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내가 내 발등을 찍고 싶다’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은 죄 아닌 죄의 대가라고 하기엔 참으로 억울하고 참담하다.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눈 막고 귀 막고 마음까지 닫은 결과이다.

우리를 현혹하는 온갖 현란한 문구와 화려한 이미지들이 부유하는 세상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본질을 착각해 이와 같이 자기 무덤을 파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미지와 환영에 눈이 멀어 그르친 일들이 현실 생활의 다반사다. 아수라장 같은 세상의 본질을 직시하고 영혼의 자각을 통해 자기성찰을 이루라는 메시지는 다종다양한 매체를 통해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들려온다.

작가 최수환의 메시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그의 메시지는 진부하지만 엄청난 내공과 메타포로 무장한 그의 전달방법은 아름답고도 역설적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빨리 눈치 채지 못하긴 하지만 그의 작품이 내뿜는 아우라는 우리를 깊은 사색에 서서히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큰 소리로 묻는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까?’ 공허한 울림만이 적막을 가른다.

Installation view
Installation view

‘빛’이라는 비물질을 매개로 독특하고도 창의적인 시각이미지를 구현하는 최수환 작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라이트 아트(Light Art)’ 작가이다. 광원자체의 효과를 이용하여 사물의 실제성을 다룬 'Emptiness' 시리즈는 빛의 근원적인 속성에 다가가는 감각적 체험을 제공한다. 빛의 이미지로 새로운 조각적 가치를 창조하는 작가의 작품 속 수 많은 구멍들은 물리적으로는 ‘비어 있음(emptiness)’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시각적으로는 ‘이미지(image)’로 표현된다. 빛에 의해 가장 실제적인 동시에 가장 비실제적인 공간으로 표현되는 모순을 드러낸다.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입체화하는 매개체로서의 빛은 내부공간에서 발산되어 구멍의 크기, 위치, 숫자에 의해 다각도로 변하는 가시적인 이미지와 패턴을 만들어낸다. 무작위로 타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례와 대칭이 절묘하게 조합된 패턴 이미지는 형식의 자유로움과 감각의 순수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작가가 표현하는 이미지는 유년 시절의 기억, 신체의 일부분 등 자신과 연관된 소재로 부터 전등, 생선, 식물, 물방울, 액자, 도자 등 생활 주변의 친숙한 오브제까지 망라한다. 다양한 크기의 구멍에서 발산하는 빛이 작용하여 관람객의 움직임의 방향에 따라 오묘하게 변하는 이미지들로 인해 신비로우면서도 침잠하는 사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가 아닌 이러한 시각적 환영은 각인된 이미지를 작품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비어 있음’의 자각을 통한 자아성찰을 유도한다.

Emptiness_light bulb_GR 84x84x8cm Plexiglass LED 2009
Emptiness_light bulb_GR 84x84x8cm Plexiglass LED 2009

최수환 작가의 작품에서 나비의 이미지를 보았다면 사실은 나비는 실재하지 않고 수만 개의 구멍들을 통해 비추어지는 빛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액자이미지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화려한 액자의 틀(프레임)에 많은 관심과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자신들은 지금 액자를 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 속에도 역시 액자는 존재하지 않고 수 천 수 만 개의 구멍들과 빛만이 존재할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액자 틀 안의 텅 빈 공간이다. 프레임이 세밀하고 화려할수록 내부의 텅 빈 공간이 더욱 부각된다. 결국 타공된 구멍들로 이루어진 화려한 이미지(액자)와 검정 바탕의 빈 공간(액자 내부)이 극적으로 대비됨으로써 마치 3차원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 같은 환영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실재하지도 않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지거나 오해하고 있는 일이 빈번하다.

작가가 천착하는 빛(light)의 공간과 이미지는 우리들이 범하는 오류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오류로 인해 발생되는 편견과 부조리를 과학과 예술로서 답해준다. 그의 작품은 시각적 환영을 수반하는 차분하면서도 평온한 명상적 미를 통해 우리가 실재라고 여기고 있는 실제공간의 ‘비어 있음’을 인식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Emptiness_bw 124x124x3cm LED Plexiglass 2012
Emptiness_bw 124x124x3cm LED Plexiglass 2012

‘빛의 예술’을 뜻하는 ‘라이트 아트’는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미술운동으로서 빛의 효과를 극적으로 살려 새로운 시각이미지를 창출해 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총칭한다.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을 추구하는 라이트 아트는 광선의 물리적 기능이라든가 광원자체의 효과를 주로 다룬 작품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의 키네틱 아트로서 수많은 실험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라이트 아트의 최근 작업들은 개념적으로는 더욱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어도 기술적인 면에서는 감상자가 쉽게 접근하고 또 이해할 수 있도록 보다 대중적인 표현형식을 추구한다.

최수환 작가는 검정색 아크릴 판(plexi-glass)이나 검은 종이(museum board)에 전동 드릴을 이용해 수직으로 다양한 사이즈(0.4~3mm)의 수 만개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후방에서 빛을 투과시킴으로써 빛으로 드로잉을 하듯 작품을 완성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발산되는 빛은 빛줄기의 양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도록 의도된 아크릴 판의 두께와 구멍의 크기에 의해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이미지로서 구체화되고 명료한 색채를 띠게 된다. 점과 구멍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빛의 경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우주공간에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초기에는 주로 형광등을 이용했지만 형체와 색이 자유로운 LED가 등장하면서 작가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보다 다채로운 구상에 바탕을 둔 작품을 창조하고 있다.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넥스트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