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사 와 15년 만에 한국에 살게 되었다. 그 사이에 한국을 자주 방문했지만, 방문과 사는 것은 사뭇 달랐다. 일상생활 속에서 복잡할 만큼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새로운 단어도 많이 배우게 됐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비슷한 면이 많은 데 두 언어가 한자어의 비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어휘가 특히 비슷하다. 그래서 한국어에 적절한 단어를 모를 때 영어보다 일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바꾸면 더 편할 때가 있다. 유럽은 라틴어에서 나온 어휘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이웃나라의 언어를 배운다. 이 방법은 대체로 성공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외국어 교육학에서 이러한 단어를 ‘가짜동족어’라고 부른다.

2008년 가을 학기 개강 직후에 새로 구입한 프린터의 용지가 필요했다. 필자는 문방구에 가서 ‘A4’(A사) 용지가 있는지를 물었는데 종업원은 “A포 말씀하시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네’ 대답하면서 ‘A4’ 용지의 ‘4’를 ‘사’ 대신에 발음하기 힘든 ‘포’로 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외래어를 한국보다 잘 사용하는 일본에서는 ‘A4’의 ‘4’를 영어로 발음하지 않고 일본어 발음 그대로 한다.

반면에 일본어는 ‘이메일 주소’의 ‘주소’ 부분을 영어 그대로 ‘어드레스’(address)로 하고 ‘이메일’(email)을 ‘메일’로 단축해 ‘메일 어드레스’(メールアドレス)가 된다. 이 외에도 순 일본어, 한자어, 그리고 영어를 섞어서 만든 단어가 아주 많다.

보통은 외국어 배울 때 문법과 발음 중심으로 배우고 특별한 지도 없이 단어를 그냥 암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배운다. 그런데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단어가 문법과 발음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체계가 있으면서 예외가 많다. 한국어의 경우 순 한글 숫자인 하나, 둘, 셋이 있고 한자어의 일, 이, 삼도 있다.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규칙에 맞게 사용한다. 예를 들면, 시간과 관련해서 한 시간 단위를 순 한글로 하고 분 단위를 한자로 한다. 개수할 때도 앞에 순 한글이 나오고 다음은 개수의 단어가 나온다. 그래서 “커피 한 잔”은 자연스럽고 “커피 일 잔”은 이상하다.

‘A4’ 용지가 커피처럼 외래어로 생각하면서 ‘4’를 ‘포’로 발음할 수 있지만, 아랍 숫자가 외래어가 아니기 때문에 순 한글 또는 한자어 발음으로 한다. 그래서 2008년에 필자가 처음으로 이 단어를 만났을 때 일본어의 영향으로 ‘사’ 또는 ‘넷’을 생각하고 그 중에 느낌상 한자어인 ‘사’가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서 ‘A사’를 불렸다.

그런데 그 느낌이 어디서 나왔을까? 일본어의 경우 ‘A4’의 ‘4’의 발음을 순 일본어의 ‘용’(よん)으로 하지만, 순 한글의 ‘넷’은 받침이 있어서 발음이 조금 더 복잡하다. 새로운 단어 또는 외래어를 받아들일 때 발음을 쉽게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어에서 영어를 줄이는 것은 유명하다. 그래서 필자는 ‘A4’의 발음을 몰랐을 때 발음하기 쉽고 한 글자인 ‘A사’를 선택했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2008년 당시에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였지만, 예전부터 가급적이면 외래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어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아픈 역사의 산물이다. 영어는 해방 이후에 미국의 영향 때문에 많이 들어왔는데 한국이 미국에 존속하고 의존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필자가 외래어를 기피하는 것은 한국을 존중하는 생각도 담겨 있다.

얼마 전에 대통령 후보 중에 한 명이 ‘3D’를 ‘삼D’로 발음했는데, 이러 인해 이런 저런 화제가 되었다. 뉴스로 먹고 사는 언론이 후보의 단점을 따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A4’를 아직 ‘A사’로 발음하고 싶은 필자에게도 ‘삼D’가 ‘쓰리D’보다 더 자연스럽다. 심지어 작년에 출간한 《미래 시민의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3D’를 ‘삼D’를 발음한 적이 있다.

언어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일종의 약속, 즉 사회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A포어’ 또는 ‘쓰리D’가 더 널리 사용되고 더 자연스럽다면 그 것은 “맞는 말”이고 ‘A사’ 또는 ‘삼D’는 “틀린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한국 사회가 영어를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로버트 파우저 robertjfouser@gmail.com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교육을 가르쳤고,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가르쳤다. 한국 사회를 고찰하면서 한국어로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을 출간했다. 취미는 한옥과 오래된 동네 답사, 사진촬영으로 2012년 종로구 체부동에 ‘어락당(語樂堂, 말을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짓기도 했으며, 2016년 교토에서 열린 ‘KG+’ 국제 사진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했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 학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어로 ‘외국어 문화사’를 집필 중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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