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유럽여행을 함께 했던 이원복 선생은 ‘세상의 편견을 깨고 싶다면 네덜란드로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취리히의 한 호텔 바에 앉아 주당인 선생이 따라주던 과도한 위스키 때문에 정신이 다소 몽롱한 상태로 대충 흘려들었을 법도 한데 적어도 그 말씀만큼은 가슴에 남았다. “그 나라는 성매매, 낙태, 안락사, 동성애, 마약을 허용한 나라다. 이 다섯 가지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지극히 개인의 문제인데 우리나라는 모두 법으로 금지시켰다. 우리는 이제 공동체 가치 중심에서 벗어나 시민 중심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매우 보수적인 선생으로부터 극히 진보적인 조언을 들은 이후로 네덜란드는 가슴 뛰는 로망으로 자리 잡았다. 네덜란드를 꿈꾸게 되었다.

처음 인식한 네덜란드는 헨드릭 하멜이었다. 17세기 중반,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한양 땅으로 이송되고 전라도에 유배되었다가 탈출한 청년이 남긴 13년 20일의 기록은 매우 흥미로웠다.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무역선 스페르베르 호가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다수가 사망하고 생존자 수십 명이 억류된 사건이었다. 그들을 관리 감독하고 통역한 조선의 관리는 ‘박연’으로 그 역시 네덜란드 출신인데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였다. 그 역시 비슷한 사고로 오래 전에 조선 땅을 밟았고 억류되었는데 병자호란에 참전했다가 일행은 모두 죽고 홀로 남아 모국어를 거의 까먹은 상태였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조선 여인과 가정을 꾸려 정착한 사람이었다.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고 믿었던 조선인들에게 그렇게 지구 반대쪽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연히 찾아온 것이다.

“1655년 3월에 전에 말한 청나라 칙사가 다시 왔다. 우리는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청나라 칙사가 떠나던 날 암스테르담 출신의 일등항해사 헨드릭 얀스와 할렘 출신의 포수 헨드릭 얀스 보스가 땔깜 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숲 속으로 가서 청나라 칙사가 지나가기로 되어 있는 길에 숨어 있었다. 수백 명의 기병과 보병의 호위를 받으며 그가 지나가는 순간, 얀스 일행은 그들 대열 사이를 뚫고 들어가 칙사가 탄 말의 고삐에 매달렸다. 조선옷을 벗어 버리고 네덜란드 복장으로 청나라 칙사 앞에 서 있었는데 곧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다. 청나라 칙사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말이 통할 리 없었다. 그는 우리 항해사더러 그가 저녁에 묵을 곳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호위한 사람들에게 항해사의 말을 통역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고 곧 벨테브레가 왕의 명령으로 오게 되었다.” - 51쪽

서울에 억류되어 있을 때, 일등항해사를 포함한 두 사람이 조선옷 속에다 네덜란드 옷을 껴입고 숨어있던 청나라 사신 앞으로 시위하듯 뛰쳐나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처음 탈출 시도는 억류 9개월 만에 제주도에서 배의 구조를 이해 못해 돛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실패했었는데, 다시 붙잡혀 마치 옥중 춘향이처럼 목에 두꺼운 널빤지로 칼이 씌워지고 쇠사슬로 포박당하는 형벌을 받아야만 했었다. 서울로 압송된 후 단행한 두 번째 탈출 시도 또한 실패로 끝났다. 이 일이 청나라 황제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 한 조선에서 사신에게 뇌물을 먹여 없던 일로 만들었고, 하멜 잔당은 동료가 도망친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궁으로 끌려가 곤장 50대를 맞았다. 감시와 체형의 위협은 더욱 엄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사신 앞에서 소란을 피운 두 사람은 얼마 뒤 서울 감옥에서 죽었다는데 처형당했던 것인지 자연사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신하들의 강력한 처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왕과 동생의 배려로 하멜 일행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8년간 볼모생활을 경험한 재위 7년차(1656년)의 효종 임금은 깨어 있는 정신으로 끝까지 하멜 일당을 옹호하고 필요로 했으나 또 도망갈지 모른다면 엄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 때문에 유배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30년 전에 조선에 입성한 박연(벨테브레)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유배를 떠나던 그때였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입성하여 3년을 교유한 박연은 이미 환갑 즈음의 노인이었고 그의 생몰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하멜 일행이 유배되어 7년 간 머물렀던 곳은 강진만에서 멀지 않은 전라 병영성이었다. 하멜이 입성하기 정확히 60년 전 병신년(1596년) 여름에 정유재란을 앞둔 이순신 장군이 원균을 만나 밤 깊도록 대화를 나눴으며 그의 흉포를 추상적으로 언급한 기록이 고스란히 난중일기에 남아 있는 군사요충지였다. 지금은 쇄락한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으나 북으로 개성상인과 쌍벽을 이루던 병영상인들의 본산으로 풍성했던 역사 공간이다. 삼 년 뒤 1659년 봄에 효종 임금이 죽고, 그의 아들로 조선의 18대 왕 현종이 즉위했으나 더 이상 왕과의 인연은 닿지 않았다. 하멜 일행은 병영성에서 비교적 평화롭게 적응했고 마을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는데 특히 스님들과 교유하는 시간을 행복하게 기록했다. 스님들은 관대했고 다른 나라 풍습에 관심이 많아 밤새도록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고 전한다.

“1657년, 연초에 절도사는 직무상 과실 때문에 왕의 명령에 의해 다른 곳으로 전출되었다. 그는 생명까지 위태로웠으나 백성으로부터 흠모를 받고 있었고, 고위층의 개입과 명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사면을 받아 더 고위직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나 백성들에게 그는 참 잘해 주었다. 2월에 새 절도사가 부임했는데 전임자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주 일을 시켰다. 전임자는 땔감을 지급해 주었는데 신임 절도사는 이 특혜를 없애 버려서 우린 스스로 나무를 해 와야 했다.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산을 넘어 20km 정도 가야 했는데 몹시 힘이 들었다. 그러나 9월에 그에게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가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이다. 그는 가혹한 통치를 했기 때문에 우리와 백성들은 모두 기뻐했다. 11월에 조정에서는 신임 절도사를 파견했는데 그는 우리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 57쪽

절도사는 수시로 바뀌었다. 하멜이 기록한 당시 조선의 행정은 지방 관찰사의 재직기간이 1년이며, 다른 지방 관속들의 임기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3년이라고 했다. 다만 그들 대부분이 재직 기간에 저지른 비행 때문에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하멜은 자신의 기록에서 매우 깊이 있는 조선 문화의 통찰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백 년이 흐른 뒤 병영성 안쪽으로 왜정 때 개교한 병영국민학교가 자리를 잡았다. 문민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학교를 남쪽으로 이전 시킨 뒤, 성의 옛 모습을 복원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예산 탓인지 20년 이상 공사가 진행 중이다. 21세기 들어 전라 병영성 인근에 위풍당당 풍차와 함께 하멜기념관도 만들어졌고 네덜란드에서 공수된 하멜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하멜촌 조성 등의 기념사업이 새롭게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들이 처음 난파되어 도착한 제주도 산방산 해안 언덕에 하멜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1980년 가을의 일이다. 하멜은 제주도에 대해 인구는 조밀하고 땅은 비옥하고, 본토 남쪽으로부터 75km 내지 95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 주위는 110km 정도 된다고 기록했다. 제주도에서 10개월쯤 머문 뒤 말을 타고 서울로 소환되었는데 육로와 수로를 포함해서 650km의 거리를 14일간 이동했다고 진술했다. 서울에서 3년 동안 관습에 따라 살았고 훈련대장의 호위병으로 고용되어 일정량의 쌀과 옷을 배급받아 생활했다고 고백했다. 조선에서 마지막 3년을 보낸 곳은 전라좌수영 여수였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지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 거북선이나 판옥선들이 해상을 누비고 있었고, 하멜은 그에 대한 기록도 세세히 남겼다.

“남자는 아내가 이미 몇 명의 자식을 낳은 뒤라 해도 내보내고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법이 허용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남자는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다. 또 마음이 내키면 기생의 집에 갈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비난을 받지도 않는다. 정실부인 한 사람만이 집 안채에 살며 살림을 꾸려가고 다른 첩들은 다른 곳에서 따로따로 산다. 양반이나 고관들은 대체로 두세 명의 아내를 한 집에 데리고 사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집안 살림을 꾸려 간다. 각각의 소실은 자기 자신의 거처를 가지고 있으며 주인은 마음이 내킬 때 이곳을 방문한다. 이 나라에선 아내를 마치 여자 노예처럼 다루며, 사소한 일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다. 남편이 아이들을 맡고 싶지 않다면 쫓겨난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 이 나라의 인구 밀도가 높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126쪽

하멜 일행은 폐쇄적인 이교도의 나라 조선에서 대체적으로 잘해 주었지만, 자신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벌을 주기도 했으니 언제나 탈출을 꿈꿨다. 대만을 출발해 나가사키로 가던 스페르베르 호가 폭풍우를 만나 화물과 대포는 모두 잃어버리고, 전체 64명의 선원 중 28명이 죽고 36명이 억류 되었었는데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청나라 사신 앞에서 탈출을 시도한 2명이 죽고, 병영에서 11명이 죽고, 가뭄과 기근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여수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 분산 수용되었다. 하멜 기준으로 제주-서울-병영-여수를 거치는 동안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록에 남지 않은 7명의 사망자가 또 있었으니 최종적으로 16명이 생존해 있을 때 마지막으로 세 번째 탈출 계획이 수립되었다. 실패할 수도 있어서 연락을 취하기 마땅찮은 절반을 포기하고 여수의 5명과 순천의 3명 등 모두 8명이 탈주를 결행했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야음을 틈타 탈출에 성공한 것은 1766년(현종 7년) 가을이 일이다.

탈출을 도와주고 나가사키로 가는 뱃길을 안내해 준 사람은 물론 친절한 조선인이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머문 기간은 13년 20일이었다. 여수에서 고토를 경유하여 나가사키까지 다시 만8일이 걸렸으니 종합해서 그들은 13년 28일을 표류했던 것이다. 하멜은 1630년 8월 20일생으로 스물세 살부터 서른여섯 살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미지의 세계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다. 하멜이 기록을 남긴 것은 탈출 2년 뒤인 1768(현종 9년)년의 일이다. 하멜의 기록에는 탈출에 가담하지 못했던 나머지 8명이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그가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암스테르담에 돌아갈 즈음에 조선 조정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되어 귀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근 20년 만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간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692년 2월 12일에 고향 호르쿰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선 왕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항로를 서쪽으로 남경만 북위 40도 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거기서는 커다란 강이 바다로 흘러간다. 이 강은 서울에서 3.5km 정도 뻗어 있는데 이곳을 통해 국왕의 쌀과 기타 물자가 커다란 정크선으로 운반된다. 창고는 강 상유로 약 70km 지점에 있으며 거기에서 모든 물자가 달구지로 수도에 운반된다. 국왕은 서울이라는 도성에 궁전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귀족과 중국, 일본 등과 거래를 하는 대상들이 이곳에 머무른다. 모든 상품은 먼저 서울로 운반된 뒤에 전국으로 소매된다. 이곳에서의 거래는 대부분 은으로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거래를 고관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도시나 시골에서의 거래는 포목과 곡물로 이어진다. 조선을 서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동해안과 남해안에는 만의 안쪽과 입구에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절벽과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 141쪽

하멜이 조선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것은 문학작품이나 학자적이 목적이 아닌 억류된 기간 동안 밀린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본의 정확한 제목은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호의 생존선원들이 코레왕국(조선)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제주도)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 - 네덜란드령 인도총독, 요한 마짜이케르 각하 및 형의원 제위 귀하’로 되어 있다. 16세기 포르투갈 선원들은 제주도를 해적섬이라 불렀고, 네덜란드인들은 켈파르트 섬이라고 불렸다. 네덜란드어로 켈파르트(Quelpart)는 당시 범선의 한 유형을 가리키며 네덜란드인은 그 이름을 따서 이 섬을 명명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하멜은 억류기간의 밀린 임금을 받지 못했고, 약간의 위로금을 받았을 뿐이다.

하멜의 기록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3개 출판사에 의하여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그가 미처 고국에 돌아오기 전에 돌고 돌아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학식이 높지 않은 평범한 젊은이의 정제되지 않은 문장으로 비교적 정직하게 기술한 것을 동방의 미개한 나라 조선의 이야기가 흥미 위주로 편집되어 가십거리처럼 황당무계한 내용 및 엉뚱한 삽화들과 함께 널리 퍼졌다.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스테디셀러가 되었는데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이야기가 정작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6월에 잡치 ‘청춘’에 실린 육당 최남선의 번역을 통해서였다. 1920년, 왜곡된 정보와 허구성을 지적하고 고증을 통해 기록을 바로 잡은 사람은 역사학자 후틴크(B. Hoetink)였다. 처음 기록이 발표된지 250년이나 흐른 뒤의 일이다.

역사는 현대 사회의 거울이라고 했다. 나라에 큰일이 닥칠 때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도 견딘 민족인데 무엇을 극복하지 못할까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열강들 틈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의 모습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명나라 사신을 대하는 임금과 조정의 태도에 대해 하멜은 너무도 자존심 상하고 창피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여기에 옮기고 싶지 않았다. 하멜의 관점을 현대로 옮겨 보면 무능한 정부가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수용하는 방식이나 한·일 일본군 위안부 졸속 협상을 수행하는 외교 현실을 지켜보는 외신기자들의 시선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할 수 없지만 하멜의 시대에 우리도 일본처럼 유럽과 교류를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우리의 현실에서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상상이다.

하멜이 7년이나 머물렀던 병영은 내 고향이다. 하멜기념관이 들어선 곳은 전쟁 때 불타버린 아버지의 양복점이 있던 자리이며, 하멜이 땔감을 찾아 나섰던 수인산은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벽안의 이방인들을 환대하고 우정을 나눴던 스님들의 사찰은 아마도 수인사였을 것이다. 유난히 다리가 길고 푸른 눈을 가진 머리색깔도 노르스름한 그 묘한 분위기의 어떤 고향 사람의 조상은 누구였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하멜이 지적한 우리의 부끄러운 민족성과 나쁜 점들이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쑥스러운 현실 인식이다. 물론 조상들의 너그러운 성품과 제도, 지혜들을 발견하는 소소한 기쁨도 있었다. 부끄러운 역사는 반복되지 않으면 된다. ‘세상의 편견을 깨고 싶다면 네덜란드로 가라.’던 이원복 선생의 말씀을 아직도 결행하지 못하고 있으나 하멜표류기를 통해 오래된 미래를 읽었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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