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사진으로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아낸 '흑백 그리고…'라는 전시회를 통해 그를 처음 알았다. 전문가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1인 1미디어 혹은 1인 1카메라 시대에 들어서던 시점이라 사진기자가 뭐 대단한가 싶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아무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를 살다 보니 간편함이라는 긍정성에 눈이 멀어 주변의 현상들을 마구마구 찍어대고 산만하게 써대는 정보 홍수 시대의 공범으로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의도되지 않은 전문가 상실의 시대에 인간 가치의 무력화가 지속되는 동안 사람이 희망이라거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마냥 추상적이지 않은 이유를 사색하게 한 사람이었다. 흑백으로 분리된 세상 너머에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은은하게 전해줬고 런던 서머셋하우스 경매에서는 그 나라의 VIP 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아 낙찰되는 영광도 누렸던 사람이다.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언론고시에 연거푸 낙방한 끝에 겨우 입사한 경향신문에서 사진기자가 되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인터뷰 장소에 나타나 주변 환경을 꼼꼼히 살피고, 촬영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취재기자의 인터뷰 순간에도 귀를 기울여 열심히 듣고, 간간이 메모까지 하면서 자연스러운 몸짓 하나하나를 포착하여 꾸며지지 않는 대상의 참모습을 잡아내다보니 기사의 방향까지 바꿀 때도 많았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이동하며 취재기자의 글이 빛날 수 있도록 최상의 사진을 담아내면서 그림자처럼 생활했을 세월들을 상상한다. 그런 그에게 중앙일보 온라인 문화면을 채울 업무적 글쓰기 요청이 들어왔다. 마치 축구경기 도중 우리 편 수비수에게 공격 좀 맡아 달라는 그런 주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다른 공격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팀의 요청에 따라 최전방으로 달려가 골대를 흔드는 슛을 날리기 시작했고, 공격이 끝나면 본연의 위치로 되돌아와 수비에 더 충실했다. 거절을 못해 몇 번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수로 되돌아올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느새 양수겸장의 스타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미디어의 수비수가 공격수로도 공헌하면서 전천후의 위력을 발휘하자 관중들의 함성도 커졌다. 그는 전문가다!

“사진만 이십 년 이상 찍어 온 제게 글은 공포였습니다. 혹시나 해서 지난 사진들을 찾아봤습니다. 묘하게도 그 사진들이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은 덕이었습니다. 열댓 번 정도는 쓸 수 있겠다 싶어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어쭙잖은 글이지만 사진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썼습니다. 처음 열댓 번이라 마음먹었던 게 어느덧 여든 번이 넘었습니다.” - 9쪽 저자 서문에서

머리가 아닌 가슴과 발로 누볐을 수많은 현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단한 노동의 순간들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준비한 월요일의 선물 보따리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2014년 늦가을부터 시작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팔십여 편의 기록 중 스물여덟 편만을 골라 우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될 예정이라 속편도 쏟아져 나올 기세다. 뒷담화(?)를 시작하면서 재회의 기쁨 혹은 추억의 재생으로 이어진 만남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으로 기록되었고,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4부로 구성된 잔잔한 울림의 포토에세이가 되어 서가를 장식하게 되었다.

제 1부는 ‘소년은 늙지 않는다’는 주제로 청춘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일곱 남자가 등장한다.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어느 시상식장에서 수상자인 어린이 앞에 무릎을 꿇은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다. 인터뷰 도중에 뭔가 설명하는 장면을 놓쳐버린 사진기자가 목도리도마뱀을 연상시키던 그 포즈를 아쉬워하며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요구했고 흔쾌히 응해준 덕분에 제대로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고은 시인의 경우는 인터뷰 현장에 소주 한 병을 들고 나타난 엉뚱함을 그대로 담아냈고, 한 마리 고독한 늑대로 살고 싶다던 다큐멘터리 사진가 권철의 삶을 지켜보는 따뜻한 시선에는 부러움도 가득하다.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이 간송미술관에서 50년을 생활하는 동안에 만난 40년지기 백진달래와의 조화도 오묘하게 기록되었다. 문민정부 시절 통상산업부 차관 출신으로 부상당한 노구를 이끌고도 10년 전의 약속을 결행하며 행복에 젖은 박운서 선생의 거침없는 발 사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김녕만·김덕수·임동창·손숙·이미자·앙드레김 등 여러 사람들과의 '기맥힌' 인연을 이야기하던 장사익의 미소에서는 노래 소리처럼 흥겨운 가락이 느껴졌다. 이상무 화백의 처조카인 저자가 장례식장에 찾아온 만화가 윤태호 선생과 4년 만에 재회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사연도 인상 깊게 수록되었다.

그러고 보니 딱 십 년이었다.
10년 계획으로 떠난 그가 의식불명인 채로 한국에 돌아온 게….
그리고 칼럼으로 판단컨대 그는 10년 전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중략)
“제가 가진 재주가 사진 찍는 재주뿐이니 사진 한 장 찍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사실 병원으로 찾아 온 이유였다.
“영정사진하면 되겠네.”
“그런데 제가 영정사진이라고 찍으면 잘 안 돌아가시더라고요.”
“그러면 더 좋지.”하며 시원스레 웃었다.
그가 보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매일 죽는다’였다.
- 60쪽 박운서 전 차관, 십 년 전의 약속 중

제 2부의 주제는 ‘그들의 언어’다. 국립발레단 예술 감독 강수진의 등 근육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그녀가 남편 외에는 보여주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발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낸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스스로 빡빡머리가 된 사진작가 윤광준, 세월호 참사 직후에 만난 사람으로 사전 약속이라 취소하지는 못하고 서로가 불편했던 슬픈 만남으로 잠깐의 읊조림에도 이내 눈물이 맺혔던 배우 김혜자, 산짐승 같은 삶을 살아온 대관령 양떼목장 주인 전영대, 겨우 세 번의 교통사고로는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며 세상에 맞선 미긍(美肯)의 컬처디자이너 강주혜, 망원경을 통해 국경의 그 무엇들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사색하던 소설가 김훈의 뒷모습, 잘난 척하며 사진 찍히는 게 싫다던 설악산 신흥사 조실 무산 조오현 스님께 조용히 용서를 빌어야만 했을 몰래 찍은 기념사진 한 장, 사진의 역사를 담아내다보니 스스로 사진전의 구성 요소 중 하나가 되어버린 동료 작가 곽명우에 대한 깊은 존경심도 함께 한다.

"사람들은 삶을 처음에는 과대평가해요. 영원한 삶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다가 또 과소평가해요. 지긋지긋하다느니, 너무 짧다느니 하면서 내동댕이치려 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요. 결국 선물 받은 게 아니라 잠시 빌린 거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빌린 거니까 잘 써야죠…." 잠깐의 읊조림에도 이내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는 눈물, 연극 연습이 아니라 숫제 흐느낌이었다. 차마 그만 우시라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였다. 사진을 찍는 나까지도 먹먹해졌다.
- 106쪽 배우 김혜자,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대사 중

제 3부는 ‘행복의 정의’라는 주제로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스스로 미친 과학자라 불러달라던 김대식 교수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상과 자신의 불일치를 만들고, 그것을 극복하는 절차와 과정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사진은 베스트셀러 ‘김대식의 빅퀘스천’ 표지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 티를 내고 싶지는 않은데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 자신은 행복한 것이 사실이라며 생계형 웃음 크게 웃던 농부 철학자 윤구병의 사진 또한 ‘내 생애 첫 우리말’ 표지를 장식했다. 교수를 관두고 글 쓰고 그림 그리며 격한 외로움과 더불어 미래를 알 수 없는 행보의 작가로 살아가는 김정운의 멋진 사진도 부러움 그 자체이다. 요새 인기 절정으로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바쁜 이연복 셰프의 미소를 담아내기 위해 타오르는 불 뒤에서 자세를 잡고 사진에 담아낸 촉박했던 순간의 사연, 직접 스튜디오로 찾아와 전기이발기를 켜고 옷을 입은 채로 머리를 깎아내며 촬영에 임했던 경영하는 디자이너 김봉진, 30여 년 전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두 팔과 두 발가락을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네 살 아들을 위해 갈고리 손으로 그림을 그려주다가 그대로 화가가 된 석창우, 끓는 물을 사정없는 붓는 자신감으로 수많은 세월의 내공을 보여주던 아홉 번째 덖음의 고행 길을 들뜨게 걸어가던 묘덕 스님, 예쁘게 찍지 말고 수더분한 할머니로 찍어 달라던 이해인 수녀의 초상화 같은 사진 한 장의 사연 또한 잔잔한 감동과 여운으로 남는다.

“현대인은 고독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매여 산다. 평균수명이 짧았을 땐 문제가 안 된다. 백세시대가 되면 문제가 된다. 매년 건강검진 받는 시대이니 돌연사를 하고 싶어도 못할 정도가 된다. 그러면 고독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외로운 개인은 외로움을 회피하려 적을 만들게 된다. 적을 만들면 내 편이 생긴다고 생각하게 된다. 분노·적개심으로 고독감·상실감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적을 만드는 건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외로움 때문이다. 쓰나미 같은 집단 공황이 올 수도 있다. (중략) 외로움은 해결하는 게 아니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다. 자신을 상대화해서 자기를 들여다봐야 한다. 외로우면 정말 나에게 중요한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다. (중략)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해야 한다. 주체적인 삶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공부란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를 말하는 것이다.”
- 191쪽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김정운의 격한 외로움’ 중

마지막 제 4부는 이해인 수녀의 시 제목 ‘12월의 시’를 그대로 가져다 쓴 주제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의 분위기에 걸맞는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기억의 장이다. 연극 ‘봄날은 간다’ 연습실에서 만난 천생 배우였던 김자옥의 유쾌한 모습, 엉뚱한 등번호 75번을 달고 있던 한화 2군 감독시절에 만났지만 영원한 11번으로 기억될 불세출의 야구 영웅으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갈매기 주름에 빛나는 최동원, 23년만의 재결합한 들국화 4집 앨범에 수록된 희망곡 ‘들국화로 必來’에 화답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주찬권,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신영복 선생님과 그 가족들을 위해 선물로 보낸 몇 장의 사진과 햇볕처럼 따스했던 그날의 기억, 바람의 사진바라기 김영갑이 루게릭병으로 소멸되어 가던 중에 남긴 애틋한 그리움들이 수록되었다.

“제가 무기징역 받고 추운 독방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왜 자살하지 않나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저는 햇볕 때문에 죽지 않았어요. 그때 있었던 방이 북서향인데, 하루 두 시간쯤 햇볕이 들어와요. 가장 햇볕이 클 때가 신문지 펼친 크기 정도고요. 햇볕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내일 햇볕을 기다리고 싶어 죽지 않았어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결코 손해는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죠. 그 다음에는 내가 자살하면 굉장히 슬퍼할 사람들이 있었어요. 부모, 형제, 친구…. 존재라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햇볕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행복해 하는 모습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인연이 없었다. 거의 오 년 만에 제자를 통해 연락이 온 것이다.
- 265쪽 ‘신영복 선생과의 인연’ 중

신영복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조용히 문상을 다녀간 저자는 발인하는 날 ‘신영복 선생과의 인연’이란 제목의 기사를 세상에 내보냈다. 신영복 선생님을 추앙하는 일부 사람들의 기사에 대한 시시콜콜한 평가는 취재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지만 당사자로서 정작 고마운 사연이다. 기사가 홍보물이 아닌 바에야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문맥상 그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 저자의 연재 기사를 빠트리지 않고 찾아 읽었다. 그의 시선이 그 어떤 기자의 눈보다 정직하고 따뜻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팬이 되었다.

두꺼운 소설 보다 얇은 시집 한 권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다. 짧은 글이나 단조로운 그림이라도 양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깊은 사색이 필요하고 결코 글자 수나 복잡한 색상 수에 비례되지 않는 시간을 투자해야만 완성되는 독서가 있다. 기사가 묶여 한 권의 책으로 나오는 과정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차례를 정하고 표지 디자인만 끝내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인터넷용 사진과 인쇄용 사진의 차이에서부터 문체나 구성, 후일담 등 다시 작업해야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길이 없다. 소재의 경중을 떠나 구성과 기획의 차이에서 오는 미묘한 관점 탓에 책으로 엮어지지 못한 사연들도 있고, 그것은 저자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 흔한 출판기념회나 공개적인 사인회가 생략된 것만으로도 그런 고민이 읽어졌다.

혼신으로 담아낸 사진 한 장을 읽어내는 데에는 형언할 수 없는 뇌 노동이 필요했다. 하나의 시선 끝에서 펼쳐지는 스물여덟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희로애락으로 완성된 한 권의 책을 통해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읽었다. 진실한 눈을 가진 이의 감성과 관찰력을 통해 이 시대의 빛과 희망일 수 있는 수많은 인격체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참모습을 목격하는 행운의 독자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꾸며지지 않은 텍스트를 통해 정직한 시선을 발견했고, 표정들이 살아 숨 쉬는 사연 많은 사진들에 눈길이 머무는 동안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書三讀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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