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게 잠피르의 펜플룻 연주곡 ‘고독한 양치기’를 즐겨듣는 가을밤에는 적막함 너머로 한 남자의 아름답고 숭고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연상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귀찮고도 소중한 일을 말없이 결행한 그 거룩한 실천에 콧날이 시큰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탐욕스런 인간들로부터 버림받은 황폐화된 고지에서 개와 더불어 양떼를 몰고 다니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 땅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놓았던 조용한 그 남자의 일생은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된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시내의 한 대형서점 청소년 권장도서코너에서 처음 만났다. 중학교 1~2학년생쯤 되는 아이가 집중하는 예쁜 책에 이끌려 어깨너머로 함께 읽으며 시작된 인연이다. 한참 빠져들고 있을 때, “애야, 네가 지금 이런 수준 낮은 그림책이나 읽을 때냐?”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날카롭고 깐깐한 목소리로 다그치며 소년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내려놓았다. 알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서가로 아들을 끌고 가던 부인의 치맛바람과 끌려가던 아이의 풀이 죽은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 그대로 서서 끝까지 읽었다. 전작 ‘폴란드의 풍차’에서 느꼈던 마냥의 우울함을 극복하며 이 작가가 참으로 행복을 주는 사람이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6월의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러나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나무라고는 없는 땅 위로 견디기 어려울 만큼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뼈대만 남은 집들 속으로 불어닥치는 바람소리는 마치 짐승들이 먹는 것을 방해받았을 때 그러는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는 텐트를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부터 다섯 시간이나 더 걸어 보았어도 여전히 물을 찾을 수 없었고, 또 그럴 희망마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곳이 똑같이 메말라 있었고 거친 풀들만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작고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림자 같은 그 모습이 홀로 서 있는 나무의 둥치가 아닌가 착각했다. 그것을 향해 걸어가 보니 한 양치기가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양 30여 마리가 뜨거운 땅 위에 누워 쉬고 있었다. - 13쪽

평야지대에서 농장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남자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고로 잃었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사내에게 어떤 희망이 있었을까? 그는 억센 풀들만 존재하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해발 1300미터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물줄기 하나 보이지 않는 난감한 황무지에서 고독하게 늙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모두가 떠난 마을의 망가진 집을 손질하여 그럴싸한 돌집을 꾸미고 그곳에서 성실하고 경건하게 어쩌면 한가롭게 생활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여름, 도보 여행 중에 길을 잃은 한 청년이 흙바람을 뚫고 찾아와 그렇게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화자인 청년은 깊은 밤 한 자루의 도토리를 들고 와 말없이 골라내는 양치기의 행동에서 더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게 되며 독자들이 호흡을 멈추고 독서에 몰입하도록 안내한다. 이튿날 지팡이 대신 쇠막대기를 들고 산등성이를 오르는 수상한 양치기를 따라 올라 그가 일하는 것을 관찰한다. 쇠막대기로 땅을 파고 밤새 골라낸 좋은 도토리를 심는 무모하리만치 우직한 반복적인 그 행동에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나는 30년 후면 떡갈나무 1만 그루가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일 하느님이 30년 후까지 자신을 살아 있게 해 주신다면, 그동안에도 나무를 아주 많이 심을 것이기 때문에 이 1만 그루의 나무는 바다의 물 한 방울과 같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벌써부터 너도밤나무 재배법을 연구해 오고 있었으며, 그의 집 근처에서 어린 묘목을 기르고 있었다. - 33쪽

젊은이가 고독한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를 처음 만난 것은 1913년이고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으니 1895년생 작가 장 지오노가 열아홉이던 시절이라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하면 몰입감도 높아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기 3년 전인 1910년부터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 황무지에 쇠말뚝을 이용해 도토리 10만 개를 심었고, 그 중 2만 개에서 싹이 나왔는데, 들짐승이나 천재지변에 따라 그 가운데 절반가량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다. 젊은이는 노인이 오래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그렇게 심어진 1만 그루가 꽃 피울 미래의 기적만을 찬양하고 하룻밤의 인연을 마무리한 채 길을 떠난다.

그 모든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기 때문에 습관처럼 익숙해져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았다. 산토끼나 멧돼지들을 잡으려고 이 적막한 산속으로 올라온 사냥꾼들은 작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나, 그것을 그저 땅이 자연스럽게 부리는 변덕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아무도 부피에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가 한 일이라고 의심했다면 그의 일에 훼방을 놓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나 관리들이나 누군들 그처럼 고결하고 훌륭한 일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계속할 수 있다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 45쪽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젊은이는 입대했고 무려 5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전쟁터에서 청춘을 불태운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다시 찾은 프로방스의 황무지는 놀랍고도 푸르게 변해있었다. 교전에서 너무도 쉽게 목숨이 오가는 사람들을 보아온 탓에 양치기 노인도 이미 죽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숲길을 걷는다. 기대 없이 다시 방문한 추억의 땅에서 생색내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노인과의 재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오직 한 사람의 영혼과 손발로 창조한 아름다운 숲을 바라보며 깊은 감동에 빠져든다. 그가 맨손으로 일궈낸 8년 만의 기적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과거의 편견과 판단들을 성찰한다. 새롭게 이주해 와 정착한 마을의 사람들은 자연이 절로 만들어낸 삶의 터전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저마다의 행복을 누리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산림감시원이 찾아와 그 위대한 노인에게 천연 숲 보호를 위해 집밖에 난로를 피우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말하는 습관마저 잃어버린 고독한 양치기는 더욱 헌신적으로 늙어갔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숲은 1939년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 때에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그 당시에는 많은 자동차들이 목탄가스로 움직였기 때문에 나무가 항상 모자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제아르 부피에가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들을 베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숲은 도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경제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숲을 포기했다. 그러나 부피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곳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평화롭게 자기 일만을 묵묵히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1914년의 전쟁에 마음을 쓰지 않았던 것처럼 1939년의 전쟁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자기 일을 계속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 것은 1945년 6월이었다. 그때 그는 여든일곱 살이었다. - 58쪽

하나의 작품 혹은 한 사람의 인격체가 건강하게 완성되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독립과 혁명을 꿈꾸던 카르보나리 당원으로 활동하다 당국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프랑스로 망명한 사람들 중에 에밀 졸라의 아버지 프랑수아 졸라와 장 바티스트 지오노가 있었다. 망명자의 아들 장 앙투안느 지오노는 구두 수선공으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세기 말에 태어난 그의 아들만큼은 잘 교육시키려고 노력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린 아들에게 프로방스 고지대를 도보나 승합 마차로 여행하며 체력을 키우도록 강권했던 아버지이기도 했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이 상상되는 땅 프로방스에서 그렇게 장 지오노는 나고 자랐고,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던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처음 원고를 쓰기 시작한 후로 무려 20년 간 다듬고 다듬은 감동의 우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얇고 작은 책이지만 마치 도토리 하나가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듯이...

이 고장 전체가 건강과 번영으로 다시 빛나기까지는 그로부터 8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13년에 보았던 폐허의 땅 위에는 잘 단장된 아담하고 깨끗한 농가들이 들어서 있어서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비와 눈이 숲 속으로 스며들어 옛날에 말라 버렸던 샘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샘물로 물길을 만들었다. 단풍나무 숲 속에 있는 농장들은 모두 샘을 갖고 있었는데, 맑은 샘물이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싱싱한 박하 풀잎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을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땅값이 비싼 평야지대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젊음과 활력과 모험 정신을 가져다주었다. 건강한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밝은 웃음을 터뜨리며 시골 축제를 즐길 줄 아는 소년 소녀들을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즐겁게 살아가게 된 뒤로 몰라보게 달라진 옛 주민들과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합쳐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엘제아르 부피에 덕분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 69쪽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마이클 매커디의 판화 작품이다. 특히, 밤새 골라놓은 튼실한 도토리를 메마른 땅에 심는 장면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마음속 명화로 남았다. 본문이 워낙 함축적이고 짧은 글이라. 편집자의 작품평과 옮긴이의 작가 평, 연보 등이 과반을 채워줬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270g 무게의 시집처럼 예쁘고 읽기 편한 책이다. 1953년 미국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처음 발표된 이후, 미국 삼림협회의 교육 자료로 쓰였고,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뮤지컬로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1987년에는 캐나다 국영방송 CBC가 30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는데, 원작의 감동을 색다르게 재현하여 이듬해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앙시 페스티벌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부비에 사후 30년, 지오노 사후 17년에 제작된 이 위대한 애니메이션은 지금까지 30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여전히 호평 받는 수작이다. 프레데릭 바크 감독은 “자신이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나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며 자신이 만든 애니메이션에 흡족해하였다. 유튜브만 접속된다면 언제 어디서나 간단히 검색해서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허신의 명작이다.

서른다섯에 다니던 은행을 그만 두고 전업 작가가 된 장 지오노는 고향 땅에서 자연을 사랑하며 일관된 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나무 한 그루, 잎새 한 잎, 풀잎 하나, 봄바람, 질주하는 말, 눈부신 하늘같은 자연 혹은 생명을 찬양하며 그것이 진정한 부임을 역설하며 살았다. 이 소설 또한 저작권료는 한 푼도 받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되기를 희망했다. 그의 작품 세계와 지향점에 감동한 젊은이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은 일도 많았다. 부비에는 1947년 89세 나이로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고, 그를 창조한 장 지오노는 1970년 시월의 가을밤에 향년 76세로 역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전한다. 프랑스 남부 오트프로방스의 소도시 마노스크 입구 팻말에는 “이곳은 프로방스의 위대한 작가 장 지오노가 태어나고 살고 잠든 곳이니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재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우리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 정치인이나 전문경영인은 자신의 임기 동안 무엇인가 눈에 띄는 실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다. 신자유주의가 고착화된 사회에서는 일반 공무원도 기업의 기획자도, 개발자도, 영업사원도, 언론인도, 스포츠맨도, 예술가도, 교수도, 학생도 모두 다 계량화된 실적에 맞춰 움직이느라 정말 중요한 그 무엇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부피에의 헌신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성과에 목말라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현대인들의 일상과 노력들은 모래성이 아닐까? 수준 낮은 책을 읽는다며 꾸지람을 듣고 엄마 손에 끌려가던 오래 전 그 서점 소년의 가슴 속에는 얼마나 큰 나무가 자라고 있을까?

지난 해 봄, 의미 없는 식목일을 보낸 직후에 오드리 헵번과 그 가족이 진도 땅에 일군 ‘세월호 기억의 숲’에 참여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인간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존재라며 나무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던 선생님 선영에 작은 도토리 몇 개를 심어 놓고 하산하던 날의 기억도 이 책이 선사한 기쁨이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대산의 명언과 더불어 ‘나무 한 그루 베어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는 한 출판사의 정신이 떠올랐다. 좋은 책은 나무를 심게 하고, 그 나무로 책을 만들고, 그 책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만든다는 선순환의 상상으로 기뻤다. 책을 읽는 기쁨이 나무를 심는 기쁨처럼 아름다운 계절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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