통에 사로잡혔다. 자기 아내가 한가롭고 뻔뻔스럽게 치맛자락을 끌며 햇볕을 당당히 쬐고 있는 동안, 자신은 모든 것이 끝났고, 도망칠 수도 없으며, 교수형에 처해지리라는 생각을 곱씹으면서,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그에게는 처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았다. 공포는 그에게 일종의 맹목적인 확신을 갖게 했는데, 테레즈의 아주 하찮은 동작도 그의 확신을 더 강화시켰다. 그는 테레즈를 따라갔다. 마치 처형장으로 걸어가듯이 테레즈가 가는 곳으로 갔다.” (330쪽)

한때 동물적인 사랑으로 불타올랐던 부부가 그릇된 완성을 추구하고자 선택한 범죄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며 처절하게 망가지고 서로를 불신하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의 기가 막힌 반전인데 궁금증 해소를 위해 직접 읽어보실 것을 권장하며 처음부터 시작하겠다.

베르농의 오래된 잡화상을 경영하는 라캥 부인.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병약한 아들 카미유를 누가 돌보나 걱정하는 이기적인 모성애로 가득 찬 과부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에게는 조실부모하고 자신의 손에서 자란 조카 딸 테레즈가 있었다. 알제리에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드강 대위의 손에 이끌려 온 테레즈는 고모의 미지근한 보살핌과 선택권 상실 속에서 병약한 고종사촌 오빠와 한 침대를 쓰며 세상과 단절된 독특한 성장기를 보낸다. 테레즈는 열여덟이 되자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모의 결정에 따라 카미유의 부인이 되었다. 테레즈 라캥이 되었다.

모든 욕구가 억눌린 채 순종적으로 살아가던 새댁 앞에 어느 날 로랑이 나타난다. 로랑은 카미유의 어린 시절 친구로 우람한 체격에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호색한이었다. 순진한 그녀는 남편과 전혀 다른 남자의 동물적인 향기에 심취했고, 로랑은 그것을 눈치 채고 한 번 재미 볼 요량으로 테레즈를 유혹한다. 테레즈는 못이기는 척 넘어 갔고, 병약한 친구의 아내와 부담 없이 한 번 즐기려 했던 부도덕한 로랑은 순식간에 그녀의 야성미를 겸비한 여성미에 빨려 들어간다. 의도를 초월한 뜨거운 욕정으로 불륜은 합리화되고 두 남녀는 식을 줄 모르는 애욕에 불탄다. 남편과 시어머니 지척에서 그들은 대담하고 재빠르게 눈부신 번개 같은 게임을 즐기고 또 즐긴다.


라캥 부인이 살짝 문을 열고 발소리를 죽이면서 침대로 왔다. 테레즈는 잠든 시늉을 했고, 로랑은 흰 치마 밑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얘야, 어디 아프니?" 노부인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테레즈는 눈을 뜨더니 하품을 하며 돌아누우면서 처량한 목소리로 두통이 심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잠자게 내버려 둬달라고 부탁했다. 늙은 부인은 올 때처럼 소리 내지 않고 나가 버렸다. 두 연인은 소리 없이 웃으면서 거칠게 정열적으로 포옹했다. "알겠어요?" 테레즈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우린 여기선 아무것도 겁낼 게 없어요. 저자들은 모두 장님이에요. 그들은 사랑을 몰라요." (77쪽)

둘만의 규칙으로 목요일의 연인이 되어 대범하게 타락한 그들은 사랑에 방해되는 나약하고 쓸모없는 카미유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공모하고 실천한다. 그 여름의 끝자락에 걸린 어느 일요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위선 속에서도 변함없이 세월은 흘러,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테레즈가 알리바이 확보를 위해 한동안 로랑과 거리를 두는 동안의 마음은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서술된다. 수십 쪽으로 늘어지게 서술했을지도 모를 상황을 어쩌면 있으나 마나한 몇 줄의 사연으로 엮어 그녀의 심리 변화가 멋지게 드러난다. 훌륭한 표현기법이다.

“그녀는 한 젊은 남학생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 학생은 근처의 하숙집에 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상점 앞을 지나갔다. 그는 시인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장교같이 구레나룻이 났으며 창백한 안색의 아름다움을 풍겼다. 그녀는 한주일 내내 마치 기숙사 여학생처럼 그를 생각하며 연정을 품었다. 그녀는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그 젊은이를 로랑과 비교해 보니, 로랑이 대단히 살찌고 둔하게 생각되었다. 독서는 그녀에게 여태까지 몰랐던 낭만적인 지평선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피와 신경으로만 사랑을 느껴왔었다. 그런데 이제 머리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학생은 사라졌다. 하숙집을 옮긴 모양이었다. 테레즈는 금세 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155쪽)

돌이킬 수 없는 인생. 아무 것도 모르는 늙은 부인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아들의 친구인 다정한 로랑과 조카딸이자 조신한 며느리인 테레즈에게 감사하며 그들로부터 위안을 받는 묘한 상황에 이른다. 욕정에 못 이겨 제거한 자신의 나약한 희생물을 칭찬하는 로랑의 뻔뻔스러움은 황당하다. 그런 자신을 이상스럽게 노려보는 멍청한 시선의 테레즈와 눈이 마주칠 때는 섬뜩한 전율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 로랑은 자신이 거짓으로 칭찬한 사라진 연적의 장점을 스스로 믿게 되면서 갑자기 심한 질투를 느끼는 모순에도 빠져 독자를 즐겁게 만든다. 혹시나 테레즈가 아직 그 남자를 잊지 못하거나 사랑하고 있을까 겁이 나서 질투하는 모습도 어이가 없지만 냉정하고 훌륭한 분석 그 자체다. 반면, 죽은 아들을 칭찬하는 살인자의 위선에 속아 한없이 눈물 흘리는 라캥 부인은 점점 그에게 의지하고 더 깊은 호감을 갖는다.

추억의 끈이 풀렸다. 다시 나타난 카미유의 유령이 벽난로 앞으로 와서 신혼부부 사이에 앉았다. 테레즈와 로랑은 미적지근한 공기에 뒤섞인 죽은 자의 차고 축축한 냄새를 다시 맡는 듯했다. 그들은 시체가 곁에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때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모든 무시무시한 경위가 기억의 밑바닥에서 전개되었다. 카미유라는 이름은 과거를 되살아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살인의 고통을 다시 체험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입을 떼지 않고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212쪽)

태연한 두 짐승과 하나 뿐인 아들을 먼저 보내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노파의 동거는 아슬아슬하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의 위선에 감복한 주위의 부추김으로 혼담이 오간다. 천벌을 받아도 시원찮을 둘은 그렇게 결혼이라는 포상을 받지만 이내 심리적 응징이 시작된다. 소설의 참맛도 지금부터 달아오른다. 공포는 언젠가 롤랑 자신이 그려준 초상화를 통해서도 찾아오고, 쉼 없이 울어대는 라캥 부인의 고양이 소리로도 찾아온다. 양심의 가책인지 진짜 유령이 주위를 맴도는 것인지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그 어디도 편한 곳이 없다. 테레즈 역시도 똑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중 하늘도 무심하게 악인들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늙은 라캥 부인의 육체가 중풍으로 서서히 마비되더니 눈동자만 살아 있는 육체적으로 완전히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두 짐승은 환자를 돌보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미 식어 버린 사랑과 경멸의 불신은 삶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 뿐이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은 친자식도 아닌데 그리도 정성껏 병든 부인을 돌보는 절제된 욕망의 젊은 부부에게 감동하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라캥 부인은 말없이 미안한 나날을 보내는 지경에 이른다.

“테레즈와 로랑은 그들 사이 환한 불빛 아래 부인을 앉혀두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이미 그들을 떼어놓고 괴로움을 보호해줄 수 있을 정도의 생명력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거기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때 그들은 환영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카미유를 쫓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바로 그때 그들은 중얼 거리며, 전혀 뜻하지 않게, 모든 것을 라캥 부인에게 고백하고 말았다. 로랑은 마치 환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정신착란에다 발작을 일으키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반신불수의 늙은 부인은 갑자기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273쪽)

센 강에서 억울하게 소멸된 나약한 육체는 죽음의 순간에 온힘을 다해 로랑의 목을 깨물었는데, 그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거울을 볼 때마다 로랑을 괴롭히는 저주가 되었다. 살인자는 하루하루 견딜 수 없이 고통과 근심 속에서 숨 막히는 기억과 공포에 시달리는 밤을 지새우며 질질 끌려가는 삶만 낭비하고 있었다. 더 이상 희망 없는 미래와 역겨운 현실과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늪에 빠진 짐승의 나날은 권태의 포로일 뿐이었다. ​테레즈의 욕망도 증오와 원망으로 변신해 죄책감 가득한 냉랭한 침실을 배회하며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육체는 마비되었으나 온전한 정신으로 갈등하는 두 짐승을 통해 그 모든 진실을 알아챈 부인의 분노는 비탄의 절정이 된다. 자신이 생각하던 사랑과 우정의 피안에서 피와 치욕의 흉악한 광경을 목도한 순간의 고통은 독자의 말초신경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완벽한 소름을 불러일으키고, 로랑의 조롱에 서럽게 무너진다. 아, 불쌍한 라캥 부인은 과연 아들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까?

“그러다가 테레즈와 로랑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발작에 그들의 마음은 찢어져서 마치 어린애들처럼 서로 상대방의 품 안으로 덤벼들었다. 그러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엇이 그들의 가슴속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왔고, 또 비겁함으로 인해 살아남게 되면 또다시 겪어야 할 심연 속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과거를 회상하자, 끝없고 거대한 휴식과 망각을 바랄만큼 지쳐, 스스로에 대해 구역질을 느꼈다. 그리고 칼과 독이 든 컵 앞에서 마지막 시선, 감사의 시선을 교환했다. 테레즈는 그 컵을 들어 반쯤 마시고 나머지를 로랑에게 내밀었다. 로랑은 단숨에 마셨다. 그것은 하나의 번개였다. 그들은 벼락을 맞은 듯이 서로 포개져 쓰러지고 마침내는 죽음 속에서 하나의 위안을 찾았다. 젊은 여인의 입은 남편의 목에 있는 흉터에 닿았다.” (348쪽)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한 편의 멋진 연극을 본 느낌이다. 싸늘한 종말은 독자 개개인이 찾아 읽어야할 몫이다. 작가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고 고백했다. 테레즈와 로랑을 통해 상이한 두 기질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이한 연합, 그러니까 신경질적인 기질에 접한 다혈질적인 기질의 깊은 혼란의 흐름 말이다. 강한 남자 한 사람과 욕구불만의 한 여자를 소설 속으로 내던지고 그 둘의 행동 패턴을 관찰한 듯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영화 ‘박쥐’는 완벽하게 충족되는 응용작품이었다. 감독은 불가피하게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사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구상하다 ‘테레즈 라캥’을 읽었고 두 여자 주인공에 비해 크게 드러나지 않은 로랑의 역할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짐승 같은 19세기 인간을 이기적인 성찰을 가진 21세기 인간으로 탈바꿈시켰다고 밝혔다. 찰리 스트레이턴 감독의 ‘In Secret’은 에밀 졸라의 원작에 충실했고 ‘테레즈 라캥’이란 제목으로 2014년 국내 개봉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 영화 속 로랑과 테레즈가 주고받는 허무한 대사는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왜 카미유를 죽였지?" "함께 있으려고..."

에밀 졸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료를 검색하다보면 드레퓌스의 간첩 조작 사건이 우선시 되는 경향이 있다. 가수는 노래로 평가 받고, 화가는 그림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아직 번역도 되지 않은 그의 훌륭한 소설들이 아쉽다.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은 목로주점, 나나, 꿈, 제르미날 정도에 불과하다. 모두 ‘루공 마카르 총서’라는 기획 작품의 일부인데 작가가 서른 살에 ‘루공가의 운명’으로 시작해서 쉰세 살에 ‘파스칼 박사’로 마무리한 20부작 중 선택받은 소설이다. 특히, ‘목로 주점’은 출간 3년 만에 100쇄를 찍은 19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전반적인 작품을 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만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권을 골라야 한다면 단연 ‘테레즈 라캥’이다. ​​억제된 욕망 뒤에 찾아온 선택의 기회를 덥석 물었다가 스스로 지옥 속으로 걸어간 파멸의 심리전은 참으로 강렬하다. 평론가들의 해설, 작품의 장르와 역사성에 대한 글이나 나중에 덧붙인 작가의 서문은 작품을 난해하게 분석하지만, 소설 그 자체는 절정의 몰입감과 최고의 읽는 맛을 선사하는 명작이 아닐 수 없다.

한때는 자서전이나 신문을 통해 위대한 삶과 사회 현상들을 보고 배우려 노력했는데, 요즘은 소설에서 더 많은 인생을 배운다. 자서전이나 뉴스 기사는 현실 속 인물들이 등장하여 과대포장 된 허구적 삶을 보여주기 십상이지만, 소설은 허구적 인물을 통해 보다 사실에 가까운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150년 역사의 테레즈 라캥을 읽고, 114주기를 앞둔 에밀 졸라를 읽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유혹과 갈등을 견뎌야 할 일상 속의 당신과 내 눈빛을 읽었다. 한 번만 읽기에는 아까운 소설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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