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저 꽃은 어디에서 왔을까? 겨우내 볼품 없던 나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새순이 돋고, 꽃눈이 자리를 잡는다. 꽃봉오리로 자라더니 마침내 번데기를 뚫고 나온 나비처럼 화려하게 등장한 봄꽃들. 봄비 한 번에 우수수, 점점 올라가는 기온에 후두둑 가엽게 지고 말지만, 1년 뒤 다시 만날 기대로 아쉬움을 매번 접는다.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를 제외하고, 개성 없이 가는 팔다리만 내놓고 있으니 겨울 산의 나무들은 거기서 거기 같다. 봄이 와 꽃이 피면, 그제서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존재감이 드러난다. 이것은 마치 아무 것도 없던 자리에 불현듯 나타나는 신기루 현상 같다. 분명 아무 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드러나고, 순식간에 사라지고.

분명 산 위의 나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빈 화선지와 같았다. 그 위에 붓으로 점을 찍듯 봄에 잠시 드러났다가 여름 동안 푸른 잎들로 채워져 새로운 빈 화선지가 된다. 가을이 오면 오색 빛깔 단풍잎으로 비어 있던 화선지에 물이 들고 나면, 겨우내 다시 비어 있는 자리로 돌아간다.

있는 것 같으나 있지 않은, 보이는 것 같으나 보이지 않는 우리의 세계가 자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호더(hoader)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기 몸 하나 누울 곳을 제외하고, 방이며 집이며 온통 물건들로 넘쳐난다. 대부분은 사용하지도 않은, 혹은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잡동사니로 채워진 공간이 비워지기 시작하고, 보이지 않았던 빈 공간이 말갛게 드러난다. 방방이 제 본연의 기능을 되찾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물질적으로는 필요 없는 물건을 말끔히 치웠을 뿐인데, 비우고 나니 심리적인 보상이 가득 채워진다는 것이다. 비우고 채우는 것은 반대말이 아니라 같은 말이다. 물질적인 비우기와 채우기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한다. 채운다고 가득 메우는 것이 아니며, 비운다고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을 발휘해 호더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수선하고, 복잡하면서, 무너지기 십상인 그런 공간에서 오래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채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맛과 향과 같은 직접적인 체험은 예외로 하고, 그곳이 주는 심리적인 보상에 대리 만족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적당한 데시벨의 백색 소음(white noise)은 집중력을 높인다. 카페 인테리어는 적당한 거리와 배치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공간 전체에 구미를 당기는 향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아로마로 인해 신체가 편안해지고, 마음이 안정된다.

채우기와 비우기의 연속적인 이 카페 공간이 하나의 모티브로 작용해 '내 집을 카페로’와 같은 분위기로 바꾸는 집들이 많다. 인테리어의 경향은 매년 변하고 있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진행 방식은 얼추 비슷하다. 불필요한 짐을 버리고 처분한 후 정리하고 청소한다는 것.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정리와 수납의 기술에 관한 서적들이 붐을 일으키더니 정리 컨설턴트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고, 최근에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대세다.

가볍게 생각해도 이런 경향들에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물질이 주는 기쁨이 참으로 한시적이라는 것이다. 물질로 채운 공간을 내면의 평화를 위해 자리양보하는 이 바람직한 현상이 가끔은 샛길로 빠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싹 비워내고 정리하는 일은 충분히 유익하다.

우리도 월든(Walden) 호숫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처럼, 불임암의 법정 스님처럼, 비우고 채우면서 간소한 삶을 가꿔 나갈 수 있다. 물질에서 결코 멀어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물건을 채워야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건이 빠져나간 자리에 내면의 자리가 생긴다. 원래 있던 자리였지만, 물건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부분이 치우고 나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비우고 채우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작용이다. 종교적인 공간이 성스럽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도 물건이 빼곡히 없어도 그곳을 가득 채우는 평화와 고요함이 있어서다.

일부 사진은 사진 공유 사이트 pickupimage.com에서 발췌함
일부 사진은 사진 공유 사이트 pickupimage.com에서 발췌함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출판 기획 및 교정을 틈틈히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본 애보리진과 마오리족의 예술, 건강한 사회와 행복한 개인을 위한 명상과 실수행에 관심이 많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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