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닐곱 살 때로 기억한다. 모두가 잠든 밤에 우리 방 창가에 아무 말 없이 우뚝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며칠에 한번 꼴로 보이는 키가 큰 이 남자를 이불을 뒤집어쓰고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공포감에 떨기도 했지만 안 보이면 궁금하기도 했다. 같은 방을 쓴 자매들과 엄마는 내가 꿈을 꾸었거나 몸이 약해 헛것을 본 것이라 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모호한 몇 달 동안 밤을 기다리며 너무나 수상하고 몽롱한 감정적 동요를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한참 후 우리 집에 큰 도둑이 들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때의 몽환적 기억이 생생하다.

현실과 꿈은 나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이원적인 개별적 요소로서가 아니라 이중성의 개념으로 다가온다. 나의 내부에서 현실과 꿈이 같은 무게로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현실에서 존재하고 또한 이 현실적 바탕에서 우리 스스로가 작동시킨 심리적 메커니즘 속에서 현실의 저편에 있는 이상을 추구하며 이를 현실에서 구체화한다고 믿는다. 이우림의 작업은 어느 한편에 치우칠 수 없는 현실과 꿈의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갈등하고 갈망하는 우리 자신을 표현한다. 그의 작업에서 등장인물들은 현실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비현실적인 표정이나 행동으로 표현된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는 표정을 상상해 본다면 마치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작가의 작품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환영 속에서 이상의 세계를 동경하고 꿈꾸는 경계에서 고립되고 방황하는 우리 본연의 모습 을 표현한다. 현실에 존재하지만 허공 혹은 꿈속을 걷고 있는.... ‘Walking on air'.

In the Woods, 150x194cm, oil on canvas, 2016
In the Woods, 150x194cm, oil on canvas, 2016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꾸어 보았을 절대 고요의 휴식과 같은 배경에서 제3의 존재가 되어 마치 꿈속의 나 자신이 현실의 나를 바라보는 환치된 상황이 이우림의 작품 속에 전개된다. 현실과 그 이면을 비추는 거울에 투사되어 마치 미로처럼 끊임없이 반복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을 창조하고 도무지 현실적이지 않은 이 새로운 공간 속에서 현대인은 자유롭게 부유한다. 어떤 간섭이나 방해도 허용될 수 없을 것 같은 절대 자유와 평온이 긴장과 낯설음이라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이질적인 요소와 교묘히 결합되너 우리는 어느 순간 이우림의 꿈속에 갇히고 만다.

우리 내부에 현실과 꿈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현실이 꿈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되는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가 이우림 작품에 등장하는 고개 돌린 ‘주인공’이 되고 우리는 생경한 공간 속에 안착하게 된다. 누적된 습관과 기억이 만들어낸 현실이 진실이라고 작가는 믿지 않는다. 현실과 꿈의 경계선 상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작가는 우리도 그러한 태도를 취하기를 주문한다. 즉 우리에게 상상이 된 현실, 현실에 개입된 초현실의 상황을 겸허히 수용하라는 뜻이다. 이것이 내가 이우림의 작업에 크게 공감하는 이유이다.

섬, 61x50cm, oil on canvas, 2014
섬, 61x50cm, oil on canvas, 2014

이우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성별이 모호한 무기력한 표정의 쓸쓸한 모습이거나 뒷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인물들은 현실과 꿈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고립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며 독특한 신비로움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와 같은 특유의 아주 개성적인 인물묘사는 이우림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꽃무늬 패턴의 원색 천을 둘러싼 인물들은 다양한 배경과 결합되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여있는 몽롱한 긴장감이 도는 초현실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물 위에 부유하는 듯, 하늘을 나는 듯, 땅 위에 떠 있는 듯, 중력과 물리학적 논리를 넘어서고 시간개념도 무의미해진 무한의 허공으로 우리들을 인도한다. 이처럼 현실과 꿈이 모호하게 뒤섞인 공간을 통해 작가는 편안함과 휴식, 불안과 긴장감, 두려움과 권태, 고독과 같은 현대인들의 일상과 함께하는 다양한 감정의 변주를 시도한다.

In the Woods, 162x112cm, oil on canvas, 2015
In the Woods, 162x112cm, oil on canvas, 2015

이러한 현실적인 모티브와 감각에 의해 인지된 무의식의 세계, 논리로부터 일탈된 파편화된 구조들이 서로 부딪히며 상생하는 작가의 작품은 현실 속의 친근함과 평화로움, 그리고 섬세한 긴장감이 도는 낯섦이 교묘하게 어우러져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에너지를 방출해 낸다.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생이 다할 때까지 현실과 꿈의 영역 어느 쪽에도 확실하게 걸치지 못하는 경계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차라리 어정쩡한 상황을 과감히 받아들이고 혼돈과 갈등과 갈망을 즐기고, 가감히 초월하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Enjoy walking on air!'

Red Flower, 130.3x97cm, oil on canvas, 2016
Red Flower, 130.3x97cm, oil on canvas, 2016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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