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곳은 지방의 한 연수원이었다. 담당자는 소속 기관 홈페이지에 만화를 연재하는 분이라고 소개했고 우리는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별 다른 고민 없이 성씨에 맞게 ‘정 화백님’이라 호칭했더니, 그렇게 말고 ‘정 작가’로 불러주면 좋겠다고 대답해 머쓱했다. 무슨 불편함이 있을까 싶었는데, 자신은 이야기를 구성하고 창작하여 만화로 표현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불리고 싶다고 했다. 일박이일을 함께 하는 동안 서로가 통하는 점이 많아서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람의 책을 구입해서 읽으면 된다. 온라인 서점은 한정된 공간에서 베스트셀러나 유명작가, 혹은 광고비를 많이 지불한 출판사의 책들을 위주로 노출하여 독자에게 선택의 폭을 제한하고 상품 정보를 노골적으로 왜곡시킨다. 요즘 들어 온라인 서점보다는 마을책방을 더 많이 찾는 이유다.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며 몇 군데 책방을 둘러봤지만 정 작가의 책은 없었다. 대형서점도 재고가 막 소진된 후였다. 자주 가는 작은 책방에 미리 주문하고 기다렸는데, 많이 팔리지 않는 책이라 그런지 며칠 뒤에야 수령할 수 있었다.

‘정가네 소사’(鄭家네 小史)는 작가가 자신의 집안의 이야기를 세 권의 만화로 엮은 것이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특별히 자랑하거나 내세울만한 것 없는 친가와 외가 각 4대에 걸친 120년을 담담하게 정리한 미시사의 역작이다. 작가는 제3공화국 절정기에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제4공화국 말기까지 유년기를 보냈고, 청소년기를 관통하는 제5공화국을 서울 청량리에서 겪었으며, 제6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성인이 된 이 나라의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정서와 신념은 물론 사춘기의 부끄러운 고백과 가족의 흉허물까지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독자의 관음증을 자극하니 몰입감도 높다. 누구나 자신과 집안의 어두운 면을 감추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구성이 탄탄해졌고, 정직함에서 비롯된 당당함은 오히려 자존감을 높여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배 세력의 가정사가 아닌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만만해 보일 수도 있는 마음씨 착한 이웃집 노총각의 이야기가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과 개발독재 시대와 민주화 과정까지 두루 견뎌오는 과정이라 참되고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해방 무렵에 삶의 터전이던 만주에서 중국과 일본의 총격전을 피해 떠나오다 피난길 어딘가에 돌무덤으로 남아야만 했던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술만 마시면 한 많은 옛이야기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사를 괴로워하는 아버지와 달리 침묵으로 일관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작가는 자신의 뿌리를 향한 궁금증에 젖는다. 이십대 초반에 백성민 선생 문하로 들어가 1년 동안 수업을 받았고, 20대 중반에 운동 단체인 ‘작화공방’에서 잠시 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장래가 불투명한 만화가 지망생이었다. 방황하던 그는 생계를 위해 건설 현장과 생산직 노동자, 각종 장사, 운전 등 온갖 직업들을 전전한다. 만화를 향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늘 그 세상을 동경하고 주변을 서성이던 작가는 어떤 잡지에 부모님의 첫 만남을 소재로 한 작품을 기고하면서 다시 한 번 꿈을 키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빈곤한 소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집착과 노력은 홀로되신 어머니와 잦은 대화를 통해 애틋하고 아름다운 기억의 꽃으로 되살아난다.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던 길에 시작된 질문으로부터 말문이 트인 어머니의 회고는 외할아버지의 캐릭터와 방황하던 외삼촌의 모습까지 구체화 되면서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두 집안 이야기를 결합시켜 세상에 내보는 원동력이 되었다. 갑오년 동학혁명기에 녹두장군 전봉준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던 증조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 작가 자신과 조카들로 이어지는 탄탄한 구성이다. 한학자인 증조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명심보감, 동몽선습을 뗐을 만큼 명석했지만 어려운 시절을 관통하는 동안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력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아버지가 남자 주연이다. 한국전쟁 직후에 김제읍내 공병 여단 소속 의무대대 소속으로 6년간의 군 복무를 하던 정동호 하사가 우물가에서 상중인 동네 처녀 김정숙을 만나는 것으로 여주인공이 섭외되었다. 두 주인공의 신접살림이 차려진 외할머니댁은 원형 그대로 만화 속에 부활하여 애틋한 사연들의 주요 무대가 된다.

첩의 치마폭에 기대며 재산을 탕진하는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낼 때는 혹시나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뇌한 흔적도 역력하게 드러난다. 연동댁이라는 택호로 불리던 외할머니 오씨는 곱고 아름다운 자태의 한복을 입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일본 유학파인 남편 김병옥이 노름에 빠져 문전옥답을 날려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 고생하던 한 많은 풍경은 가슴이 아리다. 전국 사금 채취량의 70%에 달하는 땅 김제의 이야기가 외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조선일보의 방응모, 금광왕 최창학 등의 열거도 부모님을 통해 전해 듣고 검증해 온 소중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팔봉 김기진이나 채만식, 설의식 등 조선 문단에서 이름을 날리던 문인들도 이 행렬에 동참했던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의 시대가 금본위제의 진실과 함께 치밀하게 묘사된다. 수많은 금광 노동자 원혼의 기억과 어린 시절 이모의 벗 영하, 한 세대 후에 작가의 벗 신배의 익사로 이어지는 아픔이 고스란히 남은 김제 평야의 금방죽들은 유신 헌법 공포 이듬해 불도저로 메워져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금방죽, 깔담살이, 몸부덩, 생긋 장수 등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단어나 전라도 사투리를 처음 접하게 되었으며, 강점기 일제의 노동착취 방식이 막무가내의 형식은 아니고 외형상 합리적인 틀 안에서 행해지는 과정들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아버지 정 하사의 군대생활을 이야기할 때는 1950년대 군 계급체계에서는 하사가 지금과 달리 간부 아닌 일반 병사였다는 사실 등을 통해 민간의 아픔이 보다 현실감 있게 정리 된다. 외할아버지의 욕망과 좌절, 나라 잃은 노동자의 아픔, 사관생도를 꿈꾸며 작가의 우상이자 집안의 자랑이었던 큰형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당숙이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연좌제에 걸려 좌절한 사연은 가슴 아팠다. 하나의 우화와 같은 ‘곤충기’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과정과 형제애, 조카들의 반복된 습관에 대한 꾸짖음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류사의 관습을 보는 듯하다.

군대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의술을 통해 어려운 시절 일대의 응급 환자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름답다. 병원이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에 생명이 위태롭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구마와 쌀을 답례로 받으며 수술하고, 처방했을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이들의 출산을 도왔고, 민간요법 등의 기초 의학지식으로 널리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았다. 특히 바람의 파이터로 유명한 최배달의 부친 최 면장님의 경우는 향년 91세로 타계하시던 그 순간까지 의지하고 신뢰했던 자랑스러운 분이었다. 하지만 제도의 틀에서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의 의료행위는 불법이었다. 이웃 약사의 신고로 지서를 들락거려야 했던 무면허 의사는 그 멍에를 짊어지고 좌절과 역경의 세월을 보낸다. 그래도 힘이 된 것은 이웃에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의 권유로 정부의 잠농업 장려정책에 따라 잠실을 차려 사업을 하다 망한 이야기 속에도 개발독재 시대의 명암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버지의 실패로 어머니가 맡은 여주인공의 역할이 커지면서 가정을 지탱하는 중심이 되고, 남자 주인공의 역할은 점점 줄어든다. 수도권의 공단 인근에서 농사로 소일하던 황혼의 아버지는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돌보며 천생 의사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한국말에 서툰 불법 체류자들로부터 ‘의사 할아버지’로 불렸다는 기록은 작가의 애절한 사부곡이 아닐까 싶다.

5남매의 넷째인 작가는 부모님 형제는 물론 모든 가족 전부의 실명과 성격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시공으로부터 자유롭게 순서와 무관한 만화의 형식으로 독자를 대했다. 시대 상황에 의해 그 대세를 따라 흘러가는 한 가정과 가족 구성원의 이야기는 굳이 미화시키지 않더라도 충분히 절절하고 애틋하게 밀려온다. 마을 사람들의 갈등 모습도 너무도 인간적이다. 고향집에서 한 가족처럼 생활했던 칠 년 간 정든 애완견 거뭉이와 헤어지는 사연은 아련한 아픔으로 남는다.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하고 싶었던 작은 형의 꿈은 물론이고, 다섯 남매의 뒷바라지와 모든 생계를 책임져야했던 어머니의 고단한 일상은 역사적인 이리역 폭발사고를 관통하는 기억으로 남았다.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던 그 겨울에 부모님을 따라 도망치듯 고향을 등졌다. 새벽열차로 상경하여 시작한 단칸방 서울생활은 고단했던 가족사의 새로운 서막이었다. 세 들어 사는 만화방에 겹으로 세 들며 눈치에 눈치를 봐야하는 암흑기였으나, 만화를 통해 형성된 풍요로운 상상력과 더불어 수많은 추억들을 양산했다. 타인의 관계와 속성들을 관찰하는 작가로서의 따뜻한 시선은 제 2권에 수록된 ‘내 마음의 만홧가게’를 통해 절정에 이른다.

뽕밭에서 남녀가 뒤엉킨 불타는 정사 장면을 훔쳐보던 일곱 살 작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 명장면이다. 산소 곁에 울창한 뽕나무를 보면서 빚을 내서 양잠업으로 재기를 꿈꾸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뽕나무밭 인부였던 동네총각 남철이 삼촌과 동네처녀 행순이 이모의 달뜬 신음소리를 상상하는 저자의 그림을 보면서 실명을 써도 되나 싶을 만큼 뜨겁다. 성적 호기심에 관한 자료는 일본어로 된 아버지의 두꺼운 의학서적으로도 이어지는데, 여자의 몸 구조를 탐닉하던 사춘기의 큰형과 그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담아냈다. 순호 당숙의 이발소에서 함께 일하며 머리도 감겨주고 친절하게 웃어주던 당숙모를 향한 육체의 몸부림 또한 뒷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렇게 표현하나 싶을 만큼 정직하게 묘사되는데 이야기의 끝에 이르면 작가의 선한 마음과 순수성만이 마무리할 수 있는 애틋한 가족애의 클라이맥스다. 월세 단칸방을 전전하던 청량리 시절에 집 가까운 53번 버스정류장 건너편 사창가에 앉아 있던 마네킹의 이미지로 다가온 한 창녀의 신기루와 같은 이미지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사춘기의 초상으로 각인되었다.

세일즈우먼으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1962년생 누나 정미경, 성냥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호남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김제를 오가던 보따리 장사였던 1937년생 어머니 김정숙, 연동댁이라는 택호로 불렸던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이리를 오가며 비단 포목을 팔았다던 1899년생 외할머니 오연하로 이어지는 여자 3대의 운명은 억척스럽도록 거룩하다. 모계사회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면 책 제목은 ‘정가네 소사’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가네 소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작가의 고백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세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7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온전히 그림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고,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비며 심신을 단련시키고, 밥벌이를 위해 다른 작업도 하면서 보낸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을 위해 수십 년 만에 고향을 답사하며 가정사를 되새김질하는 작가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권장할만한 일이다. 작가는 초기 원고를 들고 스스로 출판사를 찾아 나서는 노력을 했으며, 세 번의 거절 끝에 조건이 별로 좋지 않은 출판사와 계약금 없는 황당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전업 작가에게 계약금을 주지 않고 원고를 가져오라고 하면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될 수 없는데 어떻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겠는가. 그 또한 부조리하고 암울한 우리 출판 현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작은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어영부영 진전 없이 일 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처음 제안했던 출판사의 편집장이 바뀌면서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계약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좋은 책이란 좋은 저자가 좋은 편집자와 좋은 독자를 만나는 기본 조건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정가네 소사’는 크게 주목받거나 많이 팔리기는 어렵더라도 한 번 반짝이고 말 그런 책이 아닌 오래 살아남을 그런 책이다.

국정교과서라는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이 나라가 위대한 몇 사람의 역량으로 건국되었으며, 개발독재시대의 여러 시대적 배경과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우리 민족의 역할 또한 지도자 몇 사람의 성과물로 정리하려는 시도가 난관에 봉착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독재를 변명하려던 시도가 멈춰서 일단 다행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지도자 중심으로 해석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그렇더라도 지나친 미화와 왜곡으로 치닫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할 일이었다. 절차와 원칙까지 무시되며 고집 센 지도자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역사의 분탕질이 사필귀정으로 마무리 되기를 희망한다. 시민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배우고 익히되, 각자 자신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정리하고 써내려가는 것도 소중하다. 우리가 역사다. 우리의 작은 일상과 발자국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구성하며 현대사를 완성시켜 나간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가 되고, 지구의 역사는 우주 역사의 한 축을 이룬다. 정가네 소사와 김가네 소사. 이가네 소사, 박가네 소사와 더불어 안가네 소사가 바로서야 이 나라의 역사가 바로 선다. 우리가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정가네 소사가 일깨워준 진실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 파주출판도시의 엄청난 책 공간 아래서 정용연 작가를 만났다. 오가는 사람들을 위축시키는 정말 드넓은 책의 공간에서 우리는 짧은 만남을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작가와의 만남은 작가를 읽는 과정이다. 책 속에 이야기와 마주 앉은 작가의 모습이 일치하여 좋은 책을 읽었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우리 집안의 이야기를 정용연 작가의 그림으로 상상하며 나 자신을 읽을 수도 있었다. 위정자들이 추상적으로 내뱉는 기피 수단으로서의 역사를 냉철하게 지켜보며 우리들의 진짜 역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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