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수많은 점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의 몇 개를 잘 이으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선택한 점들이 왜 그 지점에 있는지가 아니다. 왜 당신이 나머지 점들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중에서

얼마 전 경기도 수원시 소재 ‘국토지리정보원’에 업무 차 방문했었다. 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곳이다. 가끔 찾아오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과연 나는 공간정보인(人)인가에 대한-이 극심했던 때가 있었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잠시 궤도를 이탈해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꽤 오랜 기간 소원해졌었다.

한 때는 프로젝트 수행 때문에 몇 개월 동안 상주 근무를 하기도 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 다른 프로젝트 수행 때에는 주간보고를 위해서 일주일 단위로 꼬박꼬박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필자의 거주지인 용인시 수지구와 지근거리에 있다 보니 업무의 부담감과는 무관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던 곳이다. 그 곳을 오랜만에 향한다.

○ 국토지리정보원을 방문하다
국토지리정보원은 1958년 국방부 산하 지리연구소로 출발하였으나 실제 독립기관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1974년 ‘국립지리원’ 시절부터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국토지리정보원’이라는 기관명은 2003년 7월부로 부여되었지만, 아직도 이쪽 업계 소속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리원’이라는 명칭으로 일곱 글자 기관명을 줄여 부르고 있다.(간혹 ‘국지원’이라고 부르는 지인도 있긴 하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지도와 관련된 모든 업무의 출발점인 곳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지도 제작의 첫 단추 역할을 하는 각종 국가기준점 측량을 주관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축척의 디지털 기본도를 제작하여 제공한다. 항공촬영 등을 통해 수집한 사진을 바탕으로 영상지도 데이터를 구축하여 보급하며, 국가 지명이나 국토통계, 인문지리정보를 담은 지리지, 지도집 등 수많은 우리나라 국토와 관련된 정보를 생산하고 공급한다.

여기서 생산하여 제공한 국가기준점 정보를 기반으로 정밀성을 요하는 각종 측량이 이루어지며, 디지털 기본도(수치지도)와 항공영상지도를 재료 삼아 각 민간기업의 고유 디자인을 적용하여 개성 넘치는 지도를 만들고, 공공기관들은 이 위에 통계, 토지피복, 부동산, 임상, 자원분포, 지하시설 등의 정보를 얹어서 각종 주제도를 그린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될 각종 지명과 국토정보의 표준을 배포해 ‘우리니라 지도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 1. 국토지리정보원은 6과 20계의 편제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지도 제작의 시작점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2017년 6월 기준)
그림 1. 국토지리정보원은 6과 20계의 편제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지도 제작의 시작점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2017년 6월 기준)

이런 역할을 하다 보니, ‘지도’깨나 한다고 자부하는 업체들과 ‘한 지도’ 한다는 관계자들은 죄다 국토지리정보원에 출입하게 마련이다. 공간정보업계의 모태와도 같은 기관으로, 이곳을 방문하면 이 업계의 ‘일가친척’과 수시로 마주칠 수 있다. 물론, 필자 그리고 필자의 소속회사 역시 그 집안의 일원이다. 그런 곳으로의 발걸음이 마땅히 기쁘고 들떠야 할 텐데, 그날의 발걸음은 성경 속 탕자가 고향으로 향하던 것 마냥 진중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 제안 혈투를 벌이다
이번 방문 목적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주한 모 프로젝트에 대한 경쟁입찰 제안발표였다. 몇 날 며칠 매달렸던 제안 작업의 종지부를 찍는 최종 절차로, 오늘은 소속회사를 대표하는 수장의 자격으로서 나섰다. RPG 게임으로 치자면 실전 전투력 지수가 그다지 높지 않은 ‘책사(策士)’형 캐릭터이지만, 오랜만에 고향 방문하라고 보낸 듯이 출전 대표장 수로 배정되었다.

프로젝트 입찰 경쟁은 극명한 All or Nothing 게임이다. 아무리 많은 업체가 경쟁하더라도 오직 1등만이 인정받는 치열한 싸움이다. 2등 따위는 의미 없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영업활동을 하는 B2C 성격의 회사라면 굳이 1등이 아니더라도 상위 등급에만 머물면 큰 무리 없이 기업을 영위할 수 있지만, 수주 위주의 사업을 펼치는 B2B(혹은 B2G) 업체로서는 언제나 전쟁과도 같은 제안 전쟁을 펼치게 된다.

2등부터는 모두 동일한 패배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늘 이런 전투를 마치고 나면 가사와는 상관없이 Abba의 ‘The winner takes it all’ 노래가 떠오르곤 한다. 수주와 실주의 희비가 교차되는 결정의 순간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승리한 자는 사업 수행을 준비하고, 패배한 자는 다음 사업 제안을 준비한다.

○ 원점을 찾아 오르다
내 제안발표 차례를 마치고 제안평가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국토지리정보원 한 켠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랐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고산자 김정호 동상을 만날 수 있고, 그 동상 뒤편에 있는 언덕으로 조금 더 오르면 다소곳이 놓여 있는 동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놓여 있다는 표현은 사실 적절치 않다. 절대 움직이지 않도록 박혀 있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느낌상으로는 커다란 동전마냥 놓여 있긴 하다.)

그림 2. 국토지리정보원 관내 동산에는 대한민국 경위도원점이 놓여 있다
그림 2. 국토지리정보원 관내 동산에는 대한민국 경위도원점이 놓여 있다

동경 127도 03분 14.8913초, 북위 37도 16분 33.3659초, 원방위각 3도 17분 32.195초(2002년 세계측지계좌표 기준) 지점에 위치한 그 동판이 바로 ‘대한민국 경위도원점’이다. 즉, 우리나라의 지도 제작을 하기 위한 측지측량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곳이다. 등산을 하다가 산봉우리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삼각점’의 어머니라고도 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건설부 국립지리원’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연륜마저 느껴진다. 국가에서 대한민국 경위도원점을 지정하기 전에는 일본의 동경원점을 기준 삼아 삼각측량을 통해 우리나라의 좌표를 구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측량의, 더 나아가 지도의 자주독립선언과도 같은 점이다. ‘배꼽’과도 같은 이 점을 기준으로 지도를 구성하는 다양한 점, 선, 면의 탯줄이 뻗어나가며, 이들이 모여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도가 만들어진다.

명상이 필요할 때 이곳에 방문하는 것은 몇 년 전 국가기준점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때 생긴 버릇이다. 느린 걸음으로 언덕에 올라서 한참동안 그 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지럽던 생각이 영점을 찾아 리셋되는 느낌이 들어서다. 한없이 복잡하고 어렵게만 여겨지던 공간정보도 막상 따지고 보면 단순해 보이는 한 점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지고, 어수선하게 얽힌 생각 역시 찬찬히 쫓아가보면 사실 별 게 아닌 고민의 시발점을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참을 멍한 상태로 서 있다가 내려온다.

○ 다시 지도를 생각하다
얼마 전, 이 칼럼 ‘맵인사이트’을 통해 연이 닿아서 이 업계의 저명한 박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그리고 긴 담화 끝에 과제 하나를 숙제처럼 맡게 되었다. 과제와 숙제는 의미는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과제는 업무처럼 여겨진다면 숙제는 숙명처럼 여겨진다. ‘공간정보의 미래상을 인문학적 시각에서 본다면’이 핵심 주제였다.
제안서 작성기간 동안 짬짬이 관련 자료조사를 하고 나름의 논리를 세워 보려고 노력했으나 생각만큼 쉽진 않다. 전문 미래학자가 아닌 이상 미래의 모습이 좀처럼 눈앞에 그려지지 않는다. 한 편의 짧은 공상과학소설을 집필해야 하나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게다가 전제조건인 ‘인문학적 시각’이라는 것도 꽤 큰 걸림돌이었다. ‘인문학 기반의 공간정보 기획자’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아이덴티티인 냥 내세우고 있었던 차여서 부담감은 만만찮다.

중간점검 차 박사님과 가벼운 접견을 했고, 진행사항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주로 고충 상담)를 나누었다. 박사님은 너무 무리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음과 같은 조언을 건넸다.

- 임 선생(이런 호칭은 무척 부담되고 쑥스럽기만 하다)은 칼럼을 쓸 때 ‘공간정보’라는 단어 대신에 왜 ‘지도’라는 단어를 쓰나요?
- ‘공간정보’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해서요. ‘지도’라고 말하면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데...
- 바로 그거랍니다. 어려울 필요 없어요. 그냥 미래의 지도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면 돼요. 과거 선조들은 왜 지도를 그렸는데, 현대 우리는 왜 지도를 보는지, 그리고 미래 인류들은 지도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 같네요. ‘사람’을 생각하고 ‘지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게 ‘인문학 기반의 공간정보’일 테니까요.

짧은 대화였는데, 배웅 후 사무실로 올라오는 길에 계속 잔향이 남아 머리 속에 맴돈다. 그래, 그냥 ‘우리가 이용하는 지도’를 생각하면 되는 것인데 너무 어렵게 ‘공간정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모든 것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술은 창(窓)이다’는 말의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종종 새겨보게 되는 문구다. 기술이라는 것은 창문을 통해서 창밖의 다른 세상을 보게 하는 역할인데, 기술 자체에 매몰되다 보면 창틀의 종류와 문양, 유리의 재질과 두께 등에 사고가 갇혀서 정작 창 안의 사용자나 창밖의 풍경을 쳐다보지 못하게 된다. 필요에 의한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위한 기술이 되고 만다. 딱 그 모양새다.

○ 원점 앞에 다시 서다
제안하는 모든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는 없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워낙 출중한 상대들을 만나서 프로젝트 수주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리 레전드급 타자라고 해도 10번의 유효타석에 4번 이상의 안타를 기록하기 어렵고, 아무리 능력 있는 골키퍼라고 한들 모든 슛을 막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며 스스로 위로했다.(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에는 그 날 필자와 일기토를 벌였던 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마치 제 탓인 냥 미안해하는 동료를 토닥거리는 것도, 고생 많았다는 말을 얹어 건네는 소주잔으로 얼른 기억을 털어내어야 하는 것도 패장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다. 사무실 책상 앞에 다시 앉아 제안서 작성 파일을 정리하며 원점으로의 복귀를 느꼈다. 다시 영부터 시작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는 다시 지도를 떠올렸다. 어쩌면 나 역시 ‘지도를 위한 지도’에 사로잡혀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지도도 일종의 ‘창(窓)’ 아닐까? 지도를 통해서 내 주변을 살펴보고, 저 멀리 세상을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세계를 보고, 그 위의 정보를 보게 만드는 통로이지 않을까?
그렇게, ‘지도’라는 원점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이제, 다시 새로운 선을 연결할 준비를 한다.

임영모 0duri@naver.com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컴퓨터잡지사 기자로 시작하여, 애니메이션, 출판, 모바일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GIS 업계에 종사한 지 10년이 넘었다. 현재는 ㈜지오투정보기술에서 인문학 기반을 활용한 다양한 공간정보 기획을 맡고 있다. 본 칼럼에서는 일반인들도 쉽게 공간정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공간정보의 다채로운 활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넥스트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