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분에게.
어렵게 백지 편지를 보내신 이유를 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건 어지간히 중대한 사안인 게 틀림없다, 어설피 섣부른 답장을 써서는 안 되겠다, 하고 생각한 참입니다.
늙어 망령이 난 머리를 채찍질해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이것은 지도(地圖)가 없다는 뜻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해 봤습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중에서

지도가 없다?!

책을 읽다가 ‘지도’라는 단어만 마주쳐도 멈칫하는 버릇이 생겼다. 평지를 걷다가 발에 채인 돌부리 같은 단어임에 틀림없다. 머리를 비워볼 요량으로 가벼운 판타지성 소설을 읽다가도 결국 덜컥 생각이 걸려 넘어진다. 세상에나, 지도가 없다니...

그러다가 지도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십여 년 이상 공간정보 분야에 종사하면서도 ‘지도’ 자체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은 것 같다. 업무 성격 상 무슨 일을 하든지 지도는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밑그림 같은 존재였으며, 지도와 관련되지 않은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뿐더러 중요도도 낮아서 쉽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공간정보 관련 칼럼인 ‘맵인사이트’를 쓰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지도’에 대한 개념 혼선에 빠졌다.

○ 지도의 정체에 대한 뜬금없는 고민

화면 1. ‘이것은 지도인가?’라고 물으면 혼이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화면 1. ‘이것은 지도인가?’라고 물으면 혼이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화면 1)을 보여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지도’라고 쉽게 대답한다. 별다른 이견이 없다. 도리어 물어보는 질문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아래 (화면 2)는 지도인가?

화면 2. ‘이것도 지도인가?’라고 물으면 대답이 나뉘기 시작한다.
화면 2. ‘이것도 지도인가?’라고 물으면 대답이 나뉘기 시작한다.

(화면 2) 역시 ‘지도’다.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 서비스(http://map.ngii.go.kr/)에서 제공하는 영상지도 화면을 캡처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지도가 맞다. 하지만 이렇게 내린 정의는 왠지 궁색하다. 지도 서비스에서 화면 캡쳐를 했으니 지도가 맞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이 지도 어떤가요?’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냥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같은데 이것을 지도라고 부르나요?’라고 반문할 것이다. 한 눈에 봐도 비행기 탑승 시 누구나 한두 번 정도는 찍어봤을 사진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구름 없이 맑은 대낮에 수직방향에서 해상도 좋은 카메라로 찍었다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업계에서 말하는 ‘정사영상’ 역시 결국에는 사진 데이터에 속하는 것이니 ‘잘 찍은 사진’이라는 반응은 틀린 정의는 아닐 테지만, 그들에게 이것을 지도의 일종이라고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단지 (화면 1)에는 (화면 2)와는 달리 도로와 지하철 노선이 그려져 있고 장소명칭이 표시되어 있다는 차이가 날 뿐 사실 다를 게 없는 사진이다. 그렇다면 도로가 그려져 있고 장소명칭이 표시되어 있으면 지도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없다면 그냥 사진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가?

화면 3. 약도는 지도의 일종이다
화면 3. 약도는 지도의 일종이다

(화면 3)은 이 칼럼을 기고하는 넥스트데일리 사무실의 위치를 소개하는 약도(略圖)다. 약도의 의미가 간략한 형태로 그린 지도이므로 이 역시 지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그림 역시 간단하나마 도로를 포함한 주요 길의 정보와 중요 장소명칭들을 포함하고 있다. 좌표정보도 없고 축척도 반영되어 있지 않고 숫제 작성자 시각과 의도에 맞추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왜곡된 공간정보를 담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지도의 일종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자료 삼아 해당 장소를 찾아가는 데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 2) 보다 더 지도 같기도 하다.

○ 지도에 대한 유치한 자문자답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그림을 지도라고 하며, 어떤 형태의 그림을 지도가 아니라고 인식할까 궁금해졌다. 아래와 같은 지극히 초보적인 궁금증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혼자 나름대로 정의하고, 또 혼자 나름대로 대답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 지도는 땅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야 한다? : 실존하고 있는 땅의 모습을 반영해야만 옳은 지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지정되어 있는 좌표에 맞추어, 일정하고 동일한 축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기준을 따르지 않은 지도는 지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화면 3) 같은 경우도 충분히 지도로 인지할 수 있다. 또한, 오히려 (화면 2)는 그 점에서는 싱크로율 99% 이상을 보장하고 있지만 지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모순이 있다.

● 지도는 땅의 모습 그대로 뿐만 아니라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 지도 영역에 해당하는 곳의 도로, 장소명칭, 기타 각종 속성정보를 제공해야 진정한 지도라고 정의하기에는 너무 야박하지 않을까 싶다. 그 기준이라면 (화면 3)이 (화면 2) 보다 더 지도답다고 해야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기에는 항공촬영을 위해 띄운 비행기와 연료 비용이 아깝다. 지도에서 속성정보가 필수 요소인지 선택 사항인지는 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 지도는 확대 축소 이동이 가능하고 사진은 그렇지 않다? : 이러한 것은 전자지도에 익숙해진 정의일 수 있으나, 전통적인 종이지도를 배려한다면 결코 ‘지도’를 아우르는 정의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지극히 지엽적이고 편협한 정의에 불과하다.

결국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하고 법령을 뒤지기 시작한다.

○ 공간정보 관련 법의 시각으로 본 지도

공간정보와 관련된 법률적인 정의에 따르면, ‘지도’란 측량 결과에 따라 공간상의 위치와 지형 및 지명 등 여러 공간정보를 일정한 축척에 따라 기호나 문자 등으로 표시한 것을 말하며, 정보처리시스템을 이용하여 분석, 편집 및 입력·출력할 수 있도록 제작된 수치지형도[항공기나 인공위성 등을 통하여 얻은 영상정보를 이용하여 제작하는 정사영상지도(正射映像地圖)를 포함한다]와 이를 이용하여 특정한 주제에 관하여 제작된 지하시설물도·토지이용현황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수치주제도(數値主題圖)를 포함한다.(공간정보의 구축 및 관리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10항)고 되어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측량 결과에 따라서’ – 현실 반영성에 대한 정의로, 측량기준점을 중심으로 공간상에 존재하는 일정한 점들의 위치를 측정하여 도면 및 수치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

● ‘공간상의 위치와 지형 및 지명 등 여러 공간정보를’ – 지도를 이루는 대상을 정의하는 것으로, 위치 및 형태와 이름이 포함된다는 의미

● ‘일정한 축척에 따라’ – 축척은 실제의 거리나 면적을 지도상에 나타낸 비율을 가리키므로, 기준이 되는 비율이 하나의 지도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

● ‘기호나 문자 등으로 표시’ – 지도 상의 각종 공간정보를 표시하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이 정의에 대해서 기호나 문자 이외에도 점, 선, 면과 같은 도형적인 부분도 필요해 보이는 항목이기도 함(물론 기호가 이들을 포함한다고 해석하면 틀린 말은 아니겠으나, 선과 면을 기호라고 정의하는 것은 오해 요소가 많아 보임)

이 정의에 따르면 측량 결과나 일정한 축척이 적용되지 않은 ‘약도’((화면 3)과 같은)는 법률상 지도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항공촬영한 정사영상 원본 역시 지도 시스템의 재료로 사용되면 지도가 될 수 있지만, 좌표와 축척에 맞추어 매핑이 되지 않은 이상 그저 사진 데이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지극히 공간정보 산업계를 위한 정의에 불과할 수 있다. ‘지도’라는 단어는 위의 정의만으로는 부족한 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 공간적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이 지도일 수 있다
왜상통계지도(歪像統計地圖, cartogram)라는 것이 있다. 통계자료의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실제 땅의 크기나 모양과는 다르게 지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각국의 인구 규모 기준으로 세계지도를 그리게 되면 (화면 4)와 같은 왜곡된 지도가 나타난다.(자료 출처 : 월드매퍼, http://www.worldmapper.org/) 이렇게 왜곡된 왜상통계지도를 가리켜 지도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비뚤어진 지도이지만, 그 나름대로 또 다른 쓰임이 있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

화면 4. 지도가 목적에 따라 현실공간을 왜곡한 경우에 지도가 아니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화면 4. 지도가 목적에 따라 현실공간을 왜곡한 경우에 지도가 아니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화면 5)는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로, 이 역시 현실 공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전철역 간의 위상관계만을 기준으로 시각적으로 편집하여 만든 그림 파일이지만, 이것 역시 지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는 왠지 미안해진다. 현실 공간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았지만, 사용자들은 현실 공간을 반영한 실제 지도 위의 지하철 노선 표시보다 오히려 쉽고 친근하게 이 지도를 이용하고 있다.

화면 5.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는 현실공간과 전혀 무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유용한 지도임에 틀림없다. (자료 출처 : 서울메트로)
화면 5.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는 현실공간과 전혀 무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유용한 지도임에 틀림없다. (자료 출처 : 서울메트로)

지도와 관련된 칼럼을 쓰면서 생긴 고민은 바로 이 부분이다. 공간정보 업계 측면에서의 지도는 대부분 앞서 언급한 법령 상의 지도를 범주로 삼고 있다. 우선 좌표가 정확한, 실제 공간과 매핑이 가능한 지도 데이터와 각종 속성자료를 대상으로 한다.

반면,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굳이 정확성보다는 효율성이 확보된 지도가 아니더라도 공간적 인식이 가능한 약도나 지하철 노선도가 더 편할 수도 있으며, 왜곡통계지도가 더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겠다.

끝으로, 서두에서 인용한 책의 뒷부분을 마저 인용한다.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은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지라면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서비스 기획자라면 지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한 발 물러서 볼 필요가 있겠다. 어쩌면 다시 한 번 백지 상태에서 열린 사고로 지도를 생각해 볼 시점이 아닌가 싶다. 지도는, 공간정보업계 종사자들의 특권이 아니다.

임영모 0duri@naver.com 대학교에서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컴퓨터잡지사 기자로 시작하여, 애니메이션, 출판, 모바일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GIS 업계에 종사한 지 10년이 넘었다. GIS 분야에서 전통적 GIS보다는 인문학 기반의 다양한 공간정보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지도를 통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활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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