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직장생활은 91년도에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신기술 기반 변화의 상징이었던 회사였다. 그리고 신입사원 초봉이 높아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회사이기도 했다.

부푼 꿈을 가지고 입사한 나는 국제업무과에 배치되었다. 나중에 알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의 직원들이 모두 더 부러워하는 부서라는 것을. 이유는 간단했다. 사내에서 유일하게 서로 마주보는 책상 배치를 한 부서였던 거다. 다른 부서는 모두 일본식 사무실 구조로 맨 뒤에 과장님, 그 앞에 직급별 연차별로 뒤통수를 보고 앉게 되는 책상 배열이었다. 부서 특성상 직원들이 모두 영어실력이 출중해서인지 평직원의 ‘말빨'이 먹히는 부서라는 평도 한 몫 했다. 물론 실제로 그렇진 않았다.

입사 동기들끼리 만나 맥주라도 한 잔 할라치면 모두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노동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모두 "우리는 어디서든 잘 적응해낼 거야.” “그럼 그럼 그래야 만해” 으샤으샤 애사심 가득찬 마무리는 열정으로 흐뭇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영어 공부 열심히 해놓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책상 배치가 곧 모두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신 없던 신입사원 1년차 어느 날 여름이었다. 개방형으로 트인 넓은 사무실은 맨 왼쪽의 우리 팀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일렬로 앞에 앉은 사람의 뒤통수를 보는 구조였다. 가운데쯤 되는 어느 과에서 과장님 한 분이 자기 자리에서 노기 띤 목소리로 아랫사람을 ‘깨고’ 있었다. 두 손을 가운데 모으고 서서 뭔가 변명인지 설명인지를 계속 하고 있던 직원에게 과장님은 사무실이 떠내려가게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그래, 지금 그래서 자네가 나하고 민주주의하자는 건가? 내가 한마디 하면 자네도 한마디 하겠다 이거지? “ 순간 야단 맞던 하급자는 자세를 바로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마치 군인과도 같은 어조였다. 과장님의 커다란 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들고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사무실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니 당치않다’는 반성에 조용히 평온함을 되찾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30여년이 지났고 직장 문화는 그로부터 많이 변했다. 특히 IT 분야는 실리콘 밸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회사들은 경쟁적으로 격식을 파괴하고 직급 호칭을 없애는 등의 시도를 많이 해왔다. 과거의 경우와 직접적인 비교를 할 수 있는 직원들의 수는 적겠지만 그래도 우선 피부에 와 닿는 형식이 주는 긴장감이 줄어드니 지내기가 수월해졌다.

과장님 부장님 이라는 직급 호칭을 없애고 스티브니 제니 같은 영어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맨발과 반바지 옷차림을 허용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사실, 직급 없는 호칭은 그들의 언어적 특성에 기반한 것일 뿐이고 그들이 자유로운 복장을 하는 것은 그들의 복식 문화일 뿐인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직원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한 복지 차원의 시도일 것이라 추측한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틀린 답은 아니지만 전부는 아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문화는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보다 훨씬 다양하고 창의적인 서비스 아이디어와 혁신적인 기술 개발이 가능했던 것일까.

물론 직원들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장치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은 바로 민주주의적 기업문화의 정착이었다. 위계와 계급에 기반하여 효율적인 생산과 빠른 의사결정을 실현한다는, 기존 기업의 가치와는 상반될 것 같은 민주주의 원칙이 가장 빠르고 변화에 대한 적응을 요하는 분야에서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니. 어쩐지 잘못 짚은 내용 같지만 사실이다.

IT기업에서의 민주주의란 결국 이용자의 마음을 사는 방법과 절차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혹은 마케팅 구호같은 목적이 아니다. 지극히 필요하고 계산된 결과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기술과 개발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람을 이해하고 서비스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 IT 산업의 궁극적인 특성에 대한 고충이, 기업 경험으로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인사이트로 기초를 이루고 있다.

첫 번째 경험. 성공적인 IT 스타트업은 언제나 이용자와의 소통과 공감을 중요시 했다. IT는 태생적 특징이 혁신이다. 초기의 혁신은 이용자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술의 혁신이었고 이후는 이용자의 경험적 행복을 상승시켜주는 서비스 혁신이었다. 그러므로 IT의 키워드는 ‘새로운 사용 경험’이다. 이용자의 새로운 사용 경험, 즉 새로운 UX(User Experience)를 기준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려면 이용자를 돈벌이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절대 얻을 수가 없다. 누군가를 대상화 한다는 것은 낮추어 보려는 시각을 포함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나의 필요에 의해 이용할 만한지를 기준으로 상대를 보게 된다. 즉 상황을 객관화 하지 못하고 쉽게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사람들 속에서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듣는 내용, 보는 눈높이, 공감의 온도가 다 다른 다양한 요구를 이해하려면 여러 상황에 유연해져야 한다. 타인의 ‘자유로운' 요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서비스기획자들은 이용자들을 알기 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거나 익숙해진 지식과 배경을 버리고 그들과 평등한 이용자가 되어야 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핵심역량이라고 알고 있는 기술과 아이디어는 사람에 대한 이 같은 전제가 확보된 이후에나 요청된다. 사실 많은 서비스들은 첨단 기술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기술은 현재의 이용자 요구가 충족된 뒤, 이용자 자신도 놓치고 있는 원하는 무엇인가를 제공받기 바라는 단계에서 필요하다. 현재의 요구도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데 새로운 기술,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내세워 "너희 이거 몰랐지?" 라고 제시되는 서비스는 대부분의 파산기업의 특징이다. 그들은 혁신이었다고 주장하겠지만.

두 번째 경험은 성공적인 서비스의 탄생이 내부 직원, 특히 기획과 개발간의 원활한 협업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 원활한 협업 과정은 기업체 내부의 민주적 의사 소통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민주적 소통 방식은 구성원들이 경쟁 보다는 동료의 자존감을 존중해 줄 수 있는 분위기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공감대를 넓히고 서비스를 디자인한다. 자유로운 토론의 방해 요소는 권위와 불통이다. 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직급호칭을 버리고 이름을 불러주고 복장도 개인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표면적인 제도들의 뿌리는 그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일 뿐이다. 내용까지도 자유로운 토론의 실직적 결과를 원한다면, 동료를 바라보는 내 안의 시각을 먼저 혁신해야 한다. 그리고 회사의 제도는 이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속성상 기획은 이용자와 시장을 넓고 큰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개발은 영역별로 깊이 몰두해야만 성과를 낸다. 이 두 가지 영역의 다른 속성은 하나의 서비스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에서 종종 갈등으로 이어진다. 성공한 서비스는 예외 없이 이 필연적 갈등을 화합과 협업으로 조화해낸 특징을 가졌다. 양쪽이 권위와 불통을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절차적 골든 룰이 바로 민주적 원칙에 기반한 리더쉽과 소통이다.

물론 변화와 유연함을 필수로 하는 IT 영역의 특성상 다수결 원칙과 같은 기계적인 적용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원칙과 상호 공감대 형성을 위한 민주적 골든룰이 회사의 문화와 제도로서 지원하고 있다면 목표에 다가갈 가능성은 높아진다. 실리콘밸리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이러한 과정이 회사의 사규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몸에 밴 민주주의적 소양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회사 또한 이 같은 문화가 궁극적으로 회사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경험에 기반한 인사이트이다. 앞으로 다가올 디지털 혁명기에는 경영의 사회적 시각이 필수라는 점이다. 주커버그나 머스크와 같은 IT성공 신화의 주역들은 이미 고전적인 기업의 목표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기업이 민간 부문의 역할 뿐만 아니라 공공 부문의 역할을 일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즉 IT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들은 적어도 이윤의 추구가 아니라 이용자의 UX에 기반한 사회적 공감의 추구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이 여러 매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결국 IT혁명의 주체는 이용자인 것이다. 그래서 이용자들은 민주주의의 ‘시민'과 같이 깨어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은 이를 지원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업의 사회적 목표가 아니라 실질적인 생존 전략이 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지금과 같은 산업 구조의 연장선상이 아니다. AI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데이터에 기반한 기획과 의사결정이 진행될 것이며 생산 라인 역시 로보틱스의 힘을 빌어 지금보다 훨씬 효율화된 체계가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이 진행되는데 지금과 같은 이윤추구의 방식으로 기업의 구성원을 비용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실업과 소비감소로 결과적인 사회적 위축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의 속도와 방향이 현재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기업의 중심은 사회 구성원들과의 공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넓게는 이용자인 일반 소비자들의 UX와 요구를 민주주의의 민의처럼 필수적으로 공감하여 경영의 질을 높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좁게는 직원들을 고용인이 아닌 엄선된 동료애(Fellowship) 기반의 동반자로서 경영목표를 공유하고 열린 자세로 비판과 건의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방법론상의 키워드는 관계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참여를 촉진하는 것이다.

현실 인식의 소통, 기업과 사회의 공통적인 지향점의 공감, 그리고 발전 속도의 공감은 마치 국가 정책에 대한 정통성(legitimacy) 처럼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이용자로부터 기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애정을 확보하여 적정한 분량의 공감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기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이념이라 여겨졌던 민주주의다. 그러나 엄청난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그 개념이 확장되어 소통과 관계를 위한 일상의 준칙으로 활용되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사회적 소통의 역할이 더욱 요구되는 IT 비즈니스의 혁명기에는 비효율적일 것이라 보이는 민주주의의 속성이 오히려 기업의 성공적 존립을 위해 필요한 정확한 절차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30년 전 최고의 직장내에서 당치 않은 반항의 상징이었던 민주주의는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해야하는 시기를 맞이한 지금, 기업을 포함한 모든 일상에서의 준칙으로 요청되고 있다.

노수린 suerynnroh@gmail.com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언론홍보 석사, MBN 기자, KTF 해외마케팅과 플랫폼 기획팀장을 거쳐, IoT스타트업 운영과 컨설팅 및 교육 강의를 해왔다. 현재 한림대 사회학과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IT는 사람의 행복과 가치추구를 위해 서비스와 콘텐츠로 관계를 연결하는 장치라 생각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용한 오픈 IT를 기반으로 사용자UX가 주권처럼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많은 이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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