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가 온다. 간밤의 요란했던 장대비는 그쳤고, 지금은 보슬비만 내린다. 공기오염이 심한 서울의 보슬비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캔버라의 보슬비에 이제 나는 젖을 줄도 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거리는 더 조용하다. 간간히 스치고 지나가는 자동차만이 이곳이 사람 사는 곳임을 일깨운다. 집들은 많은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유일한 길친구는 지렁이와 달팽이, 그리고 내 아이. 학교 가는 길에, 인도 한복판에서 사투를 벌이는 달팽이와 지렁이를 고이 잔디밭에 옮겨놓는 일은 비오는 날의 일상이다. 이렇게 인적 드문 길 위에서 나는 홀로 있어도 자연과 벗하면 살아가는 방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린다네 집은 참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향, 삼거리에 있어 집 발코니에 서서 밖을 바라보면 생각이 사라지면서 이내 평안해진다. 불편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잠시 이곳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 낙이 되었다. 생활을 공유한다는 것은 감수할 것이 많음을 의미한다. 한 지붕 아래 한 가족도 습관이나 버릇 때문에 다툴 일이 있다. 전혀 낯선 환경, 낯선 이들과의 한 지붕살이는 곳곳에 잠재적 충돌이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동경하던 외국 생활에 대한 낭만은 일단 접어두는 것이 마음 편하다.

우리의 방은 이미 청소가 되어 있었지만, 퀘퀘한 냄새가 났다. 겉으로는 깔끔해 보이는데, 묵은 카펫과 오래돼 한가운데가 푹 꺼진 침대, 작고 허름한 책상과 등받이가 고장난 의자까지 주당 160달러인 이유를 알 것 같은 모습이었다. 쉐어하우스를 구할 때, 린다네를 제외하고 모두 방 하나에 2인에 해당하는 렌트비를 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린다는 아이 몫의 10달러만 얹어 주당 160달러에 방을 내줬다. 어떤 곳은 월 20불 내외의 와이파이 공유비도 내야 하지만, 린다네는 무료. 물론 전기료와 수도료는 별도라 두 사람 몫을 내야한다.

방 4개, 욕실 2개 구조의 전형적인 호주 주택인 린다네 집. 마스터룸을 제외한 방 3개를 전부 쉐어하는 셈이다. 그 당시, 사립고등학교 교사인 스티브와 인도인 부부가 머물고 있었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드디어 짐을 풀었다. 예전 뉴질랜드에서의 호된 경험이 있어서 침낭 2개를 준비해갔는데, 이 침낭으로 인해 캔버라의 한 겨울 새벽도 견뎌낼 수 있었다. 린다가 준 이불과 베개마저 냄새가 나긴 마찬가지라 침대 위에 침낭을 깔고 생활했다. 베개는 이튿날 곧 샀지만,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큰 짐을 늘릴 이유가 없어 이불은 사지 않았다. 버리거나 개라지 세일을 할 수도 있지만, 단기 동안 경험할 일이 수두룩한데, 이런 일상의 사소한 문제에는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공동 생활에 대한 설명은 굵고 짧았다. 내 구역의 냉장고와 수납장 위치, 세탁실 사용법을 아는 것으로 끝이 났다. 높은 전기료와 수도료 탓에 기본 세탁을 제외한 모든 기능에는 매직펜으로 쓴 X 마크가 선명하게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린다의 마지막 말이 내 뒤통수를 쳤다. 다른 사람이 쓴 헹금물을 재사용해 세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주장 대로라면 헹금물이기 때문에 세탁물보다 깨끗하고, 약간의 세제기가 남아있으니 세제 사용량도 줄어든다는 거다. 그러면서 세탁기 주변에 받아놓은 헹금 물통을 여럿 보여 주었다. 깨끗하다고 보여준 헹금물에는 먼지와 옷찌꺼기 등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앞으로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낭비나 사치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으나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는 물낭비하는 여자가 된다. 코라를 만나고 나서 나중에서야 그녀의 이런 물 재활용이 지나치다는 것을 알았다. 10년 동안의 긴 가뭄을 겪은 캔버라인들의 물 절약은 당연히 몸에 밴 습관이지만, 세탁 헹금물의 경우, 보통 화장실용이나 정원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나의 멍한 표정을 본 것인지, 스티브가 쪽지를 내민다. 자기 이름을 한글로 써서 보여주는 것이다. 의아하게 쳐다보니, 수원에서 3개월 정도 영어 교사를 한 적이 있다는 설명이다. 내심 불안하던 차에 한 줄기 희망이 비췄다. 더욱이 그는 1년 이상 린다네에 살고 있었기에 이곳만의 생활팁을 얻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물을 시작으로 린다의 자린고비 생활은 그 곳에 사는 내내 우리를 긴장시켰다. 세탁물과 관련해서는 스티브의 조언대로 린다가 없는 틈을 타서 새 물을 받아 해결했다. 한국식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손이 많이 가는데, 역시 린다가 외출하면 미리 씻고, 다듬어 저녁에는 요리하고 설거지만 하면 되는 걸로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연결된 구조라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린다의 한숨 소리와 함께 눈치를 봐야 한다. 특히 린다는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 아침은 오트밀과 우유, 그리고 식사는 밖에서 해결하거나 굶거나 둘 중에 하나다. 이 모든 것이 수도와 전기, 그리고 돈 절약으로 연결돼 있다. 요리를 하지 않으니 친구들 중에서 그녀에게 정기적으로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들을 갖다 주기도 한다. 그녀의 짠돌이 생활을 얘기하자면, 사실 밤을 새도 부족하다.

어느 날 린다가 전 플랫메이트(flatmate)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주말이면 밖을 나가지 않는 쇼핑몰 경비원 때문에 하루 종일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부터 이사 나간 인도인 부부가 늘 집에서 밥을 해먹어 온 집안에 향신료 냄새가 가실 날이 없다는 소리까지, 사실 이외에도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린다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플랫메이트들은 2,3개월이면 떠난단다. 그녀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입장을 잘 안다. 마치 감시카메라처럼 지켜보는 린다의 행동은 쉐어하우스를 운영하는 주인으로서는 낙제점이다. 지켜야 할 룰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치면 누구라도 그 곳에서 버텨낼 수가 없다. 그런데 스티브는 어떻게 1년 이상 린다네 집에서 살고 있을까? 가만보니 살펴보니, 스티브는 린다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리 개의치 않는 입장이었다. 어느날, 스티브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갑자기 방으로 가서 엉망이된 점퍼를 가지고 나왔다. 비싸게 주고 산 점퍼가 헹금물 재활용으로 이렇게 됐다며, 그간 그 역시도 답답한 일들이 많았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티브는 같은 호주인이고, 장기 거주자라 린다는 그에 대해 많은 신뢰를 갖고 있었고 그가 무엇을 하든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살다 보면 각자만의 해결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도 3개월 후 다시 3개월을 린다네에서 사는 동안, 요령이 생겨서 그 곳에서 어느 정도 잘 버틸 수 있었다. 그랬더니 린다가 어느 날 너 같은 플랫메이트는 처음 본다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부엌이나 거실 등 공동 생활 공간을 늘 깨끗하게 청소해두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3개월을 살면서 인심을 얻은 후, 정직하게 세탁 헹금물에 관한 입장과 이유를 밝혀 더 이상 눈치보지 않고 세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 안부 정도는 묻는다. 린다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녀는 결코 가난하지는 않다. 포크 댄스가 취미라 클럽을 통해 댄스를 배우고, 공연에도 참여하기도 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오렌지 클래식 자동차로 기분을 내고, 1년에 한번씩은 외국여행이나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

지금은 코라 옆에 있으니 코라 차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캔버라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기회가 많지만, 그때 우리의 행동 반경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래도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관광지나 명소를 최대한 많이 다녔다. 주중에는 아이가 학교를 간 사이, 도서관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영어 교실에 참여해 친분을 쌓고, 영어 공부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 린다네도 그렇고, 지금 코라네도 그렇고, 어디든 남의 집 살이는 어려운 점이 많다. 결국은 어디든 내가 어떻게 내 삶을 리드해서 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전투적으로 배웠던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 두 번째 캔버라 생활도 가능하다.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현재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아이와 함께 머물면서, 두 번째로 로컬처럼 살아보는 중이다. I AM 수행과 명상하는 삶을 추구한다.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의 이야기와 그들의 세계관, 미술작품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이곳의 하늘과 구름, 별에 푹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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