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날들의 궤적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다차원적 시공간에 얽힌 행위들을 이차원의 평면에 그대로 옮겨 놓으면 어떤 이미지와 색채로 형상화 될지 자못 궁금하다. 지리학의 연구방법 중에는 시간지리학(time-space geography)이라는 분야가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현재의 ‘공간(space)’을 연구하는 지리학이 인간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선택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행위가 누적된 공간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시간지리학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공간상에서만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이동의 개념을 시간으로 확대하여 시공간상에서 개인들의 행태를 분석한다. 각 개인이 지니는 사회적, 생물학적 지위, 그리고 물리적인 환경의 차이는 프리즘으로 작용하여 개별적인 행위를 서로 다르게 하며 그들이 활동했던 시공간의 성격을 차별화시킨다.

김현식, 사이공간-Beyond, Epoxy resin, Acrylic color, 39x39cm, 2011
김현식, 사이공간-Beyond, Epoxy resin, Acrylic color, 39x39cm, 2011

우리들이 살아왔던 특정시기의 공간들(장소들)은 각각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여러 시기와 장소들이 중첩되면 우리들만의 시공간적 영역이 형성된다. 사람은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명제임을 인식하지만 우리의 행위가 스며든 각 장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속되어 있으며 결코 분절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김현식 작가의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시공간적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한다. 작가는 시간의 궤적을 색채와 형상으로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그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구상의 이미지를 통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삶의 흔적에 대한 메타포를 자각하게 하는 고도의 지능적 그리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표현에 있어 중첩되는 레이어들 사이의 공간(간극)은 원칙과 제약으로 인해 우리가 속하지 못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쉬움 혹은 현실을 잠시 벗어난 ‘쉬어가는 상상의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경험하지 못한 꿈꾸는 영역은 항상 그림자처럼 표면적 삶과 평행하여 진행된다.

김현식, Who likes orange, Epoxy resin. Acrylic color, 100x100cm 2016
김현식, Who likes orange, Epoxy resin. Acrylic color, 100x100cm 2016

작가는 겉으로 드러난 어떤 것을 너머, 오직 색과 선의 중첩만으로 인식의 안과 밖이 만들어 놓은 무한하고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투명한 레진을 재료로 선택하였다. 레진의 투명성이 우리의 시선을 물체의 표면 뿐 만 아니라 그 내면의 깊숙한 곳 까지 이끌어 준다는 점에 착안했다. 레이어와 레이어의 사이, 그 사이의 모호한 경계 속에 존재하는 ‘사이공간’은 투명한 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는 덩어리지만 그 투명성으로 인해 공간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투명하게만 보이는 ‘사이공간’들이 각별히 중요했던 장소, 기억, 순간들과 함께 사유로 채워지길 바란다. 투명한 레진을 이미지 위에 붓고, 굳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날카로운 도구로 선을 긋고, 색을 채우고, 다시 레진을 부어 또 다른 레이어를 만들어 선긋기를 반복하는 그의 작업과정은 오랜 시간의 육체적 노동을 강요하는 일종의 명상과 같다. 작업 과정 속에서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은 각각의 층을 형성하지만 이는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오브제로 귀결된다. 추상회화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회화 작품에 비해 어느 정도의 두께와 무게를 가진 평면 조각으로 볼 수 있다.

김현식, 사이공간-Illusion, Epoxy resin, Acrylic color, 90x90cm 2012
김현식, 사이공간-Illusion, Epoxy resin, Acrylic color, 90x90cm 2012

보이는 것 너머, 평면 속의 공간을 담은 초기 시리즈 ‘beyond the visible(hair series)에서 머리카락의 섬세한 한 올 한 올과 ‘illusion(waterfall series)’시리즈에서 송곳으로 하나씩 새겨나간 폭포의 강한 물줄기는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겹겹이 쌓인 순간의 시간을 숨기지만 이미지가 형상화되는 이와 같은 기존 작업들은 공간의 세밀한 펼침과 겹침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장치였다. 'beyond', 즉 우리가 보는 것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보기를 원한 작가의 의지가 반영되었다면 ‘Illusion’은 현상적인 감각의 차원에서 환영, 환각이라는 뜻을 지니면서 동시에 우리가 보고 있지만 볼 수 없는 것, 흘러가는 시간 속에 놓인 개인의 시간과 시각과 같은 놓쳐지는 많은 것들에 대한 환영을 다시 꺼내 보인다는 의미도 함께 가진다. 그러나 근작 ‘Who likes K colors?’ 시리즈에서는 형태이미지가 작품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형태를 완전히 버리고 솔직하고 담백하게 오직 색과 선의 중첩만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미지의 세계, 즉 보았던 세계와 보지 못했던 세계를 연결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실제와 그 너머의 환영을 조화롭게 누적시켜 견고하고 명백한 삶의 궤적으로 시공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작품 앞에서는 색감이 주는 찬란한 감흥을 넘어 무채색 혹은 무색의 자기성찰이 절정에 다다름을 체험하게 된다.

김현식, Who likes Aqua, Epoxy resin. Acrylic color, 100x100cm 2017
김현식, Who likes Aqua, Epoxy resin. Acrylic color, 100x100cm 2017

김현식, Who likes K-colors, Epoxy resin. Acrylic color, 각200x28cm 2017
김현식, Who likes K-colors, Epoxy resin. Acrylic color, 각200x28cm 2017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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