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첫날, 일터를 떠나는 후배와 이별주를 나눴다. 관계에 실패하고 세상살이에 지친 후배는 자살하고 싶었던 충동의 시절을 고백하며 눈시울이 붉혔다. 과거로 회귀한 듯 굳어져가는 낡은 세계관에 물든 고집으로 조언하는 내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나이를 먹으면 지갑은 열고 입을 닫으라 했는데 좀 나아지는가 싶으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꼰대스러운 습관이 못마땅했다. 적절한 때 손을 맞잡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그의 푸념을 들어주며 걸었다. 그러다 침묵이 흐르면 눈썹 모양 달빛 아래서 뜨겁고 야한 몇 마디 농담을 들려줬다. 당장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방 속의 낡은 시집을 꺼내 쥐어주며 우리는 헤어졌다.

색깔이 분명한 책 선물은 위험하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많이 변해서 그렇지 아주 오래 전에 같은 책을 선물했다가 낭패를 당한 기억도 있었지만 줄 수 있는 것은 그 책밖에 없었다. 마광수의 ‘가자, 장미여관으로’ 개정판. 구구절절 변명하듯 시집을 이야기했고, 잘 각색된 청춘의 에피소드가 후배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으나 완전히 꾸민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이 많은 부모의 늦둥이로 태어나 애늙은이처럼 사고하던 시골 소년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을 최고의 선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장성한 아들이 밤 10시가 넘어서 귀가해도 잔소리를 하실 만큼 보수적이셨고, 지고지순했던 어머니는 건강한 아들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 늘 착하게 살기만을 강조하셨다.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나는 착한 사람이었을까?

새가 한 마리 하늘로 올라간다.
저 새를 쏘자, 쏘자.
새는 땅으로 떨어진다.
새는 검은 빛.
총탄은 단 한 발의 소비.
육식성 동물들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언제나 하늘로 오르려 하는 습성.
(221쪽,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 전문)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은 선생이 고작 열여섯 살에 쓴 작품이다. 그 천재 화가가 세간의 평처럼 예술가적 고뇌 때문에, 비관적인 인생철학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으며 그냥 죽고 싶어 죽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스스로의 본능을 더 이상 처리할 길이 없었고, 더 사랑할 대상과 상대를 찾을 수 없어서 더 살아 봐야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예술가가 자살을 하면 멋있고, 승려가 분신자살을 하면 소신공양이고, 혁명가가 자살을 하면 열사가 되는 사회 현상을 비꼬기도 하셨다. 다만 유서도 없이 무슨 선언도 없이 그냥 죽어서 그 돌발적인 자살이 좀 멋졌다며 그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을 것이라는 엉뚱한 애정을 표시했다. 짧고 오래된 이 시를 떠올릴 때마다 고흐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강렬하게 연상된다.

스무 살 무렵, 그저 야한 포스터와 친구의 권유에 이끌려 영화 ‘장미여관’을 봤다. 재미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내용이 많아 불편했는데, 동행한 벗이 제법 풍부한 뒷이야기를 해줬다. 원작 시가 따로 있고, 시인이 감독까지 맡았다가 연기 지도가 너무 야해서 검열을 우려한 제작사 측에서 교체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줬다. 부족한 지성과 열등감에 빠진 나는 서점에 들러 납득할 수 없는 시집 한 권을 샀다. 급진적 상상력의 야한 글이 연애 한 번 못 해 본 미성숙한 청년에게 제대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는데 말이다. 체제 순응적이고 보수적인 색깔이 짙었던 꽉 막힌 사고의 청년에게 처음 만난 선생은 그냥 변태였고, 상종하기 싫은 인물이었다.

선생에 호감이 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윤동주에 빠진 다음부터의 일이다. 드문드문 발견되는 서정성이 뛰어난 시와 술술 읽히는 문체의 소설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지적허영심이 가득한 우리 문학을 향해 외롭게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선생의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복잡한 문장구조와 어려운 어휘들을 탈피한 쉽게 읽을 수 있는 글로 가독성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 선생의 글쓰기 철학이 맘에 들었다. 어려운 주제라도 글이 술술 읽어지고 내용 전달력도 높았다. 문학적 허세가 없는 부드러운 문체에 빠져들었다. 글을 쓴다면 그처럼 쓰고 싶어졌다. 대부분의 소재가 색계라서 드러내놓고 좋아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지만 선생의 글은 까면 깔수록 멋졌다.

선생은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수의 애호가에 국한되어 있던 시인 윤동주를 일약 국민 시인의 반열에 끌어 올린 것은 선생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문의 완성도가 매우 높아 한동안 윤동주 연구자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나 여러 가지 작품 해설은 대부분 그 논문에서 비롯되었다. 부끄러움으로 대변되는 윤동주의 정서 또한 선생의 발견인지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 모두가 그 영향을 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선생은 최연소 교수로 모교의 강단에 섰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맡아 기형도와 안도현을 발굴하는 등 문화권력자의 탄탄대로를 걸었다. 너무 오만했던 것일까? 선생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야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도전적인 문학을 실천했다.

선생은 건전한 사회를 지향한다면 성(性)적인 욕망을 제대로 표현하고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성에 대해 솔직하지 않은 우리사회의 가식을 비웃는 선구자였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적인 욕망 표현이 죄라면 죄였다. 외모지상주의 대한민국에서 착하지 않게 뭔가 불만 있게 생긴 것도 죄라면 죄였다. 모교는 선생의 인격살인에 앞장섰다. 학교는 감성적인 이유를 내세워 치사하게 탄압했다. 동료교수들도 집단따돌림으로 호응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했고, 선생을 사랑하는 학생들의 거센 반발로 부당한 징계가 바로 잡히는 듯싶었지만 선생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정신과 치료를 위해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늙어 갔다.

내 나이 아직 어렸을 때에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
어른만 되면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러나 난 지금 꿈을 이룰 수 없네
나는 이미 어른이기에.
안쓰럽게 푸른 새싹으로 올라와
한스럽게 다 자란 싹으로 피어났던
애닯고 안타까운 나의 희망이여
(124쪽, ‘늙어가는 노래’ 도입부)

‘늙어가는 노래’는 아직 논란에 휩싸이기 전, 서른두 살 전성기의 선생이 발표한 쓸쓸하고 서정적인 작품이다. 만약 몇 가지 야릇한 선생의 작품들과 함께 나란히 놓고 ‘다음 중 마광수 교수의 작품이 아닌 시를 고르시오.’라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대중의 편견에 의해 망설임 없이 선택되지 않을까도 싶다. 우리 사회 표현의 자유가 막 기지개를 켜던 시절에 발표된 선생의 작품들은 몇몇 연예인들은 그냥 마구 던지는 성담론과 관음증을 자극하는 폭로성 이야기들이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을 보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유미주의와 진리를 관통하는 성찰이 빛나는 작품이다. ‘늙어가는 노래’는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시인의 시선이 잘 농축된 명작으로 시인에 대한 편견을 깨기 좋은 작품이 아닐 수 없겠다.

선생에게 야한 여자의 상징은 길고 날카로운 새빨간 손톱과 역시 길게 늘어진 생머리와 하이힐이다. 옛날 노예들의 피 냄새가 난다는 그 손톱은 불편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섹스의 묘사는 어리숙한 총각 시절에는 감당하기 벅찼지만 이후로 일부 연예인이나 무명의 야설가들이 쓴 자극적이고 야한 글도 많이 읽게 되면서 훨씬 뛰어난 에로틱과 상상력의 세계에 탄복했다. 꽉 막힌 청년에게 위험한 책일 수도 있었지만 얼핏얼핏 다가오는 수준 높은 문학성은 감동이었다. 선생의 페티시즘은 로마의 노예선과 노를 젓는 노예의 등에 사정없이 내리쳐진 가죽 채찍과 그 채찍 끝에 엉겼던 검붉은 핏방울에 야한 여자의 손톱과 융합되는 불편함으로도 가득하지만 그것은 단지 문학적 상상력일 뿐이었다.

신(神)들이 사는 나라에 가보았다. 신들은 마치 진시황과도 같은 쾌락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다만, 수많은 시녀나 노예가 모두 생물학적 로봇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로봇은 모두 다 잘생기고 예뻤는데, 인간과 똑같은 모습, 똑같은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만이 달랐다. 그들은 명령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어떠한 개인적 욕구도 갖지 않고 자기의 전문적인 일에 열중하는 이외에는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않는다. 남신(男神)은 절대복종하는 여자 로봇을 수십 개라도 가질 수 있다. 여신(女神)도 마찬가지로 남자 로봇을 수십 개라도 가질 수 있다. 로봇 제조 장치는 소유자의 취향에 따라 여러 종류의 로봇을 만들어낸다. 어떤 로봇에 싫증이 나면 그것을 파괴해 버리면 된다. 그래서 신들의 나라엔 결혼 제도 같은 것이 없다. 각자가 신나게 즐길 뿐이다.
(105쪽, ‘신(神) 4’ 부분)

연작시 신(神)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은 시인의 장편소설 ‘광마잡담’ 281쪽에도 인용된 명작이다. 연작시 왕(王) 시리즈와 함께 퇴폐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1985년 작인데, 관점을 달리하면 시대를 앞서간 관능적 상상력이 빛나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평범한 시민들의 오해처럼 남녀차별도 아니고, 여성을 상품화한 것도 아니며 그저 미래의 평화로운 복지사회를 꿈꾸는 에로틱한 천국의 묘사일 뿐이다. 대개의 시민들이 선생의 글을 대충 읽거나, 언론을 통해 접하며 변태 취급을 할 뿐 내포된 의도에는 관심이 없어 아쉬웠다. 억울한 외모를 가진 선생은 소설을 통해 꿋꿋하게 상상력을 유지하며 그 나름의 소신과 양심에 따라 글을 썼을 뿐인데 말이다.

233쪽에 수록된 ‘서기 2200년’은 먼 미래를 상상하며 쓰여진 음란한 상상력의 시이다. ‘한 여자의 온몸이 접시 역할을 하는 아침식사가 들어온다. 유방 가득히 초콜릿이 묻어 있고’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음란하다. 1989년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으나 200여 년 후가 아닌 불과 20년 만에 해외토픽에 오르내리는 퇴폐적인 업소을 예고한 경이로운 선구안의 시극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관능적 쾌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본능에 충실한 상상을 글로 표현했을 뿐인 것이다. 선생의 문학은 구호나 선전문이 아닌 꿈과 정서의 예술이었다. 손톱이 비정상적으로 긴 것으로 대표되는 선생의 상상 속 야한 여자는 개개인의 성적인 취향과는 무관하게 멋지고 고급스러운 우리말을 탈탈 털어 무장해제 시키는 매력도 있다.

5년 전, 느끼한 남성 오인조 인디밴드 ‘장미여관’의 깜짝 등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야 봉숙아~♪ 말라고 집에 드갈라고 꿀발라스 났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 아까는 집에 안간다고 데낄라 시키돌라케서 시키났드만 집에 간다 말이고~♪’ 귀에 착착 달라붙는 감미로운 멜로디에 뭔가 지저분한 가사가 부산 사투리로 구수하게 감성을 적시는 천박함에 웃음을 참지 못한 내 친구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봉숙이’라는 그 노래 주인공은 프랑스 말 ‘봉주르’에 착안해서 만들어낸 나름 철학이 있는 가상의 여인으로 심야의 청춘 남녀가 C급 밀당을 주고받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노래와 그 밴드는 1985년 시대를 앞서간 한 천재 시인이 닦아 놓은 길 위에서 화려하게 피어난 꽃이 아니었을까?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필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없는 보디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90쪽, ‘가자 장미여관’으로 도입부)

선생의 많은 글 중 ‘즐거운 사라’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서울대 손봉호 교수는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유행한다.”고 공격했고, 소설가 이문열은 “그런 쓰레기같은 소설을 쓴 자는 소설가로 부를 가치조차 없다.”고 비난했다. KBS 개그콘서트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마교수라는 캐릭터의 희화화 사례는 애교에 불과했지만 마광수 하나 두들겨 패는 것은 당시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서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다. 현승종 국무총리는 마광수를 사법 처리하라며 검찰을 압박했고, 단지 음란하다는 이유로 처벌받고 구속된 사실은 지금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잔인한 시대가 세월의 약을 발라 치유되고 있어 다행이다. 21세기가 17년이나 흘렀지만 ‘즐거운 사라’는 여전히 금서로 남아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비웃고 있다.

연세대학교 백양관 휴지통 앞에서 홀로 외롭게 담배를 태우던 선생의 모습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지난해 여름, 그다지 명예롭지 못한 왕따 생활 끝에 정년퇴임을 했고 일설에 의하면 연금도 받지 못하는 빈곤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홀로 외롭게 늙어가는 쓸쓸한 노인의 이촌동 빌라에는 일하는 아줌마만 오갈 뿐이라고 한다. 개정판 시집의 아름다운 표지그림은 물론 다른 많은 책들의 일러스트 또한 선생의 작품인데,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도 탁월한 천재의 아쉬운 황혼이 슬프다. 지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생각하면 갈 길이 아직도 멀다. 우리는 더 야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장미의 계절에 보다 열린 마음으로 문학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성숙한 독자들의 시대를 희망한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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