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먹는 음식을,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읽는 책을 보라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자면 나의 친구와 내가 먹는 음식, 그리고 내가 읽는 책이 나의 정체성을 다 말해줄지 의문이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속에서 날카롭게 곤두선 모든 신경세포들이 제 자리를 찾고, 모든 형식과 체면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 그 자체가 ‘나’라는 사람을 그나마 잘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달리 생각해본다. 오롯이 진솔하게 나의 생각과 행위를 가감 없이 펼쳐놓을 수 있는 장소, 나의 집이 나에게는 그럴 것이다. 집 안의 모든 사물들이 나의 스토리와 경험을 흡수하여 나라는 사람을 대변하는 익숙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라고 직접 말하지 않음으로써 생경하고 낮선 공간이 되기도 한다. 황선태작가의 작품에서 녹색선과 빛으로 자신을 명료히 드러낸 실내 공간에 놓인 사물들은 그곳에 머무는 우리들의 실제를 적극적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어리석음으로 무장한 우리들은 ‘나’의 실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에서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황선태,-빛이-드는-공간,-202x87x4cm강화유리에-샌딩,-유리전사,-LED,-2015
황선태,-빛이-드는-공간,-202x87x4cm강화유리에-샌딩,-유리전사,-LED,-2015

사물에 대해 끊임없이 분석하고 고찰하는 과정을 통해 사물의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황선태 작가는 개별적 이미지나 내용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 혹은 특정한 시공간 속의 어떤 순간에 주목한다. 그는 다른 사물을 투영하면서 존재를 부각시키는 유리와 라이트를 매체로 분명함보다는 불분명함이 가지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물의 존재 자체를 평면이나 입체로서 표현한다. 창문을 통해 투과되는 빛과 실내 공간을 이어주는 그림자로서 표현되는 이미지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주면서 가시적 세계의 이면을 드러낸다. 사물의 외관을 표현할 때 쓰는 녹색의 외곽선은 인식될 뿐이지 사실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 생명력을 나타내기 위해 작가는 녹색으로 표현하였고 이는 매우 현대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실내 공간에 비치된 사물들은 마치 무미건조한 기하학적 기호처럼 인식되지만 사실상 작품을 감싸 안은 빛으로 인하여 온화한 인상을 준다.

황선태,-빛이-드는-공간,-102x80x4cm,강화유리에-샌딩,-유리전사,-LED,-2016
황선태,-빛이-드는-공간,-102x80x4cm,강화유리에-샌딩,-유리전사,-LED,-2016

작가의 작업은 현재 작가가 주력하고 있는 라이트평면시리즈와 이 작업의 바탕이 되었던 유리입체시리즈, 유리사진시리즈로 구분된다. 라이트평면시리즈에서 부옇게 흐린 단색으로 균질화 된 화면에는 재질과 양감을 철저히 배제한 선으로만 표현된 사물만이 존재한다. 단선으로 드로잉 된 사물의 형태는 구체적인 속성을 알 수 없는 마치 박제 된 듯한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밋밋한 화면에 빛을 개입시켜 모든 현실적 질감이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존재를 명확히 하여 적요함과 생동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빛은 드러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둘러싼 비가시적인 수많은 것들을 감지할 수 있는 직관을 가능하게 한다. 즉, 평면 위에 그려진 일차원의 단선들에 의해 이루어진 담백한 공간에 빛이 투과됨으로써 사물들의 외형적 이미지가 전면에 부각되고 단색조의 평면은 공기를 채우고 입체적이면서도 온기 있는 공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비현실적 공간은 빛과 공기로 숨결을 부여받아 관람객이 공간과 일체감을 경험하는 적요한 순간을 열어준다. 액자 안에 그림자를 표현하는 샌딩유리와 그 위에 윤곽이 그려진 또 다른 유리 두 장을 일정 간격을 두고 겹친 상태에서 빛을 통과시킨 다음 유리의 투명함을 적절히 조절해 사물의 존재 자체를 두드러지게 한다.

황선태,-얼어붙은이야기,-39x26x20cm,유리,유리샌딩,-2006
황선태,-얼어붙은이야기,-39x26x20cm,유리,유리샌딩,-2006

작가는 라이트평면시리즈에 앞서 유리입체시리즈와 유리사진시리즈를 시도했다. 유리에 글을 새기는 매우 정교한 작업을 통해 의미의 생성에 초점을 두었다. 작가의 유리책이나 유리신문은 기존에 종이로 만들어진 책과 신문에 대한 비판과 사회학적 메타포를 함유하고 있다. 문자나 그림이 새겨진 유리로 된 책과 신문은 책장을 넘길 수 없어 그 속에 담긴 지식의 연결점을 놓친 채 단편적 지식이나 담론,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유리의 투명성으로 인해 페이지 간에 서로 비쳐진 글자는 온전하게 읽혀 지지 않는다. 맥락의 연결 없이 읽혀짐으로써 의미는 파악되지 않고 이해 불가능하게 된다. 활자화된 책과 신문은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게 하는 장치를 장착하고 드러내지 않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행간의 맥락을 통해 의미는 드러나지만 우리는 사실의 진위와 진실의 여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투명하게 새겨진 의미들의 집합체가 굳어 있는 해독 불가능한 작가의 유리책과 유리신문은 투명해서 숨길 것은 없지만 아무 것도 읽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적인 사진작업을 바탕으로 만든 평면 작업인 유리사진시리즈에서 사진이미지들을 몇 겹씩 유리 뒤에 새겨 넣음으로써 사물은 초점이 빗나간 것처럼 흐리게 표현된다. 색과 면을 삭제한 채 선만 명료한 사물은 구체화된 현실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단지 존재함에 방점을 두는 대상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단지 묘사에 의해서만이 현재적 대상으로서 사물이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묘사의 허구성을 역설하려 한다. 그는 묘사된 공간이 아니라 빛 하나로 단조로운 선묘가 입체로서 재질과 지속성을 얻어 현실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황선태,-개수대,100x75cm,-유리,잉크젯프린트,샌딩,-2008
황선태,-개수대,100x75cm,-유리,잉크젯프린트,샌딩,-2008

작가 황선태가 이토록 사물의 존재를 극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그의 예술인생을 걸고 천착한 이유는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을 비롯하여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하루일과를 통해, 또는 일생을 통해 사람들이 소비하는 많은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물질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사소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종교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물질이 바로 우리 스스로를 대변하며 물질이 우리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굳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구분하지 않고, 그리고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얽매이지 않고도 우리는 이들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기성찰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리고 지난한 삶이 현실이고 곧 이상이라고 인식한다면 넘쳐나는 물질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이상 익숙하거나 낯선 공간을 넘어선 그 어딘가에 발을 딛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황선태,-오후의-햇빛이-드는-방,-142x102x5cm,-강화유리,-샌딩,-전사필름,-LED,-2011
황선태,-오후의-햇빛이-드는-방,-142x102x5cm,-강화유리,-샌딩,-전사필름,-LED,-2011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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