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답답한 미국 대통령 선거가 드디어 끝나간다. 선거를 치르다보면 항상 여러 말들이 오고가지만 이번 선거에서 여러 사회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이제 막바지를 달리고 있는 선거를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모든 나라마다 '태생적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역사적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살펴보면 태생적 문제가 잘 드러나는 나라가 있는 반면에 잘 드러나지 않은 나라도 있다. 나라마다 원인은 다르지만, 대체로 자유 민주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들에서 태생적 문제가 잘 드러나 보인다. 그런 이유로 미국은 자유 민주 국가에 속하기 때문에 태생적 문제가 잘 드러나 보인다.

미국의 태생적 문제는 ‘폭력’이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은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을 미국으로 강제로 끌고 와 노예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식민지로 지배를 받으면서 '본국'이었던 영국과 갈등이 생기자 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모든 나라에서도 발생되었던 ‘폭력’이라 미국만의 특이한 문제는 아니다.

흑인 노예자 노는 모습이 담긴 미국 민화 (1790년)
흑인 노예자 노는 모습이 담긴 미국 민화 (1790년)

‘폭력’을 가해 얻은 커다란 땅을 '개축'하고 독립한 미국은 240년간 태생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크게 해결되지 않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 속도와 내용은 대선과 같은 중요한 시기에 주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2015년에 여러 도시에서 발생됐던 경찰과 흑인 커뮤니티의 갈등이 이번 대선에서도 크게 부각된 이슈였다. 거의 모든 흑인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구조적 인종 차별'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구조적 인종 차별은 미국의 태생적 폭력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러한 폭력에 맞선다면 태생적 폭력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일으키고 있다. 반면에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오히려 범죄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흑인이 많이 사는 슬럼가의 경제 회복을 우선시 하고 있다. 이는 구조적 인종 차별의 존재를 부인하고 미국의 태생적 폭력 그 자체를 부인한 채 단편적인 경제적 현상으로만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2015년에 확산되기 시작한 '흑인 생명이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웹사이트
2015년에 확산되기 시작한 '흑인 생명이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웹사이트

이처럼 미국에서 정치적 쟁점은 미국의 태생적 폭력이 현재 인종 차별을 비롯해서 다른 사회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쟁점이 이번 선거에 특히 잘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생적 폭력이 '있다/없다'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 있음’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노력이 지속 될 때 ‘태생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사적 과제'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미국의 문제가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과 미국은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태생적 문제가 다르다. 수 천 년 동안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비슷한 언어와 역사를 가진 하나의 민족으로 왕국을 만들고, 때로는 남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지금은 남과 북이 정치적으로 분단이 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부인할 수 없다. 현재 한반도는 남북한으로 분단되어 있지만, 남북한은 한민족의 언어, 역사, 그리고 가치관을 반영하면서 20세기에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가치관도 각각 반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새로운 민주주의 가치관으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역사의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오랜 한국 역사에서 내려온 위정자들의 독재 성향이며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태생적 문제에 내재되어 있다.

한국 역사를 보면 참다운 민주주의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한반도에서 고대 국가가 형성될 때부터 20세기까지는 왕국이었다. 그 왕국의 내용은 시대마다 달랐지만, 왕이 오랫동안 통치해왔고 많은 재난과 외세 침략에도 불구하고 그 왕권은 오래 유지됐다.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소수의 지도자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고 유지됐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악습은 현재 북한에서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도 권력이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선거를 통해서 국민의 힘으로 지도자를 뽑게 된 것은 민주화의 성과이지만, 지도자가 권력의 중심을 자신을 뽑은 민중에 두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자기와 관련 있는 조직을 중심으로 정부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많은 지자체에서 발행하는 홍보지를 보면 민생에 대한 내용보다는 단체장의 사진과 행보 중심으로 편집되어 있다. 이는 지자체에 필요한 정치와 행정의 이슈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부각시키고 정당화 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는 정부 조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와 민간단체도 조직의 중심부에만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그를 위해 조직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회사 '오너'의 가족은 귀족처럼 살면서 회사의 일에 무리하게 관여한다. 재벌에서 작은 기업까지 그러한 성향이 짙다. 공익성을 내세우는 민간단체도 설립자 또는 그의 후선 중심으로 운영이 되고 있는 곳이 많다. 종교 단체도 지도부의 독재적 성향 때문에 몸살을 앓는 곳도 많다.

한국의 민주화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고 발전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대학생은 민주화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고, 그로 인해 독재 성향이 심했던 대학 재단이 민주화 되었고 교육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민주화 과정에서 새로 생긴 민간단체 중에 스스로 독재 성향을 억제하려고 하는 민간단체도 있다.

이러한 발전의 원동력은 ‘용기’이다. 즉, 독재 성향을 ‘고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최근 대학의 폐쇄된 운영에 대해서 학생들이 용기를 내서 고발하고 개선시키려고 하는 행동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증거이다.

그리고 또 다른 용기가 더 절실하다. 그것은 ‘스스로 행동을 바꾸는’ 용기이다. 사람은 변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지만, ‘변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결과보다 과제이다. 때문에 스스로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여러 갈등을 다수의 결정으로 해결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즉, 민주적 가치관이 개인 차원에서 실천돼야 미시적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미시적 민주주의가 튼튼하면 독재 성향이 있는 지도자를 뽑을 가능성이 적어지고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로 바꾸려는 ‘용기’가 더 쉽게 생긴다.

독재 성향을 극복하는, 그래서 중요한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민주적 절차에 대한 공론이 자주 필요하고 개인이 각각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실천하려는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자유선거,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단어만으로도 꿈이자 이상향의 노래였다. 그러나 결국 그 이상향은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한 사람 한사람의 노력들이 결집되어 현실화되었다. 불의에 절망이나 포기없이 용기 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불굴의 노력. 그러한 작은 걸음들이 앞으로 전진하며 지금의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의 미래를 건설하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해가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 robertjfouser@gmail.com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교육을 가르쳤고,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가르쳤다. 한국 사회를 고찰하면서 한국어로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을 출간했다. 취미는 한옥과 오래된 동네 답사, 사진촬영으로 2012년 종로구 체부동에 ‘어락당(語樂堂, 말을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짓기도 했으며, 2016년 교토에서 열린 ‘KG+’ 국제 사진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했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 학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어로 ‘외국어 문화사’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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