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는 어디일까? 도시로 모든 것이 집중되면서 급속도로 진행된 농어촌공동화 현상은 일시에 수많은 시골 학교들을 통폐합시키는 우를 범했다. 전국 초등학교 숫자는 현재 6,000개 안팎으로 학생 수에 따라 존폐의 위기가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가 된다는 것은 폐교 1순위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가장 작은 학교로 주목을 받다가 소멸되어버린 학교는 그 학교 졸업생들에게 큰 상실감을 줄 것이다. 관리의 효율성이 낳은 사회악이다. 남설악 오색초등학교가 9년 전 폐교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 학교 제 9회 졸업생인 한 남자가 딸과 아들, 조카들을 몇 년 동안 줄줄이 입학시키면서 모교의 폐교를 막았다. 오늘은 바로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한 세기가 지나가던 마지막 여름이었다. 무더운 한낮에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중절모를 쓴 낯선 사내가 외근에서 돌아온 나를 반기며 미소 지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어색한 눈인사와 함께 목례를 하고 머뭇거리는데 “안중찬 선생이시죠? 정덕수입니다.”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정덕수, 한때는 목원이라 불리던 지금은 가난한 선비라는 의미의 한사(寒士)라는 아호로 불리는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릴없이 인터넷 공간을 헤매이던 나에게 가슴 절절한 시어들을 뿌려주던 시인이 아니던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정처 없이 마음가는대로 바람처럼 허물없는 그 발걸음이 거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날 사무실 앞 충무로쭈꾸미 집에서 소주 몇 잔 나눈 이후로 우리는 어느덧 형제가 되어 있었다.

첫 봄이 새싹 움 틔워 오면
비를 맞으며 들길을 걷고 싶어
삶의 찌든 나이테를 지우며
타박타박 당신에게 걸어가
기다림의 꽃들을 피워내고
부당하게 당했던 그 시절을 이제 지우고

늦은 인사를 할 당신에게
“내 먼저 행복의 꽃을 보았느니라”
정중히 인사하고 싶다

온통 이름 모를 것들이
안개바다의 부유물로 떠돌다
우리들 때 절은 안부 사이에
곱게 꽃 봉우리를 틔우면
균형을 이룬 정담을 나누고 싶다
- 11쪽, ‘봄비에 부치는 노래’ 중 압 부분

시인의 전화는 늘 반가웠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소주 한잔 생각난다 말하면 소주를 마셨고, 막걸 리가 생각난다 말하면 막걸리를 마셨고, 커피가 생각난다 말하면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허물없는 만남이 반복되었다. 20대 후반 청년과 30대 후반 총각이 만나서 아무런 주제도 없이 맥락도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잘 나가는 어른들 흉도 보고, 못 나가는 아이들 걱정도 하는 시간들 속에서 매우 사적인 연대를 강화시켜 나갔다. 시인은 언제나 주거가 불분명했다. 남양주인가 싶다가도 서교동에 살았고, 서교동인가 싶으면 이태원에 있었으며, 양재동과 만리재 어딘가를 수도 없이 오가는 떠돌이의 삶을 살고 있었다. 시인은 몹시 가난했지만 여유로운 미소가 있었고 매사 긍정적인 자유로움으로 어디서나 당당했다. 그 털털한 웃음과 행복 가득한 표정 뒤에서 그늘을 발견하고 대도시와의 불화에 지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한 번은 심야 영화를 함께 보기로 했는데 어떤 여인과 함께 나왔다. 연애와는 담을 쌓고 지내던 시인이 단아하고 수즙은 미소의 여인과 함께 나타난 것이 매우 신기했다. 시인이 사랑에 빠지면서 우리의 만남은 다소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불러낼 수 있던 시인에게 후순위로 밀렸다는 것에 일종의 질투심마저 들었다. 몇 달이 흐른 후 어느 토요일, 나이 많은 두 닭살커플이 찾아와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을 때 명동의 단골식당으로 모시고 갔다. 시인과 그의 연인은 자신들 몸집만한 배낭을 들쳐 메고 들뜬 표정으로 그저 산에 간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종주쯤을 예상했지만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산장 ‘한계령에서’라는 간판을 걸고 민박집을 한다는 소식은 한참 뒤에 들려왔다. 시인은 그렇게 고향 오색에서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인을 만나기 위해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냥 동서울터미널로 향했다. 때때로 운전하는 친구를 유혹하여 44번 국도를 타고 마냥 한계령을 넘기도 했었다. 운전면허도 없는 주제에 그렇게 자주 남설악을 찾은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주 찾았다. 홍천과 인제의 주변 풍광을 완벽하게 머리에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되는 동안 지속된 방문이었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한계령에서 잦았고, 직원들 야유회도 한계령에서 즐겼으며, 가족 여행도 한계령에서 보낼 만큼 자주 찾았다. 안터마을에 자리한 시인의 산장을 찾아 그곳에서 숙박하며 망경대와 비선대, 주전골을 자유롭게 넘나들던 기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일손이 잡히지 않으면 그냥 전화를 걸었다. 시인의 전화번호 뒷자리는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 해발고도와 같은 1708로 끝난다.

40여 년 전, 오색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시인은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청계천 봉제공장 노동자로 취직했다. 전태일 열사의 뜨거운 숨결이 채 가시지 않은 여전히 열악한 주6일 근무 이상의 강도 높은 그 노동의 현장에서 주경야독하는 노동자로 살았다. 감성 깊은 시인은 ‘한계령에서’라는 제목의 연작시 모두 스무 편을 남겼는데, 서사성이 은은하게 깔린 참으로 애절한 서정시다. 하나하나가 결코 짧지 않은 그 시리즈만으로도 한 권의 시집을 구성할 만큼 장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은 1981년 10월 3일 한계령휴게소 오른쪽 가파른 언덕을 한 시간쯤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너른 바위 인근에서 시작되었다. 맑은 날에는 멀리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일 바로 그 서북능선에서 안개구름을 뚫고 산행하다 발길을 멈추고 젖은 몸으로 서럽게 울먹이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연상된다.

날짜를 보고 추측컨대 개천절 휴일을 맞아 마침 다음 날도 일요일이고 하여 모처럼의 여유를 갖고 고향에 내려왔다가 이 시를 쓴 것이다. 한 남자가 고향 산을 걸으며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를 안타까워하면서 동시에 어린 시절 헤어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날의 날씨만큼 젖은 감정이 물씬 풍겨나고 있다. 꽃다운 나이라고 말하기에 시인은 너무도 가슴 아픈 시절을 견뎌왔던 것이다. 놀랍게도 이 시를 쓰던 시인은 아직 주민등록증도 안 나온 고작 열일곱 살 청소년이었다. 지금도 종종 시인을 만나면 “어린 녀석이 산에서 불법으로 담배를 피웠는데 왜 안 잡혀 갔을까?”라며 버릇없이 놀려 먹는 사연이다.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수즙은 소년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낭송한 그 시는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렇게 아무런 대가 없이 퍼져나간 이름 없는 소년의 시는 원작자의 허락 없이 3년 뒤 국민가수 양희은의 목소리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훗날 시인이 세상에 나와 명예를 되찾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국민가요 ‘한계령’의 원작시인이 10대 노동자였음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원작시의 2,3,5연에서 부분 선택하여 조합된 곡으로 무단 도용하는 과정에서 울지 말라는 의미의 ‘우지마라’가 ‘오지마라’로 잘못 해석된 헤프닝도 바로 잡았다. 조용필의 8집 앨범에 수록된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이 시의 구성이나 길이가 절묘하게 닮았는데, 두 곡을 완전한 형태로 놓고 직접 비교해보면 확인되는 사실이다.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육천오백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메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84쪽, ‘한계령에서’ 전문

비록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시인은 2016년 11월 중순부터 벌써 135일째 광화문 광장을 지키며 노숙 시위 중(참고: blog.daum.net/osaekri)이다. 광장의 대형 촛불이나 여러 미술품 설치와 관련된 모든 것에 때때로 목수생활로 밥벌이하는 시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은 없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충무로에서 시인을 만나 봄꽃이 시작된 남산길을 함께 걸었다. 15년 전 시인의 결혼 선물로 시집 ‘한계령에서’를 제작했던 도서출판 발자취의 발행인으로서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방황을 시작하는 동안 시인의 시집도 다른 출판사를 통해 복간하는가 싶었지만 결국 절판되고 말았다. 조만간 시집을 다시 낼 수 있도록 마땅한 출판사를 알아봐 주겠노라 약속하고 헤어지는 발걸음이 무겁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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