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된 시간을 / 불태워 가도 / 슬퍼하지 않고 /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 춤추는 촛불

선생은 ‘촛불’을 연상시킨다. 넬슨 만델라, 나카소네 야스히로, 문익환과 더불어 올해 100세 되시는 갑장 황금찬 시인의 작품이라 더 의미 있다. 선생은 마지막 광복군이며, 반공주의자이며, 기독교인이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보기 드문 진짜 보수주의자로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청년 시절 목숨을 건 항일투쟁은 전혀 계산적이지 않은 신념의 발걸음이었고, 장년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재에 항거하는 일관성으로 빛났다. 말로만 떠들어대는 애국자가 아니었다. 4·19 혁명을 촉발시킨 사상계를 발행한 언론인이었고, 절망적인 5.16쿠데타에도 포기하지 않고 시민의 연대와 통합에 앞장섰던 용자였다. 독재자의 대일 외교나 베트남 파병 등 거의 모든 것을 전면에서 비판했던 이 참된 민족주의자는 기득권에 연연하는 친일파나 수구세력들에게 언제나 위협적인 존재였다. 쉰여덟 생일을 열흘 앞두고 포천의 약사봉에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추락사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침없이 전진하던 희망의 촛불이었다.

한국전쟁 영웅으로 제대 후, 시골에서 조용히 지내던 아버지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상경한 것은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이었다. 공화당 관리장이란 완장을 차고 귀향한 아버지는 고향의 유지가 되었다. 지역 국회의원 윤재명과 당 부총재 김종필을 수행하는 것도 아버지의 일이었는데, 그저 애국하는 마음으로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 선거철이 되자 집집마다 돈 봉투를 돌리기도 했으며 꼼꼼한 지령에 따라 상대후보를 비방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1971년 4월 27일에 있었던 제7대 대통령선거 당일에는 점심시간 막간을 이용해 독재자의 몰표를 집어넣는 등 정부의 지시에 따라 부정투표에도 적극 개입했다. 배움이 짧아 국가와 당을 구분 못할 만큼 무지했으나 한없이 용감했던 아버지는 그것이 빨갱이들로부터 나라 지키는 길이라 철저하게 믿었다. 독재자의 재선이 임박했을 때,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괴로움으로 잠 못 들던 선생의 항일수기 ‘돌베개’가 세상에 나왔으나 아버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살면서 아버지의 눈물을 세 번 보았다. 첫 번째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 야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했을 때 26년 전의 잘못을 뉘우치던 회한의 눈물이었다. 두 번째는 65년 결혼생활을 함께 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다. 마지막은 지난해 파주에 있는 장준하공원을 찾아 인적 없는 돌무덤 주변을 손수 정리하실 때였다. 새마을운동의 현장에서 열심히 애국의 삽질로 보낸 세월들이 자랑스러웠던 아버지는 대통령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던 불온한 사람들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팔순이 넘어 독서에 심취하셨다. 막내아들의 서재에서 책을 빌려 가시거나 종종 어떤 책을 사달라고 하셨는데 ‘남산의 부장들’, ‘혁명과 우상’, ‘이승만 평전’은 물론 ‘백범일지’, ‘김대중 자서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이념의 편견 없이 읽고 또 읽으셨다. 고집불통 벡발 노인이 뒤늦게 책읽기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아름다웠다. 구순의 아버지는 한때 존경했던 독재자를 기억에서 지우고 그 빈자리를 돌베개와 장준하로 채웠다. 한 번도 마주하지 않은 선생을 평생의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나의 인생의 과정은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꽂고 이제부터 나를 안내할 것이다. 하나님이 날 기어이 그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대지를 핥는 바람소리가 어둠을 흩뿌리며 지나갔다. 그리고 나의 명상을 깨워주었다.” - 74쪽

선생은 일제강점기 평안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평양의 명문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중 교사였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신성중학교로 전학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생은 일제의 탄압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소학교 교사로 일하며 목사를 꿈꿨다. 몇 년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철학을 전공했고, 신학교도 졸업했다. 일시 귀국하여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소학교 시절 제자와 결혼하지만 곧장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참전한다. 일제강점기 식민지에서 태어난 설움으로 끌려가야만 했던 스물여섯 청년 장준하가 열일곱 신부 희숙에게 일본군 탈출을 예고하며 암호로 정한 것은 ‘돌베개’였다. 돌베개는 구약성서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베고 자다가 좋은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고생과 시련을 의미하기도 했는데, 성경 속 야곱이 세상을 버리거나 잊은 사람은 아니었고, 민족을 향한 불붙는 야심을 불태우다 결국 유대 민족의 큰 조상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좋은 징조였다.

4.19혁명 11주기에 발표한 항일수기의 제목은 그래서 ‘돌베개’다.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해방전후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함께 다른 회고록이며, 선생의 삶 중에 극히 일부만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총 444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모든 진실과 고백이 그러하듯 술술 읽히는 장점이 있고 뛰어난 문장력이 돋보이는 명저다. 중국 장쑤성 쉬저우에 위치한 쓰카다 부대에 배치된 선생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탈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징집 반 년 만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라고 선언한 뒤에 결행한 일이다. 혹서의 한여름 밤, 머나 먼 타지에서 주린 배를 붙잡고 병든 동지를 부축하며 도망 다니는 동안 길을 잃고 헤맨다. 참외로 오인한 새끼수박으로 허기를 달래는 모습은 일면 우스꽝스럽지만 진지한 고뇌의 기록으로 인해 비장함이 느껴진다. 일군의 총탄과 추격전,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순간의 긴장감들은 생사를 오가는 고통이 그대로 전달되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중국군에 합류했을 때 만난 평생 동지 김준엽과의 조우는 뜨거웠고, 불로하 강변에서 합창하던 애국가의 엄숙함은 장정의 서막이 되었다.

“우리가 유격대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 중앙군과 팔로군 사이에 알력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지독한 충돌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목격을 하고 나니 중국의 동족상잔이 얼마나 비분강개할 노릇인가 하는 통탄만이 걷잡을 수 없이 한심스러웠다. 적어도 눈앞에 일본이라는 외국 민족과의 전쟁을 앞에 두고 이렇게 싸운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ㅡ 이것은 그때까지의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어찌 그들만의 현실이랴. 나는 우리의 오늘날 현실을 두고 그때 비웃었던 나를 오늘은 다시 비웃어보기도 한다.” - 86쪽

선생의 활약상은 중국 공산당의 역사와 항일투쟁사를 이해하지 않고 접근하기 어렵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장제스에 쫓겨 망해가던 중국 공산당이 항일민족통일전선이라는 국공합작 전략을 표면에 내세워 화해하는 모양새를 보이지만 결국 중국군과 미군을 농락하며 공산당의 군사력을 이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회복시키는 마오쩌둥의 전략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선생의 투철한 반공정신과 민족주의 정신은 그때의 현장 체험으로 더욱 공고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팔로군의 습격으로 몸을 의탁했던 중국군 부대가 괴멸되자 충칭행을 서두른다. 도쿄 유학시절에 은밀히 들어왔던 임정에 대한 정보만 믿고,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혁명 선배들을 찾아 조국 광복에 몸을 바치겠다는 일념으로 서진이 시작된다. 똥망태를 짊어지기도 하고, 중국인으로 변장하기도 했으며, 더위를 피해 원두막에 쉬어가며, 배탈로부터 안전한 수박으로 배를 채우고, 이름 모를 중국 청년의 도움도 받았다. 중간 거점인 안후이성 린촨에 설치된 한국광복군훈련반에 오래 머무는 동안 필사본 잡지 ‘등불’ 1,2호도 발간한다. 방해와 회유에 당황하기도 하지만 충칭 행을 가로막는 이간공작이라 판단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1944년 11월 30일, 김학규 등의 배웅 속에서 53명의 동지들이 함께 다시 충칭으로 향한다. 맨 처음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지로 옮겨 다녀야만했다. 마지막 임시정부가 있었던 충칭은 실제와는 무관하지만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의 바로 그 중경과 같은 한자인데, 그 영화 OST인 ‘California dreaming’의 리듬과 가사가 여름옷을 입고 한파에 맞서야 했던 대장정의 과정과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겨울 고행은 더구나 6명의 여자와 3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상태라 수치심은 물론 최소한의 품위마저 유지하기 벅찬 험난한 행군이었다. 제갈량의 고향 라오허커우에 이르러 식량과 여비를 구하기 위해 세 차례의 연극 공연을 기획한 것은 훌륭했다. 국민정부가 충칭으로 쫓겨 갈 때 생긴 험로로 삼국지에서 제비도 넘을 수 없다고 소개된 파촉령에서 눈베개로 눈을 붙이고, 지독한 옴에 시달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애처롭다. 심지어 호랑이도 만났다.

1945년 1월 31일, 꿈에 그리던 암반의 도시 충칭에 도착한다. 태극기 휘날리는 감격스러운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북받치는 설움과 기쁨이 뒤섞인 파동이 밀려온다. 중국 두루마기를 입은 거구의 노인이 검은 안경 사이로 엷은 미소를 보이자 그가 백범임을 한 눈에 알아본다. 좌우에 노인 일행을 거느리고 나타난 김구 선생은 별 말씀이 없었으며 눈앞의 백발이 성성한 임정 각료들의 모습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슬픔이 밀려온다. 기대가 컸던 것일까? 신익희 내무부장의 환영사에 이은 장준하의 답사로 연회는 시작되었지만 오랫동안 고국의 소식을 모른다는 노인들과 왜놈들의 통치하에서 태어나 국기조차 본적 없이 일장기를 보고 자란 젊은이들의 상충되는 고백의 자리는 이내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중국인 소유의 여관을 매입해 겨우 마련한 초라한 임시정부 청사 화장실에 신구 세대가 나란히 앉아 용변을 보는 등 열악한 환경을 직접 체험하면서도 뭔가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불편한 나날이 지속된다. 연일 경쟁적인 환영회로 여러 단체들의 부름을 받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파벌만 일곱 개인 당리당략이 난무하는 현장은 허탈했고 미인계까지 등장하는 등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국제적인 보도를 통해 장정을 통한 자신들의 기상이 세계 만방에 퍼져 나가는 와중에도 그 위선적인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청년 장준하는 전체 회의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우리는 여러 선배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자 해서, 아니 그 여념의 손과 발이 되고자 해서 몇 번의 사경을 넘고 수천 리를 걸어 기어이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때문에 일군에서 중국 땅에 배치된 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 몰랐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일군에 끌려오면서 계획한 탈출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즈음 이곳을 하루빨리 떠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솔직하게 말해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오히려 오지 않고 여러분을 계속 존경할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 260쪽

그 위태로운 도발은 신념의 폭발이었다.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한 뒤 대륙횡단의 고행을 통해 신앙처럼 믿으며 찾아온 확신의 현장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도 컸던 것이다. 하늘처럼 생각했던 임시정부의 선배들이 일본에 당한 수모와 설움은 뒷전이고 서로를 겨누며 싸우고 있었으니 젊은 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정당의 난립으로 분열과 혼돈 속에 엉망인 임시정부의 현실이 큰 실망을 준 것이다. 해명 자리를 주선 받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젊은이는 당당했고, 또 다시 들려오는 신당 창당 소식은 더욱 코미디 같은 현실이었다. 이것은 70년도 더 지난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현실에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강력한 데자뷰가 되어 가슴을 찌를 지경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내가 이러려고 6천 리를 걸어왔나 하는 자괴감도 들고...”가 딱 어울리는 한 편의 코미디 같은 현실에 내던져진 애국청년을 누가 위로할 것인가?

이렇듯 돌베개는 죽을 각오로 항일운동에 뛰어든 청년 장준하가 결정적인 한방 없이 조국해방을 맞이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 후반부가 또 다시 드라마틱하게 전개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준비의 세월이 아름다운 문체로 기록되어 읽는 내내 깊은 성찰과 관계의 미학으로 밀려온다. 술술 읽히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인간적인 매력에 푹 빠지게 되는 이야기다. 임시정부의 귀환 전후로 있었던 일들을 매우 객관적이고 냉정하며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몇 번의 개정을 통해 쇠귀 선생의 환동체로 제호를 단 아름다운 책을 출간한 출판사 이름 또한 그 정신에서 비롯된 돌베개다. 우리 역사가 부끄러운 것은 30여 년 세월이 흘러 가해자였던 독재자의 딸이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의 작은 월세방을 찾아가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장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진정성 하나 없는 선거 전략일 뿐이었으나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한 다수의 시민들은 영상을 통해 그 장면을 흡수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농락당한다는 점이다. 선생의 장남 장호권 선생께서는 춘부장 사후 27년간 해외도피 생활을 해야 했고 2003년에야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설악산 등반 중에 처음 만난 장호권 선생께서 숙환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김희숙 여사님 이야기를 풀어 놓으실 때는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죄스럽고 가슴이 아팠다.

대륙의 강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그것을 삼키고 싶었던 청년이다. 그 황홀한 태양을 삼켜 자신이 잉태한 맑은 해를 조국의 아름다운 아침으로 내놓고 싶었다던 청년이다. 수십 년 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던 거듭된 다짐을 돌베개 곳곳에 새겨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아름다운 장년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발간된 책 한 권의 감동으로, 늙으신 아버지와 함께 역사의 진보를 읽었다. 돌베개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자랑스러운 조상의 기록유산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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