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임영모의 맵 인사이트(Map Insight)] 소설가의 머릿속엔 지도가 있다

발행일시 : 2017-05-05 00:10
[임영모의 맵 인사이트(Map Insight)] 소설가의 머릿속엔 지도가 있다

‘실존하는 땅이라면 더 좋다. 작가가 그곳을 모두 걸어보았고 모든 마일표를 속속들이 안다면. 그러나 비록 상상의 장소일지라도 처음에 지도를 그려두는 편이 낫다. 지도를 들여다보노라면 그때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관계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전에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도에 명백하게 드러난 지름길과 발자국을 보고서 그곳으로 자신의 전령을 보내게 될 것이다. 꼭 「보물섬」처럼 지도가 플롯의 전부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지도는 필시 유익한 제안들의 금광이다.’

- 「지도 위의 인문학(사이먼 가필드)」에서 ‘스티븐슨’의 말 재인용


IT업계 종사자이다 보니 각종 제안서와 보고서 작성, 기술문서 검색과 열람, IT 용어 중심의 숱한 미팅 등에 치이는 경우가 있다. 뇌가 딱딱해지는 느낌이다. 이럴 때 여러 가지 치유의 방안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책을 읽는 것이다. 자기계발 서적이나 트렌드 요약 기술서적은 어울리지 않는다. 말랑말랑한 소설이 딱 제격이다.

소설책을 펼치고 작가의 조곤조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문자들의 조합으로 작성된 문장들 안에서 인물의 모습이 그려지고,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이 하나하나 다가온다. 단순히 문자로만 이루어진 정보이지만, 그것을 독자들은 하나하나 이해하면서 나름대로의 인물과 공간으로 형상화해서 시각적으로 본다. 그것이 바로 영화와는 다른 소설의 재미일 테다. 만화나 그림동화와는 다른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소설의 멋일 테다. 독자의 상상력의 크기에 비례해서 인물과 사건과 배경은 각각에 맞는 구체성을 띤다.

○ 소설을 펼치면 공간이 보인다
혹시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기억나는가?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소설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루어지고 논설문은 ‘서론-본론-결론’으로 단락 지을 수 있으며 시조는 ‘초장-중장-종장’ 형태의 3장 6구 12음보로 쓴다는 식의 교육 과정에서 습득한 것 중 하나에 속한다. 문학 작품을 무 자르듯 토막 내어 이해하고, 형식적인 규정을 배우고, 그 규정에서 어긋나는 것들에 대해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부터 배웠던 때의 기억이다.

‘인물, 사건, 배경’은 흔히들 소설 구성의 3요소라고 일컫는다.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 문체라고 했었다는 것도 연상되어 떠오를 수 있다. 늘 이 둘은 헷갈리고 오답 빈도 역시 높았던 단골퀴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국어 시험을 잘 봐서 성적이 잘 나오기 위한 암기였을 뿐 사실 소설을 읽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며, 이런 것을 모른다고 한들 독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굳이 소설 구성의 3요소를 따지지 않더라도 소설은 기본적으로 ‘공간’이라는 배경을 품고 있으며 이것은 소설이 개연성(蓋然性)을 띠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수준에 바탕을 두고 그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그 공간 속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각종 사건을 펼친다. 공간은 이야기의 무대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림 1.  소설에 앞서 지도가 먼저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스티븐슨의 ‘보물섬’ 지도 <그림 1. 소설에 앞서 지도가 먼저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스티븐슨의 ‘보물섬’ 지도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년 출간)은 지도 한 장만으로도 독자들의 숱한 상상을 자극했다. 해적의 궤짝에 남겨져 있던 한 장의 지도, 그리고 거기에 그려진 길이 약 14.5킬로미터에 폭이 약 8킬로미터에 이르는 뚱뚱한 용이 곧추선 것처럼 생긴 구체적인 섬의 형상과, ‘이 곳에 보물이 잔뜩’ 묻혀있다는 주석 하나는, 소설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이를 들여다보는 독자들마저 일확천금의 꿈에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작품은 소설보다 지도가 먼저 만들어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의붓아들 오즈번이 심심풀이로 종이에 그리고 있던 섬 지도가 소설 창작의 발단이 되었고, 거기에 각종 지명을 붙이고 속성정보를 붙이고 보물을 숨긴 POI를 빨간 가위표로 표시해가면서 지도는 점점 구체화되고, 그 지도 안에서 움직일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그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을 창작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 것이 바로 ‘보물섬’이라는 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공간에 대한 상상이 소설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2. 소설 ‘7년의 밤’의 배경이 되는 S시 지도. 이렇게 차분하고 깔끔하게 그려진 공간과 달리 소설은 끈끈하고 치열하다. 출처 : http://blog.naver.com/rookie82/30105550776 민효인 작가 작품 <그림 2. 소설 ‘7년의 밤’의 배경이 되는 S시 지도. 이렇게 차분하고 깔끔하게 그려진 공간과 달리 소설은 끈끈하고 치열하다. 출처 : http://blog.naver.com/rookie82/30105550776 민효인 작가 작품>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의 표지를 펼치면 지도부터 마주하게 된다. 라임 색의 파스텔 톤 지도는 책의 내용을 아직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그저 상큼하고 단출한 느낌의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겠거니 하는 섣부른 생각을 밑밥으로 깔아줄 것만 같다.

소설을 읽으며 간간이 지도를 펼쳐보며 주인공의 동선과 이야기의 전개를 공간 내에서 그려보게 된다. 순간의 실수로 살인을 범하게 된 그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현수와,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복수를 치밀하게 이행하는 그 마을 터줏대감 영제와, 7년 전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승환과 현수의 모습은 공간 내에서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서서히 옭죄어드는 압박감과 긴장감을 시종일관 밀도 있게 그려놓은 소설은, 진행 내내 지도를 참조하면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느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 물론 텍스트가 아닌 그림으로 된 지도는 소설의 한 요소로 구체적인 배경을 주기도 하고, 반면 그 제한된 틀 안에 상상을 머물게도 하겠지만 말이다.

○ 지도만으로도 상품이 되다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3부작으로 출간된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소설의 바이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호빗, 난장이, 마법사, 요정, 각종 악의 세력 등과 같은 기본적인 판타지 출연진의 성격을 제시하고 있으며, 중간계라는 세상을 두어 새로운 상상의 공간을 펼쳐냈다. 보잘 것 없고 화려하지 않은 주인공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주변의 도움과 권선징악적 우연들이 결합하면서, 결국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모험 기반의 성장소설의 전형이기도 하다.

영화로 제작되기 전,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이 내용을 영화로 만드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나면, 그것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를 보는 게 두렵기도 하다. 우려와 달리 영화는 충분히 찬사를 받을 만큼 잘 만들었으나, 내 머리 속에 상상했던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공간과 수많은 멋진 캐릭터를 몇 시간 분량의 한정된 크기의 영상에 담기에는 뭔가 허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림 3.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중간계 지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림 3.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중간계 지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반지의 제왕’ 지도는 소설만큼이나 유명하다. 반지의 제왕보다 앞서 집필한 ‘호빗’에서도 톨킨은 지도를 사용한 바 있는데, 반지의 제왕에 와서 이 세계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알려진 바로는 1955년 책이 출간될 당시에는 지도가 없었으나, 이후 영국의 삽화가인 폴린 베인즈가 일러스트를 맡아 상상의 공간을 구체화하였다고 한다. 작년(2016년) 5월에는 이 베인즈의 초창기 일러스트에 톨킨이 직접 여러 주석과 요구사항을 적어 넣어 두었던 초기 중간계 지도가 옥스퍼드 대학 보들리안 도서관 측에 6만 파운드(약 1억원)에 판매되었을 정도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middle earth map’을 검색해 보면, 다양한 버전과 사이즈로 편집되어 유통되고 있는 중간계 지도를 만날 수 있다. 지도 한 장만 서재에 걸어놓더라도 프로도와 골룸과 간달프가 지도 여기저기를 거닐면서 말을 걸어올 것만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은 롱테일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두터운 매니아 층을 지니고 있다. http://lotrproject.com/ 사이트를 방문해 보면 톨킨의 작품들을 현대 방식으로 다양하게 분석하여 공유하고 있는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가계도를 통해서 각 종족별 인물들의 계보를 이해할 수 있으며, 소설이 진행되는 타임라인을 일목요연하게 훑어볼 수도 있다. 또한, 직접 조작 가능한 중간계 전자지도도 만나볼 수 있다. 과연 판타지 소설계의 대부다운 대접이 아닐 수 없다.

그림 4.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 지도는 아예 인터넷 버전으로도 나와 있다. 주요 포인트에는 사건 요약된 연보가 담겨 있다. http://lotrproject.com/map <그림 4.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 지도는 아예 인터넷 버전으로도 나와 있다. 주요 포인트에는 사건 요약된 연보가 담겨 있다. http://lotrproject.com/map>

○ 이야기 속 지도의 다양한 모습
1726년 발표작인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 거인국 등을 다룬 가벼운 동화 수준의 책이 아니다. 내용의 시사성 및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여 금서 조치를 받았던 책 중 하나며, 스위프트 역시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집필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책이, 문학적인 의미를 차치하고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 덕분에 의미 있게 회자됐던 때가 있다. 무삭제 완역본을 보면, 걸리버는 소인국과 거인국 말고도 천공의 성 라퓨타와 발니바르비, 글럽덕드립, 럭낵 등의 나라를 거쳐 영국으로 향하게 되며, 이에 대한 지도 삽화 한 장이 함께 제시된다. 비록 우리나라가 정확하게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걸리버가 경유했다던 일본(‘Japon’으로 표기)의 북서쪽 바다의 명칭은 ‘Sea of Corea’, 즉 한국해로 표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1700년 대의 세계적인 동해 지명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이다. 문학 속 지도가 거짓 주장에 대한 반증을 품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림 5.   ‘걸리버 여행기’ 속 지도 삽화에는 명확하게 ‘Sea of Corea’를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림 5. ‘걸리버 여행기’ 속 지도 삽화에는 명확하게 ‘Sea of Corea’를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

또한, 공간적 무대가 지구 밖인 경우도 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던 ‘마션’은 지구가 아닌 ‘화성’을 공간적 무대로 삼고 있다. 아직 책과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 작품들의 공간은 실제 화성의 공간을 실감나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인공의 이동경로는 3,200킬로미터에 이르며, 이에 대한 지도는 NASA에서 제공하는 인터랙티브한 화성지도(Mars Trek, https://marstrek.jpl.nasa.gov)를 이용하여 공유되기도 한다. 지구 상의 지도가 좁게 여겨진다면 심심풀이로 소설과 함께 우주별 지도를 구경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추천한다.

그림 6.  ‘마션’에서 다루고 있는 화성 공간 역시 지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림 6. ‘마션’에서 다루고 있는 화성 공간 역시 지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 소설가 머릿속 한 장의 지도
지난 칼럼 중 ‘문학이 지도에서 부활한다’ (http://www.nextdaily.co.kr/news/article.html?id=20160908800074)에서 다루었듯이, 소설은 구체적인 공간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지도를 통해 재현될 수 있다. 대부분의 소설은 시간과 공간의 배경 위에서 이야기를 펼치게 된다. 소설가의 머릿속에는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공간이 멋진 지도 모양으로 들어있는 것 같다. 그것이 현실의 공간일수도, 현실의 공간을 모방한 가상의 공간일수도, 아예 상상의 공간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한 장의 지도로 독자에게 선보일 수 있다. 텍스트가 아닌 시각화된 지도가 독자의 풍부한 상상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구체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공간에 대한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눈앞에 지도가 한 장 놓여 있다. 그곳에 가상의 인물을 얹고, 그 인물이 엮어내는 사건을 만들면 그것만으로도 바로 소설이 될 수 있다. 그 인물이 바로 나 자신이며, 그 공간이 나와 관련된 공간이고, 그 속에 내 주변 이야기를 옮겨 적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자전적 소설이다. 어쩌면, 소설은 지도 한 장의 재료만으로도 충분히 쓸 준비가 되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봄, 눈앞에 익숙한 지도 한 장 펼치고 나만의 소설 속으로 빠져보면 어떨까?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봄날에 즐길 수 있는 소소한 소일거리 아닐까?

임영모 0duri@naver.com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컴퓨터잡지사 기자로 시작하여, 애니메이션, 출판, 모바일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GIS 업계에 종사한 지 10년이 넘었다. 현재는 ㈜지오투정보기술에서 인문학 기반을 활용한 다양한 공간정보 기획을 맡고 있다. 본 칼럼에서는 일반인들도 쉽게 공간정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공간정보의 다채로운 활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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