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처음으로 해고된 날, 스타벅스에 앉아 책 한 권을 읽었다. 그 곳에 앉아 있으면 종업원 눈치 볼 일이 없고 마냥 친절해서 마음이 편했다. 그 어떤 국내 프랜차이즈 보다도 노동자들의 자부심이 높고 고용이 안정된 그 카페에서 매일같이 출근하듯 한 달을 보낸 뒤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커피 한 잔에도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이 커피회사를 특별히 더 좋아하는 까닭은 그 멋진 이름 때문이다.

약 200년 전 미국의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광부, 선원, 점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만 했던 한 남자로부터 시작된 이름이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다양한 경험과 독서를 통해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갖추게 된 그는 영국을 오가는 상선의 선원 생활과 포경선을 타고 태평양을 누빈 경험을 바탕으로 고집불통의 외다리 선장 에이해브와 흰 고래 모비 딕을 창조한다. 당시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팔리지도 않았던 그 소설은 설상가상으로 출판사 창고가 불타는 바람에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한 불운마저 겪었다. 1851년에 탄생한 바로 그 소설 ‘모비 딕’에서 당당하고 기품이 넘치던 일등 항해사를 기억하는가? 모비 딕에 이끌려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진 그는 120년 뒤 시애틀에서 시작된 지금도 끊임없이 혁신하는 세계 최고의 커피회사 이름으로 그렇게 화려하게 부활했다.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다 간 작가 또한 뒤늦게 마크 트웨인, 너대니얼 호손과 더불어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들이 미치고 눈이 멀어
유순한 그를 죽였음이니
그의 피가 그들 손에 있더라

강한 자가 눈물을 보이며
대지에 관보(棺褓)가 드리우고
사람들이 울음으로
철권을 드러내노니
사람들이 울음으로
철권을 드러냄을 조심할지라
(97쪽, 허먼 멜빌의 ‘순교자’에서 인용)

허먼 멜빌은 ‘모비 딕’, ‘빌리 버드’와 더불어 또 다른 걸작 ‘필경사 바틀비’도 남겼다. ‘월가의 이야기’라는 부제의 이 작품은 맨해튼 남부의 한 법률 사무소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비인간적 사회구조를 고독하고 가련한 바틀비의 삶을 통해 담담하게 표현했다. 필경사(Scrivener)란 직업은 개인적 기억으로 고향 마을 관공서 입구에 존재했던 대서소의 어떤 대서사(代書士) 할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 곳에서 열심히 공문서 베끼는 일을 하던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직업의 주인이다. 요새 취미로 하는 필사 문화가 유행을 타고는 있지만, 21세기에는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먼 과거의 일거리로 성실함과 신중함이 필요했던 19세기적 사무 노동자의 애환이 녹아난 직업이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필경사가 하는 일 중 자신이 쓴 필사본의 정확도를 한 자 한 자 검증하는 것은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무실에 필경사가, 한 사람이 필사본을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원본을 맡는 방식으로, 검증하는 일을 서로 거든다. 매우 따분하고, 넌더리나고, 권태로운 일이다. 쾌활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적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27쪽)

바틀비가 일을 시작한 법률사무소에는 이미 세 사람의 노동자가 있었다. 터키는 60대 초반으로 오전에는 신중하고 일처리가 깔끔하지만 오후만 되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필경사다. 니퍼즈는 20대 중반으로 오전에는 소화불량 때문에 집중을 하지 못하지만 오후에는 집중력이 높아지는 필경사다. 진저 너트는 열두 살 소년으로 마부인 아버지의 야심에 따라 법관을 꿈꾸지만 전혀 장래가 기대되지 않는 잔심부름꾼이다. 모두 본명 아닌 서로가 붙여놓은 별명이다. 그들 셋을 데리고 그럭저럭 일을 꾸려가던 변호사는 갑자기 일이 많아지면서 구인광고를 냈고, 조용히 나타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 바로 바틀비였다. 고용인은 열정적인 변론보다는 적당히 편안한 일을 좋아해서 주로 부자들의 재산 관리를 떠맡아 안락한 삶을 추구하며 처세술도 좋아 직원 관리를 제법 잘하는 사람이다. 오전에 신중한 늙은 터키와 오후에 신중한 젊은 니퍼즈의 장단점을 적절히 활용하여 저렴한 임금으로 조직을 꾸려나가는 실리주의자에게 두 사람을 뛰어 넘는 역량에 단정한 외모를 갖춘 필경사 바틀비의 등장은 행운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는 바틀비의 무뚝뚝함과 창백함에 은근히 불만을 드러내는 그저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우선시하는 전형적인 고용주일 뿐이다. 평생 만족스러운 직원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부르며 용건이 무엇인지 빠르게 말해주었다. 나와 함께 적은 양의 문서를 검증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틀비가 그의 은둔처에서 나오지 않고 매우 상냥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니 당황했을지 한 번 상상해보라. (29쪽)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던 바틀비는 어느 날 갑자기 작업지시를 거부한다. 새로운 업무를 설명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보다 많은 일을 시키려고 했을 뿐인데 단호하게 거부한다. 상냥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전혀 평범하지 않은 대사를 날린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는 원문에 "I Prefer not to"라는 비일상적 표현이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시에 맞서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는 절묘한 표현이다. 더구나 집도 없이 사무실에서 숙식한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지면서 당황스럽다. 작업 지시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던 바틀비는 더 나아가 아예 일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창밖만 내다보는 지경에 이른다. 고용인에게 바틀비가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변호사는 무엇인가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사무실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해. 그런데 왜 거기에 계속 있어야 하지? 명백한 사실은 이제 그는 내게 목걸이로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감당하기 괴로운 맷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동정이 갔다. 내가 그를 위해서만 근심했다고 하면 진실을 말한다고 할 수 없다. 그가 단 한 사람이라도 친척이나 친구의 이름을 댔더라면, 나는 바로 편지를 써서 그 가엾은 친구를 적절한 요양소에 데려가라고 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인 듯했다. 우주에서 철저하게 혼자인 듯 했다. 대서양 한복판의 난파선 조각이었다. 마침내 변호사업과 관련된 필요가 다른 모든 사정 위에 군림했다. 나는 엿새의 시간을 주고 그에게 무조건 자리를 비우라고 최대한 예를 갖춰 말했다. 그동안 다른 거처를 구할 조치를 취하라고 통고했다. 그가 사무실을 나가기 위한 첫 행동을 취하기만 하면 다른 거처를 구하는 일은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바틀비, 자네가 마침내 여기를 떠날 때 완전히 빈손으로 떠나지 않도록 해주겠네. 이 시간 이후로 엿새일세. 기억하게.” (59쪽)

화자는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매우 예의 바르고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고용주임을 은근히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위선이다. 아름답고 예의바른 해고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은 참 좋은 사람이고, 바틀비는 자신에게 해만 입히는 제 정신이 아닌 이상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꾸준하고 차분하게 강조한다. 이 문제는 매우 복잡 미묘한 노사갈등의 관계인지라 섣부르게 누구 한 쪽 편을 들기도 어렵다. 자신이 고용한 사람인데 시킨 일을 거부하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바틀비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과정은 온화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냉정하다. 마치 선심 쓰듯 곧바로 해고하지 않고 그저 외면하는 행위는 자신감 넘치는 용인술일 따름이다. 하지만 무시와 무관심을 통해 자멸하리라 예상했던 바틀비는 전혀 흔들림 없이 존재하며 위계질서마저 깨트리는 위협적인 인물이 된다. 터키와 니퍼즈가 은연중에 바틀비의 화법을 따라하는 것도 노이로제가 되어 화자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일을 계속할지, 아니면 자기를 떠날 것인지를 정중하게 묻지만 그마저 선택을 거부한다. 사무실 분위기도 점점 나빠진다. 모든 객관식 선택지에 대한 주관식 답변으로 저항하는 바틀비는 자유의 황당한 실천자이다. 도대체 말이 되는가?

“아직요. 지금 바빠요.” 바틀비였다. 청천벽력이었다. 순간 나는, 오래전 버지니아 주에서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오후에 입에 담뱃대를 문 채로 여름 번개에 맞아 죽은 사내처럼 우뚝 섰다. 그 사람은 열려 있던 따스한 창가에서 죽었는데, 그 꿈같은 오후, 누군가 그를 건드려 쓰러지기 전까지 거기 그렇게 상체를 내민 채로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나는 나직이 내뱉었다. “가지 않았군!” 나는 짜증이 났지만 그 불가사의한 필경사가 나에게 행사하는, 내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 놀라운 우위에 다시금 복종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나는 그 구역을 돌며, 이 전대미문의 곤란한 상황에서 다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그를 떠밀어 내쫓는 짓은 할 수 없었다. 험한 욕을 하며 쫓아내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을 부르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주검이나 다름없는 그가 나에 대해 승리감을 만끽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이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지? (64쪽)

변호사는 고심 끝에 문제 사원 바틀비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이제 끝났거니 싶었는데, 제안한 날짜가 지나서도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 아닌가? 바틀비를 흔들어 놓지 못하자 변호사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변호사는 바틀비를 그대로 두고 사무실을 이전한다. 하지만 그 이사 후 평화마저도 오래 가지 못하고, 옛 사무실 새로운 입주자로부터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는 바틀비를 어떻게 좀 해달라는 부탁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망연자실에 빠진 변호사는 바틀비를 찾아간다. 일터가 아닌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아보자고 제안하고 애원도 해보지만 그 역시도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바틀비의 대답으로 물거품이 된다. 옛 건물 주변을 배회하는 부랑자로 소문이 난 바틀비는 변호사의 방관과 외면 속에서 결국 교도소에 수감된다. 변호사는 자신의 평판과 사업에 있을지 모를 손해를 염려하여 바틀비를 면회하고 사식을 넣어주는 등 선행을 베풀지만 업무지시를 거부하듯 식사를 거부하던 가련한 남자는 감옥에서 굶어 죽는다. 훗날, 변호사는 바틀비의 옛날 직업이 배달되지 못한 사서 우편물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워싱턴의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하다가 갑작스런 구조조정으로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배달 불능의 편지를 처리하는 외롭고 우울한 일 때문에 바틀비의 성격이 더 우울해진 것으로 생각하며 진심으로 애도를 한다. 어쩌면 그것은 자기 위안일지도 모른다.

노동과 음식을 거부하다가 교도소에서 아사한 바틀비는 탐욕으로 얼룩진 비인간적인 사회구조, 황금만능주의에 저항한 숭고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이른바 ‘바틀비 신드롬’은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응용되고 재해석 된다. 조르조 아감벤은 바틀비에게서 세속적 메시야를 발견했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바틀비에게서 혁명적 주체를 발견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거짓된 저항을 거부하라고 주장하며 비판했다. 보르헤스는 프란츠 카프카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스페인 작가 엔리케 빌라-마타스는 ‘바틀비 주식회사’라는 작품을 통해 한 번쯤은 작품의 출간을 거부하고 “NO”라고 말하고픈 작가들의 상징적 인물로 바틀비를 재활용했다. 바틀비는 연극으로 영화로 꾸준히 연출자에 의해 뭔가 의미 없는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직업군이나 어려움이 많겠지만 출판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사내 CCTV 설치에 반대했다가 당시 사장과 갈등을 빚으며 물류창고로 발령 받았던 한 출판노동자가 있었다. 편집자에게 출판과 무관한 업무를 지시한 그 출판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반복적으로 노사갈등 혹은 노조 탄압이 문제 되었던 회사인지라 적절하게 대응할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체제에 저항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회사에 타격을 가한다는 것도 난감한 일이지만, 일을 하고 싶은데 안 주는 것 또한 심각한 폭력이다. 바로 그 문제의 출판사가 해당 편집자를 원직으로 복직시키는 내용의 노사합의문을 이달 초에 체결했다는 소식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합의가 이뤄지기 얼마 전까지 그 출판노동자에게 업무도 주지 않았고 업무용 컴퓨터도 설치되지 않았다고 하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번 합의를 통해 그 출판사와 해당 노동자가 진심으로 아름답게 새 출발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바틀비의 교훈은 어떤 일터에서나 유효하고, 어떤 일상에서도 문득문득 살아 숨 쉰다. 오래 전 스타벅스에서 읽었던 ‘서기 바틀비’를 하비에르 사발라의 그림과 함께 공진호 선생의 번역판 ‘필경사 바틀비’로 재독한 곳도 바로 그 카페였다. 사는 것이 녹녹치 않을 때, 문학은 큰 위로가 된다. 허먼 멜빌과 같은 위대한 작가의 삶을 읽어보는 것도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바틀비도 역시 삼독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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