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의 가장 큰 가치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색의 결과로부터 얻게 된다. 지난한 삶 속에서 사색은 잠시 현실을 떠나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살아가면서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지혜로운 삶을 향한 숨고르기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대학시절 학교 내 ‘헬렌관’이란 건물에서 2년 동안 조교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도서관으로 이용된 이 건물의 2층 구석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연구실의 큰 창으로 보이는 숲이 가득한 풍경은 매우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매우 운치가 있어 나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창밖으로 간간이 보이는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고개 숙인 학생들과 내 자신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비현실적인 공간을 떠다니는 것처럼 느낀 적도 있다. 35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힘들었던 그 시절의 정돈되고 진지한 나를 그리워하며 사랑한다. 그리고 시나브로 사색했던 그 공간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내 청춘의 사색이 만든 젊고 패기 넘치며 고뇌했던 아름다운 공기가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이라도 그 공간을 채우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Ambiguous Scene 1 110X165cm Pigment Print LED monitor 2015]
[Ambiguous Scene 1 110X165cm Pigment Print LED monitor 2015]

임창민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재 공간들을 대상으로 '창'이라는 기능적 소재를 매개체로 작업한다. 동 시대의 작가들이 창의적인 구상을 개념화하는 도구로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듯이 임창민 작가도 시간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영상을 통해 비현실적인 시간의 흐름을 서정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시적 시공간으로 재구성한다. 사진과 영상모니터를 효과적으로 접목하여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이중 프레임으로 구성하여 사용되는 첨단 기술과는 상반되는 아날로그적 서정성을 만들어낸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된 작품은 대중과의 감성적 소통뿐 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예술적 감흥에서 비롯된 창의적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그의 대표작인 'into a time frame' 시리즈는 작가의 시간에 관한 잔잔한 성찰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시간이 가지고 있는 미세하면서도 변화하는 움직임을 정돈되게 전달하고 있다.

작가는 실내와 실외공간을 기술적으로는 이원적으로 구분하나 두 공간의 흐름이 연동되는 감성적인 이중성을 추구한다. 병원, 대학교, 도서관 등의 복도와 호텔 스위트룸과 같은 일상의 실내 공간, 그리고 사람들의 발길과 시선이 닿았을 창 너머 흰 눈이 내리는 언덕과 들판, 파도치는 바다, 바람에 살랑대는 가로수가 있는 도로 등 실외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간 뒤 마치 삶이 정지된 듯 한 빈 공간의 순간을 포착한다. 정지된 시간과 움직이는 공간의 흐름은 조화되어 적막감이 흐르는 서정적이고도 차분한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마치 실내 공간까지 시간의 흐름이 연계되는 상황을 경험하게 한다. 이는 시간은 정지된 순간에도 움직이며, 정적인 순간에도 미세한 흐름이 있는 공간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작가는 찰나의 미덕을 살린 사진의 시간성과 유동하는 공간변화의 흐름을 담아낸 영상의 공간성을 이중적으로 배치하여 시공간에 대한 지극히 감성적이고 설득력 있는 생각들을 담아낸다. 사진이라는 고정된 프레임과 영상이라는 움직임을 담은 프레임을 결합하여, ‘into a time frame', 즉 시간프레임 속에서 기억을 소환하고 감성을 자극한다.

[Into a Time Frame Shanghai red wall 72X108 Pigment Print LED monitor 2016]
[Into a Time Frame Shanghai red wall 72X108 Pigment Print LED monitor 2016]

작가는 창틀을 포함하는 건물 내부 이미지를 촬영하고, 동일한 장소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설정한 창틀 건너편 풍경의 변화들을 동영상으로 다시 촬영한다. 촬영한 건물 내부 풍경을 가로 1m 내외 크기의 사진으로 프린트한 후, 창과 창틀 부분을 따로 떼어 미세한 움직임이 있는 풍경의 디지털 동영상으로 교체하여 마치 사진처럼 보이는 신비한 장면을 연출한다. 정지된 풍경 속의 창틀 너머로 동영상의 흐름이 정교하게 결합되어 풍경 속에 풍경이, 혹은 프레임 속에 프레임이 결합된 작품으로 표현된다. 작품의 사진과 동영상은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촬영되어 한 작품에서 실내외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접목시키고 있다. 작가는 그가 선택한 시간과 공간을 통해 시간 프레임이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유동하는 장소성과 연동된 시간에 대한 단상들이 전개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자신 만의 탁월한 해석을 담아내고 있다.

[Bus Stop H 108X72cm Pigment Print LED monitor 2016]
[Bus Stop H 108X72cm Pigment Print LED monitor 2016]

질서정연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다양하면서도 미묘한 감정과 심리가 세월의 결에 색을 입히고, 인연을 맺은 장소도 제각각의 느낌과 의미를 보태어 삶에 대한 깊이 있고 다채로운 통찰을 새기기도 한다. 임창민 작가의 작업실을 처음 찾았을 때 나는 거기서 ‘헬렌관’의 창과 그 시절의 사색했던 나를 만났다. 같은 장소, 같은 건물도 아니었지만 시공을 초월한 그의 작업에서 또 다른 ‘지금’과 ‘여기’를 발견하고 ‘나’를 보았고 교감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푸르렀던 시간에 대한 단상들을 떠올리며 그 ‘공간' 속에 펼쳐놓았다. 시간의 묘한 속성을 파악하고 시간의 흐름을 미세하게 담은 작가의 고마우면서도 탁월한 미디어작업은 긴 여운을 남겼다. 작가는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 자신의 삶이, 세월이, 세상이 놓여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이 유동하고 변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아야만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를 기대했다.

[Into a Time Frame 6 110X165 Pigment Print LED monitor 2014]
[Into a Time Frame 6 110X165 Pigment Print LED monitor 2014]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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