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떡국을 먹는 설날을 맞아야 새해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올드랭사인의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새해 카운트 다운이 있어야 새해라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더 많아졌나 보다. 그러고 보니 신정과 구정이란 단어가 사용됐던 시절이 있었다. 벌써 한 세대가 지나갔다. 지금의 어머니 아버지 세대가 어릴 적이었다. 세계적 추세는 양력인데 여전히 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린 백성들이 사맛디 아니함을 걱정하신 정부는 설날을 쇠지 말라고 강제했었다. 헌데 덕분에 설날이 없어진 게 아니라 신정이 자리를 잡았다. 연휴를 만들어 준 덕분이었다. 물론 십 여 년 뒤에 설날은 부활했고 그토록 정부가 걱정했던 이중과세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참 오래 전 이야기다.

토요일도 쉬지 않았던 그 때, 3일이 넘는 신정 연휴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새해 특별판으로 한껏 두툼해진 신문 사이에 끼워진 TV방송시간표를 크게 펼쳐 놓고 무엇을 볼까 고르는 고민이었다. 3개밖에 안 되는 방송사의 시간표가 신문의 두 쪽 세 쪽에 걸쳐 빽빽히 채워져 있는걸 보면, 읽기도 전에 마치 종합선물세트 안의 과자를 보는 느낌으로 뿌듯해졌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이번에 방영이 될까 안될까 가슴이 두근두근 하며 신문을 펼쳤었다. 동생들과 머리를 맞대며 볼만한 만화 영화를 먼저 찾았다. 시간대가 겹치는 프로는 항상 먼저 발견해서 동그라미를 치는 사람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아마도 우리 집만의 불문율이었을 것이다. 간혹 먼저 동그라미를 쳤는데도 어른들에게 채널을 뺏기면 울상을 짓고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그 시절 TV는 연휴의 유일한 오락 매체였다. 다같이 앉아 뭔가를 같이 먹으며 같은 프로그램을 보는 장면은 오손도손 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행복한 가족의 상징이자 수사였다.

한 세대가 훌쩍 지났고 신문도 TV도 프로그램도 달라졌다. 종이 신문은 위상을 잃었고 TV는 채널이 백여 개다. 프로그램은 리모콘만 누르면 언제든 정보가 뜬다. 못 봤던 프로그램을 찾는 설렘은 없다. IP TV는 ‘픽미픽미-나를 선택해 주세요- 하며 화려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검색해서 찾으면 뭐든 언제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더 이상 TV앞에 모이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식구들은 자기만의 미디어 앞으로 눈을 고정한다. 스마트폰을 들어다 보며 SNS를 하는 딸, 휴일 특선 아이템을 받아야 한다며 게임에 몰두하는 아들, 컴퓨터 앞에서 지난주에 못 본 인기 드라마를 보는 아버지, 집안 식구 누구 한 사람쯤은 보고 있을 TV소리는 예전만큼 독보적이지 않다.

가족 중 이 광경이 익숙지 않고 불편한 사람이 분명히 있다. 어린 시절을 이렇게 보내지 않았던 세대이다. 장년층 이상은 자꾸 식구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같은 주제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명절인데,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이런 기회가 일년에 고작 몇 번인데, 그렇지만 그것이 아래 세대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는 순간 절망한다. 무엇인가를 탓하고 싶어진다. 세상이 변한 줄은 알지만 사람에 대한 기본은 변하면 안 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헌데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래 세대들은 더욱 멀어진다. 그래 다 이게 스마트폰 때문이야. 게임때문이야. 인터넷 때문이야.

누구나 자기의 어린 시절의 감수성을 형성하던 시기의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다. 어느 순간 그 시기의 향수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이 고정되기 쉽다. 어떤 경우는 그것이 맞다. 원래 가치란 다양하고 다양한 가치의 공존 폭이 클수록 사회는 세련되어 지는 것이다. 그것이 옳든 틀리든 누군가의 가치라면 그것으로 존재의 의미는 있다. 세대간을 관통하는 가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머님, 아버님, 꽃중년님들, 가치가 표현되는 ‘미디어'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기억의 기반이 있음을 잊으면 안 되는데 자꾸 그걸 잊으신다.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변한 것이다. 즐거움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단선적이고 단순했던 시기에서, 범위나 관계를 개인이 설정할 수 있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가장 예민한 감수성의 형성 시기에 접하는 매체의 속성이 달라졌다. 이제 이 매체에 익숙한 세대는 TV 프로 하나를 보더라도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고, 본인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과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재미까지 있어야 즐거움이 완성된다. 매체에서 의견을 나누는 재미, 관계망 속의 커뮤니티는 생활이 되어있다. 참여자의 입장이든 관찰자의 입장이든.

식사를 하면서도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못 떼는 세대가 버르장머리 없고 기기에 중독된 세대가 아니라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자아를 확인하는 소통의 방식에 충실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옳고 그름의 이슈가 아니라 현상의 이야기이다. 이젠 오손도손은 사라진 개념이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다만 새로운 개념의 오손도손이 나타날 시기인 것이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미디어는 메시지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TV와 신문만으로 단순 일방향이었던 미디어 시절, 미디어는 바로 추억이라는 메시지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의 메시지는 달라졌다. 하나의 익숙한 시각만으로 다른 사람의 다양한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문화적인 이유를 제외하고서라도 세대간의 이해는 그 세대에게 가장 익숙한 미디어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이 된다.

새로운 오손도손의 행복은 다른 세대의 미디어를 내게 익숙한 미디어만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들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감수성을 지켜봐 주고 손 내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수평적 수용성에 익숙하지 않은 장년층이지 눈 뜨자마자 새로운 미디어를 계속 접해온 세대가 아니다. 게다가 그 수많은 미디어를 누가 만들어 냈나. 만들어 낸 사람이 우리가 아니라고 해 봤자 소용없다.

무엇이 또 다른 오손도손을 만들어내는 실마리가 될까. 그것은 아마도 오손도손의 뜻에 대한 개념 찬 훈화보다는 자식에게도 기꺼이 배우겠다는 수평 커뮤니케이션의 시도일 것이다. 사실 그들은 미디어 기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의 콘텐츠를 들여다 보고 있다. 그것이 뭔지 그 미디어의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우선 알아야 수평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년 새해 연휴 때는 가족 모두가 다양한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들을 조금만 더 편안하게 바라보는 데서 또 다른 오손도손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한해 한해 더 다양해지는 메시지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사실 지금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도 10년전에는 낯설고 어색한 것이었으니까.

노수린 suerynnroh@gmail.com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언론홍보 석사, MBN 기자, KTF 해외마케팅과 플랫폼 기획팀장을 거쳐, IoT스타트업 운영과 컨설팅 및 교육 강의를 해왔다. 현재 한림대 사회학과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IT는 사람의 행복과 가치추구를 위해 서비스와 콘텐츠로 관계를 연결하는 장치라 생각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용한 오픈 IT를 기반으로 사용자UX가 주권처럼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많은 이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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