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가 주인공의 열연과 감독의 뛰어난 연출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물론 다수의 시민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는 것은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역사 왜곡 때문이다. 고종이 환갑에 얻은 고명딸 이덕혜는 나라와 아버지를 잃고, 열세 살에 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 도주의 후예와 정략결혼을 했으며, 해방 후 모국으로부터 입국 거부는 물론 이혼, 딸의 죽음 등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초라하게 생을 마감한 그저 불쌍한 여인일 뿐이다. 영화가 내세우는 덕혜옹주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은 대부분 황당한 미화인지라 아무리 배우가 연기를 잘하고 사랑스러워도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역사드라마와 픽션이 난무하는 시대에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작가와 연출자들의 관점은 주관적 평가의 산물이라 감당하기 벅찬 논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 난중일기나 열하일기, 표해록과 같은 기록물은 작가의 뚜렷한 소신에 의해 남겨졌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높고 시대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역사적 신뢰도는 물론 문학성이 뛰어나고 인간 내면의 적나라한 감정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사실적인 묘사가 압권인 수작으로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한산함과 대비되게 권력 핵심부의 여인이 칠순이 넘은 나이에 한 많은 인생을 회고하며 드러낸 격정의 목소리와 절규가 독자의 심장을 오래도록 움켜쥐고 쉬이 놓아주지를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 사람치고 ‘한중록’과 사도세자를 모르는 이는 없다.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사건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죽지는 못할망정 아들을 죽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것도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뒤주에 가두어 만 칠일 동안 서서히 죽게 했다. 게다가 죽인 사람은 누구이며 죽은 사람은 누구던가. 죽인 사람은 영조 임금이고, 죽은 사람의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사도세자가 아니던가.” (옮긴이 해설 첫머리)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와 동갑인 1735년생으로 노론 명문가의 딸이다. 영조는 관례를 치른 아홉 살 사도세자를 동행하고 성균관을 참배했다가 유생 중에 한 사람 홍봉한을 만난다. 당일 알성시에서 낙방한 홍봉한은 다음날 궁궐에 불려가 영조의 배려로 다시 한 번 시험에 임하지만 거듭 낙방한다. 무슨 일인지 홍봉한은 당락과 상관없이 영조의 신임을 얻었고, 그의 딸 혜경궁 홍씨는 이후 펼쳐지는 까다로운 삼간택을 무리 없이 통과하여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영조 21년, 사도세자를 사위로 맞은 무명의 9품직 홍봉한은 그해 가을 문과 정시에 합격하고, 거침없는 출세의 길을 달릴 수 있었다. 어린 세자빈은 궁궐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시어머니 선희궁과 시누이들의 호의 속에서 고달픈 궁궐생활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영조 24년, 왕의 편애를 받던 맏딸 화평옹주가 난산 끝에 사망하자 영조는 실성한 사람처럼 과도한 슬픔에 빠졌다. 영조 26년, 열다섯 살 혜경궁 홍씨가 첫 아들 의소를 낳았으나 큰 딸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왕은 시무룩했고, 의소는 세손에 책봉되나 할아버지 왕의 무관심 속에서 2년 뒤 봄에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 아픔의 가을에 낳은 홍씨의 두 번째 아들이 훗날 정조다. 영조 37년에 아버지 홍봉한은 우의정이 되고, 영조 38년에 왕의 노여움을 산 남편은 뒤주에 갇혀 만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1762년 양력 7월 4일 뜨겁고 서러운 여름날이었다.

대저 이 일에 대해 영조를 원망하며 경모궁이 병환이 없으신데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도 하고, 또한 아버지(홍봉한)께서 뒤주를 들이게 했다고도 하니, 이는 실상과 어긋날 뿐만 아니라, 영조, 경모궁, 정조 모두에게 망극한 말이라. ‘애통은 애통이고 의리는 의리라’는 논리만 잘 붙잡으면 이 사건의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가 무엇이 어려우리오. 내 1802년 봄에 이 글의 초고를 만들어 놓고도 미처 주상에게 보이지 못했는데, 최근 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순궁(순조의 생모)이 ‘자손이 알게 하는 것이 옳으니 써내라’ 청하여 비로소 가까스로 써 주상께 보이니, 내 심혈心血이 이 기록에 다 있는지라. 새로이 심혼心魂이 놀라 뛰고 간장이 무너져 글자마저 눈물져 글씨를 이루지 못하니,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다시 어이 있으리오. 원통코 원통토다. (21쪽)

인생의 쓴맛 단맛을 두루 경험하며 권력의 최정점에 우뚝 선 여인은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세상의 견해를 모두 반박한다. 정순왕후 측의 입장인 사도세자 죄인설과 소론과 남인들이 집권 노론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하들의 모함에 의한 억울한 죽음설이 바로 그것이다. 혜경궁은 이 두 가지 설이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에게 모두 잘못을 지우는 일일 뿐만 아니라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도세자의 병이 깊어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남편의 죽음은 애통하지만 시아버지와 아들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다. 비운의 그녀가 아들과 손자를 왕으로 만든 것은 훌륭한 어머니상으로 모자람이 없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 친정을 위해 남편의 죽음을 방조한 권력 지향적인 냉혹한 여성이라며 공격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그녀는 남편에 이어 아들 정조마저 의문사한 2년 뒤 1802년 봄에 억울한 마음을 담아 쓴 초고를 며느리 가순궁의 격려 속에서 재구성하여 손자인 순조가 재위 6년째인 1805년 4월에 비로소 공개할 수 있었다. 그보다 10년 전 환갑이던 1795년에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나의 일생’을 집필했다. 1802년에 별도로 집필한 ‘친정을 위한 변명’이란 글에 1806년 에필로그 형식으로 못 다한 이야기를 덧붙여 한 권의 책 ‘한중록’으로 엮어낸 것은 현대 사회의 옮긴이와 출판인들의 열정 없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나, 곁에 있는 사람이 앗음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죽고자 하되 한 토막 쇳조각이 없으니 하지 못하니라. 숭문당에서 휘령전으로 나가는 건복문 밑으로 가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영조께서 칼 두드리시는 소리와 경모궁께서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애원하시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 소리를 들으니 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막막하니, 가슴을 두드려 아무리 한들 어찌하리오. 당신 용력勇力과 장한 기운으로 뒤주에 들라 하신들 아무쪼록 아니 드시지, 어찌 마침내 들어가시던고. 처음은 뛰어나가려 하시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이 되시니, 하늘이 어찌 이토록 하신고.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라. 내 문 밑에서 울부짖되 경모궁께서는 응하심이 없더라. (133쪽)

지난해 개봉하여 호평을 받은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철저하게 한중록을 기반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조 역 송강호의 카리스마와 사도세자 역 유아인의 열연에 밀려 혜경궁 홍씨 역할에서 상대적으로 내면 연기를 보여주지 못한 여배우에 대한 평가는 한중록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공통된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책의 중간 중간에는 ‘한중록 깊이 읽기’라는 40편의 부록이 덧붙여 있는데 그 기록들을 살펴보면 창경궁 내 휘령전은 영조의 전부인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쓰일 때 붙인 이름이고, 그 전각의 이름은 문정전이다. 인용한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휘령전에서 뒤주에 갇힌 뒤 당일 승문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를 찾아가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애원하고, 혜경궁은 사도가 세자에서 폐위되고 뒤주에 갇히자 자결을 시도할 만큼 극도의 불안에 떨었으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아버지 영조에게 편지를 쓴다. 죄인의 처자가 편안히 대궐에 있기도 황송하오니 친정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면서, 그 끝에 세손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잘 보전하여 주시라고 간절한 부탁의 글을 내관을 통해 올린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오빠 홍낙인이 찾아와 동궁을 폐위하여 서인을 만들었으니 대궐을 나가야 한다며 세손과 함께 본집으로 데려간다. 영조가 죽은 아들을 폐서인하여 평민으로 만들어버렸기에 더 이상 세자빈이 아닌 홍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얼마 뒤 사도세자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궁궐로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그녀는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유일한 희망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명한 그녀는 불타는 분노를 삭이고 영조를 찾아가 복위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최고의 처세를 보인다. 원망과 비난을 기대했던 영조도 며느리의 메시지에 화답하며 부끄러운 마음을 살짝 내보이며 효행을 칭찬하고 감격한다. 시아버지의 신임을 되찾자 모든 것은 술술 풀렸다. 한중록에 그 모든 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었는데, 단순한 사실 전달 수준을 넘어 독자가 함께 분노하고 격정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빼어난 글 솜씨로 불타는 가슴을 감추지 않는다. 읽고 또 읽어도 벗어날 수 없는 마력이 있다.

주상께서 작년에도 경모궁 산소에 거둥하시어 슬픔을 이기지 못해 혼절하는 지경까지 이르시니, 그때 신하들이 별안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니라. 내 이번에도 그러하실까 임금을 위하여 설움을 다 펴지 못하고, 임금 또한 노모를 위하여 슬픔을 누르시니, 모자 서로 위로하며 무사히 다녀오니라. 내 질긴 목숨은 갈수록 그지없으니, 스스로 염치없이 산 듯 부끄럽더라. 망극 중에 생각하니, 경모궁 돌아가시던, 하늘이 다 무너질 것 같은 그 시절에, 임금은 열 살이 갓 넘은 어린 나이셨고, 청연 자매는 아직 열 살도 안 된 유아니, 장성하기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더라. 다행히 평안히 길러내어 임금 나이 이제 사십이 넘으시고, 두 딸 또한 그러하니, 이렇게 혈육을 보전하여 거느리고 와서 경모궁께 뵈니, 서러운 중에도 내 당신 자녀를 잘 길러냄을 그윽이 고하며 "당신께서 끼치신 빛이 있어 할 수 있었노라" 말하였노라. (255쪽)

혜경궁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회복 불가능한 갈등과 더불어 평소에 멀쩡했다가도 발작이 오면 막을 수 없는 남편의 기행과 살인 행각을 힘없이 지켜보는 것도 지쳤을 것이다. 시어머니 선희궁은 아들을 더 이상 지켜주지 못하고 남편 영조에게 낱낱이 보고하며 사도세자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사이좋은 고부 관계였던 선희궁과 혜경궁은 각자의 손자이자 아들인 세손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암묵적 동의하에 사도세자를 포기했다는 정황은 여러 가지 기록을 보면 읽어진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 날 비극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가슴 타는 불행한 과거의 회한을 어찌 지울 수 있을까.

한 많은 세월을 견디고 견딘 끝에 드디어 영조 52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 정조가 드디어 왕위에 올랐지만 친정은 편하지 못했다. 같은 집안사람이지만 적대적 관계였던 정조의 오른팔 홍국영은 말할 것도 없고 사방에 적들이 넘치는 세월 앞에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노론과 맞선 아들 정조는 자신의 외가를 방해 세력으로 간주하며 20년 가까운 세월을 응징했고 겨우 용서하고 화해 하는듯한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효도를 선언한 아들 정조가 의문의 최후를 맞는다. 한편 쉰다섯에 얻은 자신과 생일이 같은 손자 순조가 왕위에 오르지만 오랜 정적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정 동생 홍낙임마저 처형당한다.

팔십여 년의 인생에서 칠십 여년을 삼엄한 궁궐 시집살이로 보내야 했던 그녀는 한 많고 억울한 감정을 호소하기 위해 글을 썼으니 엇갈린 평가가 공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멈추지 않는 칼바람 속에서 오열하는 혜경궁이 비통한 마음을 담아 절절하게 써내려간 문장이 쌓이고 쌓여 그렇게 ‘한중록’이 되었으니 평가는 독자 각각의 몫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나라의 큰일이요. 하물며 동생은 내 동기요. 돌아가신 임금의 외삼촌이라. 설사 그럴싸한 죄상이 있어도 쉽게 해하지 못할 것인데, 모아낸 죄명이 한 가지도 말이 되지 못하고, 잡담 말라하며 그저 죽이자고만 하니라. 그러면서 ‘모여서 임금께 직접 청하네’, ‘죄상을 적어 올리네’하여, 마침내 천리 바다 밖 제주에서 죽음을 받게 하니, 만고 천지간에 이런 원통한 일이 어이 있으리오. 내 칠십을 바라보는 늙은이로 아들을 잃고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나도 같이 죽기만을 원하는 중. 동생이 백지百地 한 가지 죄도 없이 참화를 입었는데, 내 지위에 살아 앉아서 동생을 구하지도 못하니, 나처럼 어리석고 독한 사람이 다시 어이 있으리오. (418쪽)

시어머니 선희궁이 세상을 떠난 뒤에 영조는 12년이나 더 집권했는데, 10살이나 어린 후비 정순왕후를 필두로 정적들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주변의 감시와 도전 속에서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괴로운 나날이었다. 홀로된 시누이 화완옹주가 아들을 뺏어가다시피 차지하려 들었고, 영조 또한 요절한 장남 효장세자의 후사로 세손을 거론할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을 잃고 아들만 바라보는 단 하나의 희망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너무나 큰 시련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정순왕후네 아버지 김한구는 혜경궁 친정아버지 홍 씨의 도움으로 성장했지만 권력을 향한 치열한 질주는 배신의 칼날로 다가올 뿐이었다. 다행히 혜경궁은 아들을 잘 지켜냈다. 1776년 3월 마침내 조선의 제22대 왕위에 오른 정조는 단순한 일성으로 이 땅을 장악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혜빈이던 홍씨는 아들이 임금이 되면서 혜경궁(惠慶宮)으로 승격되었고 그나마 순탄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정조는 집권 14년 차에 아버지 무덤을 현릉원으로 바꾸고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였으며, 마침내 환갑을 맞은 어머니를 모시고 간다. 남편 떠난 32년 만에 그 무덤을 찾은 기구한 인생은 격동의 세월을 이겨낸 그녀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 사후에도 15년을 더 살았지만 정적들과 끊임없이 대립하며 결코 순탄치 않은 81년을 마감했다. 다행히 남편과 아들 나란히 모셔진 융건릉에서 재회하여 죽어서나마 한을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집에서 10여 분 거리에 융건릉은 자주 찾는 산책로이다. 무더위가 꺾이지 않던 늦여름에는 날파리가 극성이라 방문객도 적고 평소와 달리 한산했다. 첫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정조 부부의 합장릉 ‘건릉’이 있다.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어 내려가면 곤신지 연못 뒤쪽으로 이 책의 저자가 일찍 세상을 등진 남편과 함께 영면한 융릉이 있다. 소나무 숲을 거닐며 200여 년 전 이 땅을 호령했던 비운의 개혁군주와 형언할 수 없는 거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 부모를 생각한다. 사도세자는 비운의 죽음을 맞았지만 이후의 조선을 지배한 왕들은 온전히 사도세자의 후손이었다. 순조는 손자, 헌종은 고손자, 철종은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 고종 역시 숙빈 임씨와 사이에서 낳은 은신군의 증손이었다. 융릉 입구의 참나무 아래서 한중록을 읽으며 진리 보다 거친 이해관계로 얼룩진 인간 내면의 복잡함과 권력의 무상함을 생각했다.

이 책을 옮긴 정병설 선생님을 만나 뵐 기회가 있었는데, 진심으로 좋은 번역에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전폭적인 자금 지원과 마감 압박 없이 여유롭게 작업할 수 있도록 후원해준 출판사 사장에게 공을 돌렸다. 보통 출판사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개념으로 반드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완벽한 책을 만들어 달라는 강태형 사장의 후원 덕분에 신념과 자신감을 갖고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사기업이 나서서 추진한 듯한 감상에 젖어 해당 출판사의 ‘한국고전문학전집’을 한 권도 빠짐없이 구입하여 읽었다. 한중록을 읽고, 혜경궁을 읽고, 여름 날 한숨 속에 슬퍼하는 내 고민의 초라함을 읽었다.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다가 작은 일도 크게 만들며 늙어 간다. 참으로 억울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여름날의 아픈 기억은 모두 내려놓으니 문제의 근원이 나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마음으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나를 대할 때는 가을서리처럼 하루하루의 반성과 새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 가을서리(秋霜)의 희망을 찾아준 한중록을 읽고 또 읽는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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