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의 린다네에서의 뚜벅이 생활에서 벗어난 지금, 코라네에서 매주 가장 기다려지는 날은 장날이다. 전통의 멋, 훈훈한 인간적인 감성이라고는 별로 없는 캔버라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코 장터다.

캔버라에서 쇼핑하거나 장보는 과정은 참 단순하다. 각 지역별로 중심지(Town Centre)가 있고, 그 안에 대형 쇼핑몰이 자리잡고 있다. 울월스(Woolworths), 콜스(Coles), 알디(Aldi) 등의 유명 수퍼마켓을 포함해 지역 규모에 따라 마야(Myer) 백화점, 타켓(Target), 빅더블유(BigW), 식당가, 카페, 생활잡화점, 의류 등 여러 업종이 이 중심지 안에 모여있다. 대형 수퍼마켓별로 할인 상품이나 취급 품목이 달라 비교하는 과정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복잡한 서울 시내에서의 쇼핑이나 장보기에 비하면 동선이 짧고, 다양성면에서 선택의 폭이 좁아 고민할 시간도 그만큼 줄어든다.

2014년 하반기를 캔버라에서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서울의 생활이 복잡해 적응하지 못했다. 겨우 6개월에 무슨 호들갑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장보기에 있어서는 이곳의 단순함이 좋았다. 사야 할 물건이 생기면, 사야 할 곳이 어딘지 분명히 알 수 있어서 쇼핑에서 오는 피로감 역시 이곳이 훨씬 덜하다. 1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사고 먹는 문제에 적응하느라 애먼 시간을 또 보내야 할 것이다.

가장 즐겁고 신나는 장터는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이다. 에픽(EPIC, Exhibition Park In Canberra) 부근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장터로 아침 7시 30분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수많은 발길이 이어진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추운 겨울이라도 파머스 마켓은 언제나 문전성시다. 장터에 오면 먹는 즐거움이 반인데, 이곳도 다르지 않다. 제일 긴 줄을 볼 수 있는 곳은 캔버라에서 꽤 유명한 와공가(Wagonga) 커피 부스. 유명세와 달리 커피 맛은 별로다. 기다리는 고객이 많다 보니 에스프레스를 뽑고, 스팀밀크나 폼밀크를 만드는 과정이 성의 없이 대충이다. 그보다는 마켓 입구 쪽에서 파는 5달러짜리 짜이 차(Chai Tea)가 더 맛있다.

각종 파이나 빵, 태국 음식, 소시지, 크레페 등을 만들어 파는 부스가 있어서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기도 좋다. 그러나 한국 음식 신봉자인 나는 코라와 달리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지 않는다. 사야할 것은 뻔하다. 사과, 사과 주스, 오렌지, 유기농 채소 그리고 버섯 정도. 수퍼마켓용 사과 주스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사과 주스를 판다. 2리터에 6달러. 이곳 만큼 맛있고, 싼 오렌지는 드물다. 5킬로그램에 5달러. 레이디 핑크(Lady pink)나 로얄 갈라(Royal gala) 말고 한국의 부사 느낌의 사과도 살 수 있다. 유기농 브로콜리는 수퍼마켓보다 싸다. 하지만 이외에는 대부분 수퍼마켓보다 비싸 가격 경쟁력이 없다. 대신 일반 수퍼마켓에서는 볼 수 없는 수제 상품들이 많다. 시장이라고 수퍼마켓보다 싼 가격을 기대하면 오산이다. 대신 근거리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 장터이므로 상품이 신선하다는 장점이 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각종 신선한 상품들 속을 걷다 보면, 그 역동적인 에너지에 취해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코라의 말대로, 나처럼 웃는 낯의 아시아인들이 이곳 시장에 많다. 코라는 아시아인들이 왜 시장을 좋아하는지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복해서 묻고, 나는 살아있는 기분이 들어서라고 반복해서 대답한다. 파머스 마켓에는 아시아인들도 많고, 의외로 2, 30대의 젊은 캔버런도 많다.

이곳 에픽의 파머스 마켓을 들릴 때마다 건가린에 있는 한인 마트에 들른다. 매주 토요일 12시 전후로 시드니에서 한국 식품들이 배달돼 오기 때문이다. 각종 떡, 김밥, 설렁탕, 비빔밥 나물, 한국식 채소와 과일, 심지어 어묵과 오징어까지 종류도 다양해 한국인을 위한 토요 장터라고 불러도 될 법하다. 매일 만들어 먹기도 하고, 혹은 한국 식당을 이용할 수 있지만, 시드니에서 오는 이 식품들이 좀더 한국적이고 남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더 좋다. 아이 도시락까지 하루 세 끼를 챙기다 보면 쉬고 싶고, 좀더 편하게 한 끼를 해치우고 싶을 때가 왕왕 있다. 그럴 때, 토요일 12시 경에 한인 마트에 가서 시드니에서 온 신선식품을 사서 먹는다.

파머스 마켓은 농수산물 직거래를 특징으로 하는 반면, 재미슨(Jamison) 일요일 마켓은 농산물도 있지만 중고용품 및 골동품, 잡화용품, 닭 등의 가축을 취급한다. 코라는 오래돼 수리가 필요한 물건의 부품을 구하러 이곳에 간다. 재미슨 마켓은 작은 벼룩 시장 같은 분위기라 두 번 가고 그만두었다.

킹스턴(Kingston) 마켓이라고 불리는 올드 버스 디팟(Old Bus Depot) 마켓은 다양한 핸드메이드 상품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매주 일요일이 장날이다. 바로 옆에 캔버라 글라스웍스(Canberra Glassworks)가 있어 관광명소로도 인기가 있다. 이곳 푸드 코트에 코라의 단골 에티오피아 전문 음식점이 있었다.요리 솜씨 좋은 아내 덕분에 대학교 화학과 교수였던 남편이 교수직을 그만 두고, 교수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아내의 일을 도왔다. 무뚝뚝한 그의 표정 뒤에 그런 전후 사정이 있었다. 그들은 이제 그곳에 없다. 높은 임대료 때문에 이곳을 떠나 다른 지역의 일요일 파머스 마켓으로 옮겨갔다. 우리의 잣대로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삶이다. 적어도 그들은 맛있는 한 끼 식사로 잠깐이지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며, 정직한 땀이 빚어낸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달걀을 사러 홀(Hall)에 간다. 홀은 농장과 과수원들로 둘러싸인 작고 유서 깊은 마을이다. 그곳에 자연 방사 유정란을 무인으로 운영하는 집이 있다. 파머스 브라운(Famer’s Brown)이라는 도장이 찍힌 달걀 12개가 6달러. 아이스박스 안에서 달걀을 꺼내고 돈을 두고 가면 된다. 이곳의 달걀은 정말 신선해서 오래 두고 먹어도 잘 변하지 않는다. 홀 역시 2주에 한번 꼴로 일요일에 마켓을 여는데, 이곳 마을만의 특색 있는 상품들이 많다. 특히 홀은 공원에서 열리는 장터로 소풍 겸 산책 겸 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터키식 빵이나 생선이 필요하면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열리는 피쉬윅(Fyshwick) 마켓에 간다. 식료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델리카트슨과 생선 전문점도 여러 곳이라 특별한 것을 찾을 때, 이곳에 가면 거의 다 있다.

캔버라 곳곳에서 열리는 주말 장터는 무료한 주말을 깨는 핫 플레이스다. 2주전에 사온 오렌지가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이번 토요일은 에픽의 파머스 마켓에서 하루를 시작할 참이다.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현재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아이와 함께 머물면서, 두 번째로 로컬처럼 살아보는 중이다. I AM 수행과 명상하는 삶을 추구한다.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의 이야기와 그들의 세계관, 미술작품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이곳의 하늘과 구름, 별에 푹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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