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중찬의 書三讀]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변방으로 향하는 도전과 창조의 철학

발행일시 : 2017-02-24 00:00
[안중찬의 書三讀] 최진석 &lt;탁월한 사유의 시선&gt; 변방으로 향하는 도전과 창조의 철학

“부모와 친해서는 위대해 질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을 만났다.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사람은 그냥 착한 사람일 뿐이라는 덧붙임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늦둥이로 태어나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였던 기억이 애틋하게 밀려왔다. 그것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순종의 언어였고, 혁명을 꿈꾸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외삼촌의 이야기는 두려움의 언어였다. 무작정 가출했다 고생한 이웃집 형의 참담한 이야기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것을 증명해준 교훈으로 보태져 얄팍한 기득권의 울타리 안에서 유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사람을 꿈꾸지도 않았고, 착한 아들이 되지도 못했지만 후회의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들은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지 못했던 순간들이었음을 깨달았다.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라디오방송 때문이었다. 교통 체증으로 짜증이 밀려오던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우연히 채널을 돌리는데 주옥같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선생은 건명원(建明苑) 초대원장이라고 했다. 그곳은 세월호 참사에 충격을 받은 한 사업가가 사재 100억 원을 출연해 설립한 사설교육기관인데, 북촌의 한옥 한 채를 개보수해서 운영되는 곳으로 마침 인재를 모집 중이었다. 그 이름이 ‘밝은 빛을 세우는 터전’이란 의미로 선생이 직접 작명하여 인문학·과학·예술을 아우르는 21세기의 융합형 인재 육성을 목표로 설립했다는 것이다. 시대의 스승을 찾아 방황하던 중년의 사내가 그곳을 찾아 입학 신청을 하려다 나이 제한에 걸려 포기한 것은 속상한 일이었다. 대신 책 몇 권 구입해서 읽었고, 시대를 잘 압축한 철학에 더 깊이 매료되었다.

[안중찬의 書三讀] 최진석 &lt;탁월한 사유의 시선&gt; 변방으로 향하는 도전과 창조의 철학

“우리가 접하는 모든 철학적인 저작들은 어떤 철학자가 해놓은 생각의 결과물들인데, 우리는 보통 그 생각의 결과물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면화하는 것을 철학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단언컨대 그것은 철학하기일 수 없습니다. 그 생각의 결과들이 어떤 구체적인 세계를 토대로 형성된 것인지를 이해한 후, 지금의 세계에서 나에게 포착된 시대의 문제를 지성적인 높이에서 계속 생각해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철학입니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인 것입니다.” - 319쪽

‘탁월한 사유의 시선’은 건명원 원년에 진행된 선생의 철학 강의를 엮은 책이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라는 이야기가 시종 반복된다. 박물관이 지루한 사람과, 미술관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가라오케가 불편한 사람, 축구경기가 따분한 여자, 오페라 극장에서 졸고 있는 남자, 놀이동산이 귀찮은 아빠와 날마다 놀이터에서 살고 싶은 딸은 어떻게 소통하는가를 고민하게 했다. 자신의 눈높이에 맞지 않은 현실은 불편한데, 그냥 불편하고 말 것인가? 소통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역사와 현실을 조화롭게 분석하고 쉬운 언어로 풀어낸 수준 높은 글이 맘에 들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본인과 타인의 삶의 높이를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 나름 의미 있겠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산다는 건 도대체 뭐지? 우리는 삶의 보람과 좌절 속에서 문득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생각을 끌고 갈 때가 있다. 그 순간 사유의 시선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다. 그렇게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갖게 되면 주위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발생하며, 시대의 정신으로 태어나서 그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하고 고도의 추상적인 이론으로 구조화되는 것이다. 참된 철학은 오래 전에 누군가 깨달은 위대한 생각의 결과를 이 시대의 틀에 억지로 짜 맞추는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격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 속에 있는 것이다. “장자를 읽고 기껏 한다는 생각이 장자처럼 살아보는 일인가?” 장자를 감명 깊게 읽고 찾아온 제자가 자신도 장자처럼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밝혔을 때 선생이 그렇게 반문했던 것도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처럼’ 산 사람들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말은 곧 생각을 수입한다는 뜻입니다.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은 우리가 수입하는 그 생각의 노선을 따라서 산다는 뜻이고요.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의미합니다. 생각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수출하는 사람들이 생각해낸 결과들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오히려 어려워져버리는 지경에 빠지게 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결과들은 잘 숙지하면서, 스스로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 25쪽

우리가 쌓아가는 지식은 현실의 넓고 깊은 것들을 압축한 것인데, 지식이 많다는 것은 경험과 통제력의 상승을 의미한다. 일류가 쌓아온 모든 지식은 문제 해결의 결과이며, 그것은 다른 말로 병든 것들을 치료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진정한 지식은 윤리적이며 공적인 것이다. 따라서 지식을 수입하는 나라와 그 나라의 사람들은 덜 윤리적인 환경에 놓여진다. 지식의 수입자는 지식을 진리로 오해하여 옳고 그름의 논쟁에 빠질 수도 있다. 지식을 가진 자가 지식을 갖지 않은 자보다 더 경제적이고 보다 통제력을 갖는다. 흔히 지식의 최고봉은 철학이라 말하고 철학적 지식을 예찬하지만, 철학적 지식은 수입된 생각일 뿐이다. 철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처럼 끊임없는 성장하는 생물처럼 확대되고 재생산 되어야 하는 것이다.

1760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1860년 베이징조약까지 100년 만에 동양을 굴복시킨 서양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이후 중국은 서양을 학습하기 시작했고, 일본도 그 즈음 시작된 메이지유신을 통해 철저하게 서양철학을 흡수해서 선도적으로 나아갔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고도 분노 외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우리나라는 그렇게 증오하고 무시하던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이후에야 서양철학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이 절정에 이른 1820년 대분기 국제질서는 200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유별난 성장을 하긴 했으나 최근 10년간 헛발질만 하고 있다. 철학을 35년이나 공부한 선생은 중국에서 만난 어떤 도사가 들려준 “철학이 국가 발전의 기초다.”라는 한 마디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질문지로서 이 책을 집필한 것 같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 존재하는 물건들은 죄다 수입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하고, 우리가 먼저 만든 것으로서 그나마 ‘한글’이 있어서 다행이다. 지식 수입국인 우리나라는 따라하기로 달성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인 중진국의 최상위 경지에 도달했다. 현재 우리의 모든 혼란은 우리가 중진국을 넘어설 수 없는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는 건국 혹은 정부수립의 아젠다로 고민해 왔다. 이후의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산업화 과정을 통해 짧은 시간 동안 세계가 놀랄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산업화 이후에 우리는 계급조정을 고민하게 되었으며 피와 땀으로 민주화의 목표를 거머쥐었다. 혁명적인 민주화의 성과를 통해 지구상 그 어떤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눈부신 성장을 이룩해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는 진보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 구도 속으로 들어가는 한, 우리는 그 경쟁이 벌어지는 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새로움, 고유함, 선도력은 시도되지 못합니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경쟁 구도 속에서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모두 행복하지 않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경쟁 속에서는 누구도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 262쪽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후퇴하는 기로에서 고통에 빠져들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의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것이 우리나라 문제의 근원이다. 역사를 되돌아본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겉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으나 내면의 주체성을 들여다 볼 때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탄했던 비주체적이고 비독립적인 1925년의 조선과 달라진 것이 없다. 겉으로 선진화와 개혁을 외치면서도 최근 10년간 정치적 역행은 최소 30년 이상의 역사적 후퇴를 가져왔다. 이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인가? 우리는 이 정도까지만 살아보고 만족할 것인가? 그 나마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눈치를 보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꽃핀 탁월한 가능성이 아닐 수 없다.

요새 젊은이들은 집은 없어도 차부터 구입한다. 어른들은 “집도 없는 놈이 차부터 사는 게 말이 되냐?”고 꾸짖고, 젊은이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니, 차도 없는데 어떻게 집부터 사요?”라고 반문한다. 이런 언쟁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학적으로 디노테이션(denotation)과 코노테이션(connotation)의 대립이다. 구세대에게는 그저 운송 수단에 지나지 않는 자동차가 신세대에게는 자부심과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보다 많은 사회 문제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에만 매달려 스스로의 발목만 잡고 진전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영의 논리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쉽게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다. 진실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회는 다툼은 사라지고 합의가 가능한 사회다.

선생은 또한 도덕경의 선자불변 변자불선(善者不辯 辯者不善; 탁월한 사람은 논변에 빠지지 않는다. 논변에 빠진 사람은 탁월하지 않다.)으로 사회 문제를 바라본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만큼의 제한된 지식으로 얼마든지 자신을 포장하고 남을 괴롭히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사회 갈등 문제를 들여다봐도 찬성하는 이유를 끝없이 만들어 낼 수 있고, 반대하는 이유 또한 무한하게 생산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는데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탁월한 사람은 그러한 논변에 빠지지 말고, 논변을 끊고 성큼 넘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형편없어진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서 어떤 꿈이 가능하겠는가? 자신의 꿈마저도 타인으로부터 검증받으려고 한다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안중찬의 書三讀] 최진석 &lt;탁월한 사유의 시선&gt; 변방으로 향하는 도전과 창조의 철학

“독립적 주체들은 대답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질문을 시작합니다. 대답은 주로 ‘우리’ 속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입니다. 질문은 ‘우리’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들이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대답’이 진행되는 구조를 봅시다. 대답이란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입니다.” - 124쪽

탁월한 인간은 질문을 할 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은 결국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자신의 욕망을 발휘할 수 있다.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하지만,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던 베이컨도,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한 탈레스도, ‘하부 구조가 상부구조를 구축한다’던 마르크스도 질문을 통해 진리를 찾았다. 탁월한 인간은 차원을 넘어서는 말 많은 존재이자 인문을 읽을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 시인, 미친 사람, 귀신같은 사람은 철학자와 동일시 될 수 있는 존재이며 세상에 구체화된 것으로부터 이탈하여 평범한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이는 모든 것이 궁금한 존재인 것이다.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기르던 부엉이를 호출하여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것은 철저한 사유로 이해되어 심사숙고함의 상징이라는 긍정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적절한 때를 놓치는 후회스러움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용기 없이 안전만을 추구하는 지식인이 차고 넘친다. 탁월하지 못한 지식인에게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한낮의 사건이 생소하여 곧바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정작 필요한 그 순간에 아무런 말도 행동도 표현하지 못하다가 사건이 잠잠해지고 난 저녁 무렵에야 입장을 내놓는 것을 황혼의 날갯짓으로 비유한 것인데, 버스 떠난 후에 손을 흔드는 것처럼 의미 없는 뒤늦게 이론을 들이대며 해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역사가 증명하듯 인간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동해 왔고, 달라지고 진화했다. 세상의 변화를 두려워하며 안전하게 갈 것을 권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다. 선생이 생각하는 인문이란 ‘인간이 그린 무늬’다. 인간이 그린 무늬는 해석될 수 있는 흐름이고, 인간의 동선이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직접 만질 수도 없지만 읽어지는 것이다. 자유의 추구는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 선진할 수 있고, 선진 선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창의적인 삶이다. 창의적으로 살려면 상의하는 습관보다 통보하는 습관이 강해야 한다. 결국 창의는 고독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함석헌 선생이 말씀하셨다. “그대는 그대만의 골방을 가졌는가?”

“인격적으로 상당한 성숙에 이른 사람은 혼자가 아니고, 반드시 동조자가 생긴다.” - 공자

나 하나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 보다는 나 하나라도 세상에 유의미한 존재로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 새로운 장르를 만들면 그 장르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고, 경제적인 성취가 힘을 형성하여 앞서 나가게 된다. 장르는 선도력이 되고 선진화로 연결되는 것이다. 장르를 개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꿈’이다. 우리는 가끔 스스로에게 물어 봐야한다. “나는 어떤 꿈을 꾸는가?”, “나에겐 어떤 꿈이 있는가?” 선도적인 사람은 불가능한 꿈을 꾸고, 평범한 사람은 가능한 꿈만 꾼다고 했다. 지금의 생각으로 제한된 영토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벗어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사유를 통해 예술의 경지에 이르면 반드시 동조자가 생긴다.

얼마 전 타계한 중국의 진보적 철학자 탕이제(湯一介) 교수를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다는 최진석 교수의 글을 통해 희망을 읽었다. 기존의 것을 철저하게 부정(不定)하고,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시대의 흐름을 선도(先導)하며, 기존의 것과의 불화를 자초하는 용기를 통해 종속적인 관계를 청산하는 독립(獨立),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진리를 구성하여 참된 나, 즉 진인(眞人)을 이룰 수는 있을까?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가슴에 새기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오랜 수련을 통해 가슴에 새길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면 찌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행일치적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실현 불가능에 가까운 난제이지만 선생을 통해서 내 행위 규제규칙을 만들어 실천적 도전을 다짐해 본다. 책은 멀리서 찾아온 벗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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