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문 앞에 선 두 명의 더벅머리 학생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침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지라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들으며 몇 정거장을 가게 되었다.

"야 인제 나라에서 그냥 국민들한테 얼마씩 준대"
"뭔소리야. 뻥치지마"
"진짜래. 이제 인공지능이 일 다 대신해주면 사람들이 필요가 없잖아. 회사나 공장은 인공지능이 일하니까 더 잘 돌아가고. 그러니까 일자리는 없어지는데 사람들이 실직해서 돈을 못 벌면 물건을 못 사잖아. 그러니까 물건 사라고 국가에서 돈 준대. 그래야 경제가 돌아갈 거니까"
"진짜? 그럼 취직 안 해도 되겠네. 언제부터? 많이 준대?"
"몰라...."
"야 그게 금방 되겠냐. 뭐 되도 우리와는 관계없는 소리 같다"
"그.. 그런가"
"근데 너 알바 구했어?"
"아..아직"
"알바나 구해!”

실눈을 뜨고 짐짓 안보는 척 올려보았다. 고교생 둘이 하는 이야기 치고는 제법 수준이 있다. 어디서 기본소득 이야기를 듣고 와서 나름 심각하게 이야기 하는 거다. 기특하게도 인공지능이 뭔지도 알고 있다. 아직까지 실현될 이야기가 아니라고 자체 결론까지 짓는 모습에 웃음이 픽 나왔다. 떠들던 아이들이 내리고 지하철 안은 조용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 머리가 복잡해졌다. 딱 내 아이 세대의 이야기가 될 텐데. 그리고 그렇게 먼 이야기 아닌데.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기본소득 개념이 조금은 낯설고 멀게 들릴 수 있다. 작년부터 유럽발로 심심치 않게 들려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편향적으로 출발했다. 객관적인 이해보다 정치적 호불호의 논쟁으로 부각되어 말하기 조심스러운 주제가 돼버렸다.

2017년 현재 기본소득 개념은 찬성보다는 익숙하지 않아 거부감이 더 강하다. 경제적 효과에 대한 예측과 개인적 신념의 문제가 얽혀 논쟁거리이자 민감한 주제가 돼 논외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나 피해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IT 기술을 기반한 혁명적 변화를 맞이할 미래의 어느 시점에 현실화될 거라면 반드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한다. 지하철 안에서 학생들이 이야기한 뭘 모르는듯한 이야기가 바로 핵심이다. 그래서 기술을 주도하고 있는 거대 글로벌 기업들이 고민하는 바이다.

산업혁명과 함께 인류의 경제 구조로 편입한 자본주의의 공헌은 어마 어마 했다. 잉여 생산은 절대 빈곤을 해결한 일등공신이었다. 자본주의 제도는 분명히 잉여생산을 독려하는데 최적이었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분명히 있었다. 분배의 문제다. 그래서 학문과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늘 도마 위에 올랐다. 누군가 생산도 중요하지만 분배가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라 치면, 경제가 아닌 정치적 공격으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정치적으로 경직된 사회일수록 더욱 그랬다.

어찌되었건 역사는 자본주의의 손을 들었고 현재 진행형이다. 21세기 지구상에서 대부분의 경제구조는 자본주의가 주류이다. 그리고 분배의 공정성은 그 나라의 정치 수준과 연계돼 다양한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

자본주의 기반에 얹혀진 IT기술은 생산성은 높아만 지고 산업은 저비용 고효율 대량 생산구조를 추구하고 있다. 생산에 있어 가장 큰 비용요소는 인건비이다. 어느 순간 인공지능과 로보틱스는 사람이 없이도 생산을 해낼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적은 비용, 더 많은 생산은 어마어마한 부를 이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한 세상에서 소비할 돈을 벌지 못하게 된다. 이미 직업이 사라지거나 대체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차원으로 사람의 할 일은 생겨난다. 그러나 그 경험과 필요한 지식은 기존 세대의 것은 아니다. 필연적으로 단절되는 세대가 생긴다. 30년쯤 뒤가 될 것이다. 바로 지금의 젊은 세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공지능과 로보틱스에 힘입어 생산된 잉여의 부를 기본 소득의 형태로 되돌려 소비력을 유지시켜 현존하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지속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참 당황스럽다. 자본주의의 근간은 무노동 무임금이니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지키기 위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흔히 분배를 더 잘해보자고 주장하는 복지 개념에도 수세적인 입장이었는데 말이다.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한 무상 분배라니 선뜻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아이디어이다.

게다가 아무리 IT기반의 산업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되어 실제로 비용이 줄고 생산수준이 더 늘어난다고 해도 과연 늘어난 잉여를 어떤 방식으로 기본소득으로 돌릴 수 있을까? 누가 이것을 주도할까? 어떤 기준으로? 기업의 기여분은 공정할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분배 정의가 필요한데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오랜 기간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이 무리 지어 편을 갈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여전히 난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제는 결정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IT는 일단 산업화 되면 시장에서 반성과 조정을 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냉혈하게도 성큼성큼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간다. 해결책을 내지 않으면 구조가 주저앉게 생겼다. 논쟁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다. 법과 제도가 그 결과물의 사회적 적용의 속도를 때로는 제어하고 제대로 조정해 주도록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산업 고도화의 그늘에서 돌이킬 수 없는 피해자들이 더 광범위하고 빠르게 스러져 갈 것이다. 직업을 잃고 바뀐 생활패턴에 적응을 해야 할 우리 다음 세대들의 모습이다.

기술수준이 궤도에 올라 산업에 본격 적용되기 전에 제도적인 준비는 우리 세대가 시작해야 한다. 공공선과 정의의 원칙에 근거한 분배시스템이 해당 사회에 얼마나 자리를 잡았느냐가 IT 산업 사회에서의 잉여생산이 인류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겠는지를 답해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회가 가져야 할 가장 큰 가치는 절차와 소통에 비밀주의가 없는 공개주의이다. 이 사회에서는 신뢰가 정의의 키워드다. 실업이라는 큰 희생으로 줄여놓은 생산 비용이 신뢰가 부족해서 갈등과 불신이라는 더 심한 비용구조로 정착된다면 그 기술은 존립해서는 안 된다. 시행착오의 비용과 불안감 역시 신뢰수준에 따라 낮아질 수 있다. 실수를 격려하고 교훈으로 활용하는 분위기는 사회적 관용 혹은 성숙도를 높인다. 바로 이것이 사람 중심 IT 사회의 지향점이다.

18세기 신분제 철폐도, 19세기 노예해방도, 20세기 여성 참정권도 그 직전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던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IT화도 우리 시대의 혁명기를 가져왔다. 패러다임을 바꿔가는 IT화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바로 잡아가야 할 것들을 냉철한 책임감으로 이뤄내야 한다. 그것이 좋던 싫던 시대를 이끄는 주역의 왕관을 쓰는 자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의 몫이다.

노수린 suerynnroh@gmail.com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언론홍보 석사, MBN 기자, KTF 해외마케팅과 플랫폼 기획팀장을 거쳐, IoT스타트업 운영과 컨설팅 및 교육 강의를 해왔다. 현재 한림대 사회학과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IT는 사람의 행복과 가치추구를 위해 서비스와 콘텐츠로 관계를 연결하는 장치라 생각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용한 오픈 IT를 기반으로 사용자UX가 주권처럼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많은 이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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