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청년이 ‘Blowing in the Wind’의 강렬한 메시지로 세상에 존재감을 알린지도 어언 53년이 흘렀다.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스웨덴 왕립아카데미 사무총장 사라 다니우스는 “2500년 전에 호머와 사포가 있었다. 그들은 연주와 무대를 위한 시를 썼다. 밥 딜런도 그와 다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딜런을 공식적인 노벨문학상 후보로 최초 추천한 워싱턴앤리 대학의 영문학자 고든 볼 교수는 그의 작품이 전 세계와 역사에 영향을 준 방식 때문이었다며 이후 10여 차례 노벨 왕립 아카데미 협회에 업데이트된 자료를 통해 지속적으로 추천했다. 100년의 삶을 문학에 바친 미국의 위대한 계관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도 딜런의 작품이 다음 세대를 위한 시금석이 되리라는 찬사와 더불어 지나간 시대로부터 뭔가 형이상학적인 것을 물려받은 아주 중요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일리아드를 쓴 호머가 맹인 발라드 가수였으며 그의 이름은 ‘인질’을 의미한다고 강조한 그는 자신의 문학작품이 빛나는 희곡이 될 수 있도록 딜런에게 작곡을 요청하기도 했다. 혹자는 오래된 농담이 현실이 되었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정작 자신은 수상여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어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여러 가지 해석과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공연장에서 ‘Why Try to Change Me Now(이제 와서 왜 나를 바꾸려고 해)’를 불렀다는 것이 수상거부의 이유로 거론되는데, 진실은 무엇일까?

"노래에 나오는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적다해도 사람들은 노래로 이야기한다. 때로는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진실과 상관이 없는 일들을 말할 때도 있고, 모두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할 때도 있다. 동시에 세상에서 유일한 진실은 진실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235쪽

회고록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참으로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3년 동안 수동식 타자기 앞에 앉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동안 ‘기억의 창고’가 열리면서 과거에 만난 사람들의 생김새나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등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라 밥 딜런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뮤지션이기에 앞서 그가 얼마나 솜씨 좋은 문장가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의 직업이나 단어로 규정할 수도 없는 복합적 예술가의 삶에 빨려들게 된다. 침묵의 은둔자, 반전·인권운동가, 시인, 화가, 배우, 포크가수, 작곡가라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찬양과 질투와 비난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시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칭송과 그에 어울리는 명예를 베풀 때에도 그는 세상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으려 잠들지 않는 강물처럼 애써 외면하며 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용기와 결단을 보여 왔다. 이번 노벨상 수상 소식에 문학이 죽었노라 한 숨 쉬는 이들이 생각하는 문학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If I wasn't Bob Dylan, I'd probably think that Bob Dylan has a lot of answers myself.”

“만약 내가 밥 딜런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밥 딜런 같은 사람이 나한테 해답을 줄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는 스스로의 명언이다. 아는 만큼만 볼 수 있고 아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그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는 너무도 단순하다. 전형적인 문인이 아닌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50년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1953년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 1964년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바로 그들이다. 특히 장 폴 사르트르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1958년에 조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민하여 고사했던 뒤를 이어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기까지 하였으니 수상자 발표 이후 침묵으로 일관하는 밥 딜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처음 겪는 일은 아닌 듯싶다.

“집을 떠나자마자 로버트 앨런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님이 이름을 붙여준 사람이었다. 로버트 앨런은 스코틀랜드 왕의 이름처럼 들렸고,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는 나의 정체성이 없었다. 나중에 나는 ‘다운비트’라는 잡지에서 데이비드 앨런이란 이름의 색소폰 주자에 관한 기사를 보고 약간 당황했다. 나는 그 음악가가 앨런의 철자를 Allen에서 Allyn으로 고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Allyn이 더 이색적이고 더 신비스럽게 보였다. 나 역시 그렇게 하려고 Allen 대신 Allyn으로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우연히 딜런 토마스의 시를 보았다. 딜런과 앨런은 비슷하게 들렸다. 로버트 딜런. 로버트 앨런.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D가 더 강하게 다가왔지만 로버트 딜런은 로버트 앨런만큼 멋있게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항상 나를 로버트나 보비라고 불렀지만 보비 딜런은 너무 겁이 많은 것처럼 들렸고, 게다가 벌써 보비 다린, 보비 비, 보비 리델, 보비 닐리 등 보비라는 이름이 너무 많았다. 밥 딜런이라면 밥 앨런보다 낫게 보이고 좋게 들리는 것 같았다. 트윈 시티에서 처음 이름을 물어왔을 때, 거의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밥 딜런’이라고 간단히 말했다.” - 90쪽

제임스 딘을 동경했던 미네소타의 시골뜨기 ‘로버트 앨런 지머맨’은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을 향한다. 뉴욕을 동경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디 거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청년은 뉴저지 주립병원에서 죽어가던 늙고 병든 우상 앞에서 위로의 기타 연주하는 것으로 비범한 뉴욕 생활의 막을 올렸다. 화물열차를 타고 왔다는 악의 없고 심드렁한 거짓말로 건방을 떨며 뉴욕의 리드음악사와 출판 계약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회고록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회상하는 비순차적인 기록물로 만나는 사람마다의 성격과 특징들이 섬세하고 흥미롭게 묘사된다. 맥두걸 거리의 ‘카페 와?’로부터 클럽빌리지 ‘개스라이트’로 옮겨 활동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신세를 지는 기록들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레이와 클로에의 집이다. 그곳을 특히 좋아했던 그는 서가에서 활판 인쇄술, 금속학, 철학,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관한 온갖 글들을 섭렵한다. 고골리와 발자크, 모파상, 위고, 디킨스의 소설들은 물론 마키아벨리, 단테, 루소, 오비드, 롱펠로우, 포우,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시와 고전 문학에 심취하며 보낸다. 고향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세계의 수도 뉴욕’에 있다고 대답했고, 아버지는 그 대답에 ‘재미있는 농담’이라 웃었지만 그는 진지했다. 1960년대 뉴욕은 사물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 자석이었다. 자석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날 수도 있는 그곳에서 단련된 정신세계와 통찰력은 새로운 포크음악의 절대적 필요성을 고민하고 실천하며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씩 나아가다 시대정신의 구심점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나는 안티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있었고, 대중을 선동하려는 야망도 없었다. 주류 문화를 대단히 시시하고 큰 속임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창밖에 펼쳐진 얼음 바다 위를 어색한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역사시대에 속하는지 몰랐고 시대의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실을 말한다면 아주 잘하는 일이고 좋은 일이다. 포크송은 그것을 내게 가르쳤다. 어느 시대든 항상 새벽이 시작되었고 나는, 나는 몇 국가의 국민과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역사가 언제나 같은 패턴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고대의 어떤 시기에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번영했다. 그리고 모범적으로 성숙한 지점에 도달한 후,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시대가 뒤를 이었고 퇴폐가 모든 것을 붕괴시켰다. 나는 미국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몰랐다.” - 44쪽

회고록에는 뉴욕에서 만난 풋풋한 소녀 수즈 로토로와 뜨거운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의 어머니 메리의 반대로 실연당한 아픔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첫 앨범과 달리 세상이 주목한 두 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의 자켓 표지는 눈 내린 그리니치빌리지에서 팔짱을 낀 수즈와 함께 다정하게 걷고 있는 모습으로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 딜런 토머스 등의 영향을 받은 시적인 가사는 기존 대중음악의 가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바람만이 아는 대답 (Blowing in the Wind)’은 반전 평화의 노래이기에 앞 서 참으로 아름다운 한 편의 시로 평가 받으며 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 킹스턴 트리오 등 여러 사람이 불렀고, 피터, 폴 앤 메리에 의해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 음반 발표 다음 해에 미국에 입성한 영국의 존 레논은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나서 비틀즈의 가사가 얼마나 빈약하고 형편없는 수준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반면 비틀즈를 통해 앞으로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인식한 밥 딜런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사회적 저항 운동의 상징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과감하게 일렉트릭 사운드를 도입한 공연을 시도하지만 언론의 냉대와 팬들의 야유를 받는다. 굴하지 않고 도전은 계속되었다. 더욱 강력해진 사운드와 거친 노랫말로 저항과 주장에서 벗어나 풍자와 냉소 그리고 자기 연민이 담긴 새로운 포크 록을 창조했다.

“내 노래가 단지 가사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위대한 로큰롤 기타리스트 듀앤 에디가 내 곡을 기악곡으로 녹음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음악인들은 내 곡이 가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가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마음을 돌려서 외부 세력에 대한 비난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나 자신을 닦으며 짐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반체제 문화가 무엇인지 충분히 보았다. 내 가사가 멋대로 추정되고, 그 의미가 논쟁에 휘말려 타락하고, 내가 반군의 대형, 저항운동의 대사제, 비국교도의 총책, 불순종의 대가, 식객의 리더, 배교의 황제, 무정부 상태의 대주교, 얼빠진 사나이로 공식 선정된 것에 진저리가 났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 132쪽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며 그의 헤어진 연인 존 바에즈의 일관성 있는 저항 정신을 예찬하며 밥 딜런의 변절을 비난한다. 이에 대해 침묵했던 밥 딜런은 사람들이 끔찍한 호칭들을 붙이고, 그 프레임 안에 자신을 가두려 했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저항을 한다. 진정한 저항이란 중심 권력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 저항 세력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도 해당되지 않을까? 일생을 놓고 볼 때 밥 딜런의 사생활에 불미스러운 점도 있었고 바람둥이였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자서전에서 그것들을 다 까발려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 또한 지나치다. 그는 두루뭉술하게 자신의 과오들을 언급하고 세상일에 앞서 가족을 더 챙기고 싶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고백한다. 특히,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친 후의 감정과 의문의 모터사이클 사고 부상에서 회복된 뒤에는 과도한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특히 아이들을 가진 것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했다. 케네디 형제, 말콤X, 킹목사 등이 총격으로 쓰러지는 끔찍한 사건도, 지도자가 쓰러진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받은 가족을 남겨둔 아버지가 쓰러진 것으로 보였다고 고백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유명인이 보호받지 못하는 사생활과 감당해야할 의무는 쉽지 않은 부담이 아니겠는가?

“포크뮤직 무대는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나야했던 것처럼 내가 떠나야 하는 파라다이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떠나는 것이 최상이었다. 몇 년이 지나자 폭풍우가 몰아쳤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여권운동과 징집영장 흑인 민권운동 같은 문제들이 폭발했고 사람들은 이 문제들을 헤쳐 나가기를 꿈꾸었다. 국민적인 정신이 변했고 여러 면에서 조지 로메로 감독의 공포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닮아 있었다. 길 바깥은 위험했고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몰랐지만 나는 아무튼 그 길을 따라갔다. 앞에는 번개를 가진 검은 구름이 잔뜩 낀 이상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나 나는 곧장 그리로 갔고 그 안은 활짝 열려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세계는 신이 주관하지도 않았지만 악마가 주관하는 것도 아니었다. (311)

최근 20년 동안 가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외부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하며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가끔씩 옛 동료들과 함께 투어를 다니며 존재감을 보여주던 그였다. 누적 앨범 판매량은 1억3천만장이 넘었고, 11개의 그래미상, 커티스 핸슨 감독의 ‘원더 보이즈’에 삽입된 ‘Things Have Changed’로 아카데미·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2008년에는 퓰리처상까지 수상했다. 2012년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다. 영화와도 인연이 깊었던 밥 딜런은 사운드 트랙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주연은 물론이고 몇 차례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를 이해하기에 가장 적절한 영화는 토드 헤인즈 감독의 ‘I'm Not There’가 아닐까 싶다. 나이, 인종, 성별이 제각각인 여섯 명의 배우가 밥 딜런의 천재성이나 음악성, 관계성, 무법성, 은둔성 등을 조화롭게 표현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독서량이 갈수록 줄어드는 나라에서, 서점들이 날마다 폐업하는 나라에서, 출판 노동자의 인권이 바닥인 나라에서, 시적인 풍자도 국가 보안법이나 위정자의 명예훼손으로 처벌받는 나라에서,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거대한 도서관을 짓고서 정작 그 안을 채울 책들은 영세한 출판사의 기증으로 해결하려는 나라에서 해마다 노벨문학상을 기대하고 결과에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별다른 노력 없이 그저 감나무 아래에 누워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부끄러운 현실의 반성 없이 그저 대중가수에게 노벨문학상마저 빼앗겼노라 함께 한탄하며 문학이 죽었노라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처사일까?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진정한 애정도 없이 일등지상주의로 치닫는 이 황당한 현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세울만한 애송시 하나 없던 만년 노벨상 문학상 후보 고은 시인은 김민기의 ‘가을 편지’를 통해 대중에 알려졌다. 알리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나훈아의 ‘부모’는 김소월의 시로 만들었고, 미당 서정주의 시는 송창식의 ‘푸르른 날’, 가수 이동원은 정지용의 ‘향수’와 정호승의 ‘이별노래’를 대중화시켰으며, 양희은은 열여덟 살 무명시인 정덕수가 쓴 ‘한계령’을 국민 애창곡으로 만들었다.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인용하자면 과연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노벨상의 진리마저 시인의 그림자를 버린 것일까? 문학은 도대체 언제까지 철옹성을 쌓아갈 것인가?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they call him a man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before it is washed to the sea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산이 씻겨서 바다로 내려갈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파주출판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개인이 사재를 털어 운영하는 ‘세계문학박물관’이란 곳이 있다. 이전을 준비하느라 잠시 휴관중지만 그곳에 가면 경매로 낙찰 받은 백석의 시 초판본은 물론 다양한 세계 문학사적 자료와 함께 1901년 첫 번째 노벨문학상부터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모든 수상작들의 초판본이 빠짐없이 진열되어 있다. 올해 수상작의 초판본은 아마도 12년 전에 미국에서 출간되어 극찬을 받은 바로 이 회고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원 제목은 ‘Chronicles: Volume One’이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것은 그의 대표곡이 주는 아름다운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여행을 할수록 못 가본 곳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책도 읽을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면 살수록 세상을 향한 질문들이 늘어 가는데, 그 대답들은 결국 바람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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