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서울우유협동조합 전신인 경성우유동업조합 창립)

-36원 (1970년 서울우유 360㎖ 가격)

-2002년 (하루 1000만개 판매 돌파)

-31.8% (서울우유 국내 유업계 점유율)

-1조1351억원 (2015년 생산실적)

-700억개 (1986년~2015년까지 30년 동안 서울우유(200㎖ 기준) 판매개수)

1960년대 후반 서울우유 측이 도입한 우유 제품운반용 냉장차량. 사진=서울우유협동조합 제공
1960년대 후반 서울우유 측이 도입한 우유 제품운반용 냉장차량. 사진=서울우유협동조합 제공

우유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민 건강 향상에 가장 기여한 제품이다. 가난과 전쟁 복구에서 발전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사에서 우유는 당시 남녀노소 건강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동에게 우유를 무료 배급한다는 1946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사진=동아일보 캡처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동에게 우유를 무료 배급한다는 1946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사진=동아일보 캡처

1970년대 후반 서울우유 제품군. 사진=서울우유협동조합 제공
1970년대 후반 서울우유 제품군. 사진=서울우유협동조합 제공

국내 우유업계 산 역사라고 하면 단연 서울우유협동조합(이하 서울우유)이다. 80년 전인 1937년, 서울우유 전신인 경성우유동업조합이 서울 정동에 현판을 내걸었다. 직접 목장을 운영하는 낙농인 21명이 조합을 구성해 국내 유업계 역사를 일궈냈다.

경성우유 시절 우유는 젖소의 원유를 가마솥에 끓여 병에 담아 가정에 배달하는 방식으로 유통됐다. 당시 1홉(180㎖)들이 유리병은 일본에서 전량 수입해서 사용했고, 병 마개는 종이로 된 지전을 사용했다. 국내에서 직접 우유병을 생산하기 시작한 때는 사람들 사이에 위생관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1960년대 초반이다.

현재 서울우유협동조합의 전신인 `서울우유동업조합`의 1949년 10월 7일자 경향신문 광고. 사진=경향신문 캡처
현재 서울우유협동조합의 전신인 `서울우유동업조합`의 1949년 10월 7일자 경향신문 광고. 사진=경향신문 캡처

해방 직후인 1945년에는 서울우유동업조합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우유 판매에 나섰다. 다방문화가 꽃피던 1940년대 후반에는 `우유 선전실(현 밀크 홀)`을 개점해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우유를 판매하는 쉼터를 제공하는 앞선 방식의 마케팅을 전개하기도 했다.

1962년 지금의 서울우유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창립한 서울우유는 근대적 중랑교 공장을 건설하고 우유뿐 아니라 국내 최초로 연유를 생산해 최신 유가공 기술을 축적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65년에는 자체 기술로 `서울 분유`를 출시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딸기우유, 바나나우유 등 가공유뿐 아니라, 치즈 제조 특허 획득을 통해 `서울 자연치즈`를 선보였다.

`아침마다 우유 한병씩을 마시자`는 1971년 5월 13일자 매일경제 광고. 사진=서울우유협동조합 제공
`아침마다 우유 한병씩을 마시자`는 1971년 5월 13일자 매일경제 광고. 사진=서울우유협동조합 제공

1974년에는 이른바 `삼각 포리`라고 불리는 폴리에틸렌 재질의 삼각 포장이 도입됐다. 당시에는 삼각 포리의 흰 우유도 유통됐다. 이후 1979년에는 현재 대부분 우유의 패키지로 사용되는 삼각 지붕 모양의 카톤팩 우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많은 애환을 남겼던 병 우유는 파손되기 쉬운데다 유통까지 불편해 1989년을 마지막으로 생산이 중단됐다. 1985년에는 우유 포장 용량을 180㎖에서 200㎖로 증량했다.

서울우유 배달 과정을 기록한 1970년 11월 11일자 매일경제 신문. 사진=매일경제신문 캡처
서울우유 배달 과정을 기록한 1970년 11월 11일자 매일경제 신문. 사진=매일경제신문 캡처

서울우유 독주 속에 60년대 한국비락(1963년), 남양유업(1964년), 매일유업(1969년) 등이 등장하면서 국내 유업계도 본격적인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하지만 서울우유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좋은 유제품을 만들기 위해 지속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50년대부터 우수한 종모우(젖소 종자) 확보를 위한 종부 사업을 실시하고 젖소 진료를 위한 수의무실 설치, 낙농기술 지도 등을 통해 젖소개체 관리 중요성에 힘을 쏟았다.

1960년대 병 우유 생산 모습. 사진=서울우유협동조합 제공
1960년대 병 우유 생산 모습. 사진=서울우유협동조합 제공

기술 투자에도 과감했다. 1961년 유지방 소화를 돕고 지방이 뜨는 부유 현상을 없애기 위해 균질기를 도입했다. 1962년 국내 최초로 선진화된 고급 균질우유를 가정으로 배달했다. 그 시절 선명한 농협 마크와 함께 커다란 글씨로 균질우유라고 쓰인 목제 상자를 싣고 다니던 우유 배달원의 모습은 서울우유 홍보에 큰 몫을 했다.

1972년부터는 최신 살균 방법인 초고온 순간살균법을 시행해 국내 우유 제품 보급화에 한 획을 그었다.

1975년에는 용인공장을 설립하면서 우유 생산에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1989년 양주 공장, 2005년 거창 공장을 잇따라 준공하는 등 끊임없이 신기술을 적용한 신선한 우유를 공급해 왔다. 2014년에는 안산 중앙 연구소를 개소하고 우유에 대한 연구를 거듭, 소비자뿐 아니라 학계에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울우유의 제품의 장점을 알리는 1970년 9월 11일자 매일경제 신문 광고. 사진=매일경제 캡처
서울우유의 제품의 장점을 알리는 1970년 9월 11일자 매일경제 신문 광고. 사진=매일경제 캡처

서울우유는 우유 품질 개선에 있어 지속적으로 `최초` 타이틀을 경신해 왔다. 1984년에는 국내 최초로 중간 유통 전 과정이 냉장상태로 이뤄지는 콜드체인시스템을 완비해 우유 품질 고급화 시대를 열었다. 2005년에는 `1A등급` 고품질 우유를 출시하면서 한국 우유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놨고, 2009년에는 유업계 최초로 `제조일자 병행 표기제`를 실시해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3월에는 `세계 최초`로 원유의 위생등급을 결정하는 세균수 1A등급에 체세포수까지 1등급 원유만을 사용한 두 개의 1등급 우유 `나100%우유`를 선보였다.

한편 제품을 증량한 1985년부터 2015년 말까지 최근 30년 동안 국민이 마셔온 200㎖ 우유는 700억개에 달한다. 팩을 일렬로 세워 나열하면 지구 78바퀴를 돌고도 남을 수준(지구 둘레 4만6250㎞ 기준)이다. 서울우유의 국내 우유시장 점유율은 33.5%(2016년 9월 기준, 링크아즈텍 자료)이다. 유가공 업체로는 유일하게 생산실적 1조원 이상인 7개 식품 업체 중 4위에 올랐다.

정영일기자 wjddud@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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