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추운 겨울이 떠나려나 보다. 절기상 벌써 봄이어야 하는데,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캔버라의 날씨는 여전히 겨울 언저리에 있었다. 겨울 같은 날씨에 봄의 체면을 살린 것은 그나마 호주의 국화인 황금 와틀(Wattle)과 특이하게도 분홍, 하양 벚꽃이다. 캔버라의 봄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집집마다 봄꽃들로 정원을 장식하는 경우는 많지만, 캔버라의 자연은 봄에도 대개 푸르름이다. 화려한 봄꽃도 좋지만, 이 푸르름도 좋다. 연하디 연한 연두색의 새순들을 보고 있으면, 순하고 맑은 기운이 내 속으로 파고 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정말 캔버라에 봄이 왔다. 파란 하늘과 역동적인 구름, 눈부신 햇살마저 머물지 말고, 움직이라고, 자꾸 등을 떠민다. 다행이다. 정처없이 헤매지 않아도 갈 곳이 생겼다.

이즈음 되면 어김 없이 시작하는 캔버라의 유명한 꽃 축제 플로리아드(Floriade). 봄 나들이, 주말 나들이로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 해도 좋은 곳이다. 혼자라도 괜찮다. 색색 꽃들이 말동무가 되고, 배경이 되니 있는 그대로 즐기면 그뿐이다. 플로리아드는 호주 200주년과 수도 캔버라 75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1988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29회째. 꽤 긴 역사만큼, 남반구 최대 꽃 축제로 세계 각국에서 인파가 몰린다. 주말마다 많은 관광버스가 플로리아드를 방문한다. 주로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의 여행객이 많지만, 시드니를 방문한 각국의 관광객이 플로리아드 축제에 맞춰 캔버라를 찾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올해 플로리아드는 2014년보다 약간 시들한 느낌이다. 나들이 하기에 딱좋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상밖으로 관람객이 적었다. 캔버라는 학교 방학에 들어갔지만, 다른 주는 그렇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될 듯 싶다. 지난 9월 17일에 시작했으니 아직 꽃들이 만개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10월 16일까지 이어지는 축제이니 10월에 들어서면 더 아름다운 꽃밭을 볼 수 있으리라.

플로리아드의 대표꽃은 튤립이다. 거대 인공 호수 벌리 그리핀( Burley Griffin) 옆 커먼웰스(Commonwealth) 공원 곳곳에 디자인 테마별로 100가지 이상의 튤립을 볼 수 있다. 평지에서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하기 그지 없는 꽃밭. 회전 관람차에 올라타야 꽃밭 디자인이 보인다. 캔버라는 큰 빌딩 숲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대관람차(Gaint Wheel)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규모가 작은 이 회전 기구 꼭대기에서도 플로리아드가 열리는 커먼웰스 공원뿐만 아니라 캔버라의 아름다운 전경까지 볼 수 있다. 이 맛에 관람차를 또 탔다. 1인당 8달러나 내고 탈 정도는 아니지만, 올해의 꽃밭 디자인을 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멋진 캔버라의 전경은 감상했다. 플로리아드의 꽃밭은 아직 정체성이 모호하다. 한 주 지나 모든 꽃이 만개하면 그 개성이 드러날 것이다.

한국 관광객이라면 플로리아드를 보고 분명 실망하고 돌아갈 것이 뻔하다. 우리도 그랬다. 2년 전 쉐어하우스 주인인 린다(Linda)의 댄스 공연 무대가 있어 플로리아드를 여러 번 방문하지 않았으면, 한국보다 덜 세련되고, 덜 화려한, 이 축제에 대해 지금처럼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플로리아드는 꽃이 있는 축제의 현장이다. 공연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먹을거리, 쇼핑거리가 있다. 잔디밭에 앉든, 눕든 편한 대로 하면 된다. 공연을 보고 싶으면 곳곳에 있는 작은 무대 앞이나 옆에 그냥 멈춰 서면 된다. 꽃을 구경하고 싶으면 꽃밭에 가고, 걷고 싶으면 꽃길과 그 길을 따라 이어진 작은 숲들을 거닐면 된다. 구경하기 위해 줄을 서는 곳도 아니고, 인위적인 통제 속에서 상업적인 색깔로만 가득찬 그런 축제 현장도 아니다. 누구든 녹색 도시 캔버라에서 하루쯤 빨주노초파남보 꽃밭에서 놀아보고 싶을 때, 찾아가면 되는 곳이다. 봄은 짧아도 플로리아드 축제 현장은 봄의 여운을 강렬한 색채로 남긴다. 화려하기만 하면 멋스럽지 않다. 그 화려함에 쉬 질리고, 지친다. 초록이 둘러산 그 곳에 색이 있어 오감이 즐거우면서 휴식이 있다.

그런데 소스라치게 놀랐던 순간이 있었다. 한참 공원의 숲길을 따라 걷다 높은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었다. 우리도 따라 멈춰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올려다봤다. 높은 나무 가지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들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박쥐다. 호주 박쥐인 Grey-headed flying foxes. 동굴에 살지 않는 박쥐를 실제로 처음 보는 엄청난 순간이었지만, 약간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올해도 여전히 같은 장소에 박쥐들이 매달려 있다. 2년 전과 달리 날개를 펼친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러기엔 날이 너무 밝고, 아직 때가 아니다.

플로리아드의 낮은 자연친화적이고, 밤은 인위적이다. 밤 축제(NightFest) 현장은 낮과 달리 화려한 조명쇼가 있다. 그래서 입장료가 유료다. 인위적인 빛을 좋아하지 않아 밤 축제 현장은 가보지 않았지만 별 아쉬움은 없다. 올해는 9월 28일부터 10월 2일까지 나이트페스트가 열린다.

캔버라의 봄 축제 ‘플로리아드’는 규모나 형식에 갇힌 행사에 가까운 축제가 아니라 즐겁다. 아이마냥 꽃밭을 놀이터 삼아 놀 수 있어 즐겁다. 그래서 남반구 최대 꽃 축제라는 수식어도 그럴싸하다. 신나게 꽃밭에서 놀다 보니 어느새, 여우비가 이제 떠날 때라고 재촉한다.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안내장에는 분명 일요일 4시 15분 레가타 포인트(Regatta point)에서 마지막 무료 셔틀버스가 있었는데, 4시부터 한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그렇지. 여긴 캔버라, 그리고 호주,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비를 맞으며 도심을 향해 걷다가 결국, 코라에게 전화를 했다. 기다리는 동안 무지개가 여우비 사이로 존재를 알린다.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현재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아이와 함께 머물면서, 두 번째로 로컬처럼 살아보는 중이다. I AM 수행과 명상하는 삶을 추구한다.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의 이야기와 그들의 세계관, 미술작품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이곳의 하늘과 구름, 별에 푹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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