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창가에서 기타를 치며 ‘Moon River’를 노래하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이 감미로운 노래의 멜로디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자니 머서가 즉석해서 ‘June River(유월의 강)’란 제목을 붙인 일화는 유월의 전설이 되었고, 작곡가 헨리 맨시니는 이듬해 아카데미 최우수 주제가상 수상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에 기여했다. 허클베리 핀과 짐의 우정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가사는 마크 트웨인을 향한 헌사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트루먼 커포티의 쓸쓸했던 유년시절 추억과 오두막을 연상 시키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 같은 저력이 있다.

보수적인 제작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장면을 고집한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용기는 옳았다. 원작자인 트루먼 커포티는 주인공으로 ‘마릴린 먼로’를 갈망했다가 ‘오드리 헵번’이 캐스팅 된 것을 못마땅해 하며, 뉴욕과 홀리에게 밋밋하게 감상적으로 다정해졌고 얄팍하게 예뻐졌다고 푸념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출간된 이 소설의 표지에는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의 얼굴이 인쇄되었을 줄 알았는데, 담배를 피우는 트루먼 커포티의 부담스러운 얼굴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침울한 눈망울의 왜소한 작가 얼굴은 영화적 상상력이 낳은 편견을 과감하게 부셔주며, 마치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느낌이다.

“홀리 골라이틀리는 그 오래된 사암 건물의 세입자였다. 바로 내 아래층 아파트에 살았다. 조 벨로 말하자면, 렉싱턴 대로 모퉁이에 있는 술집 주인이었다. 지금도 아직 그 술집을 하고 있다. 홀리와 나 둘 다 하루에 예닐곱 차례씩 그 술집에 들르곤 했다. 언제나 술을 마시러 갔던 건 아니고, 가끔은 전화를 걸려고 가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개인 전화는 연결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조 벨은 오는 전화도 잘 받아주었는데, 홀리의 경우에는 걸려오는 전화가 엄청났기 때문에 사소한 친절이 아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 10쪽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노랑 택시를 타고 맨하탄 5번가에 내려 티파니 보석가게 앞에서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홀리의 모습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홀연히 사라진 홀리를 그리워하는 두 남자의 회상으로부터 점화된다.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 사는 화자는 아래층에 사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 홀리의 경계심 없는 접근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깊은 밤이나 새벽에도 아랑곳 않고 현관문을 열어 달라고 이웃집 초인종을 눌러대는 밤낮이 바뀐 검은 선글라스의 여인은 창가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술 취한 남자를 피해 비상구를 통해 도망쳐 나와 창문을 두드린 그녀와의 첫 만남은 애틋한 기쁨이었다.

그녀는 작가 지망생인 화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작가들은 다들 늙은 사람인 줄 알았다는 천진한 말과 함께, 헤밍웨이도 늙었느냐는 물음에 아마도 마흔 살쯤 되었을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그 정도면 다행이라며 자신은 마흔두 살은 넘은 남자라야 끌린다고 고백한다. 그러한 자신을 파더 콤플렉스가 있는 거라 비난한 여자에 대한 흉을 보면서 서머싯 몸이나 윌리엄 사로얀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작가와 동침해 본적이 없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떠벌린다. 화자의 친절에 감사하며 자신의 오빠 프레드를 닮았다며 경계심을 풀고 이내 친구가 되어 함께 밤을 지새운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신뢰감 가득한 우정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면회객은 모두 최고의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해요. 그게 정답고, 끝내주게 다정한 거죠. 여자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오고, 늙은 사람도 정말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좋은 냄새를 풍기도록 살뜰히 노력한답니다. (중략) 가끔은 면회실이 꼭 그래요, 파티 같지. 어쨌든 영화에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아요. 알잖아요, 철창살 사이로 우울하게 소곤소곤 속삭이고. 그런 창살은 아예 없어요. 그저 사이에 기다란 테이블이 하나 있죠. 애들은 한 번 안겨보려고 거기 올라가기도 한답니다. 키스하려면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내가 제일 마음에 드는 건요, 다들 서로 만나서 무척 기뻐한다는 거예요. 할 얘기도 많이 쌓아놓아서 지루할 틈이 없어요, 계속 웃고 손을 잡고, 그 후에는 참 달라요.” - 36쪽

어떤 이야기든 거리낌 없이 풀어가는 매력적인 이 여인은 개인사에 관련된 질문만큼은 콧잔등을 긁으며 화제를 돌려버린다. 확실한 벌이 없이 밤에 활동하는 그녀의 고정 수입이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싱싱 교도소로 샐리 토마토라는 갱단 두목을 면회하는 일이었다. 매주 목요일이면 8시 45분 열차를 타고 찾아가 면회 과정에서 그와 ‘일기 예보’를 주고받는 대가로 100달러를 벌어들인다는 그녀의 행동은 수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소설과 영화 속 자유분방한 그녀의 생활 태도 때문에 매춘부 논란이 뜨거웠던 1968년,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트루먼은 “직업은 없지만 돈을 내주는 남자들을 따라 최고급 식당과 클럽을 전전했고, 동행이나 합석의 조건으로 소정의 선물을 줘야했던 미국의 게이샤와 같은 부류의 여인들 문화에 따라 홀리는 정확히 콜걸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옹호했다. 홀리의 시대인 1943년이나 1944년에 그런 여자는 무척 흔했다고 말이다. 영화에서는 마냥 사랑스러운 홀리지만 원작 소설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홀리는 좀 달랐던 것이다.

트루먼은 뉴올리언스의 불안정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기죄로 감옥을 들락거리다 벼락부자가 된 아버지와 철없는 어머니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엉망인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첫 기억은 앨라배마의 어머니 친척집에 맡겨져 눈칫밥을 먹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혼 후에도 아들의 양육권을 놓고 너저분한 싸움을 통해 상처에 소금을 뿌렸던 최악의 부모를 통해 형성된 그의 분위기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린 트루먼은 앨라배마 주의 작은 마을, 먼로빌 친척집에 맡겨진 5년 동안 두 살 어린 이웃집 소녀 넬 하퍼 리와 교유했다.

사내 아이 같았던 하퍼 리와 계집애 같았던 트루먼은 소꿉친구가 되어 각자 부모의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우정의 끈을 이어간다.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이웃집 소년 딜은 트루먼이었고, 트루먼의 첫 장편 ‘다른 목소리, 다른 방’에서 이웃집 소녀 아이다벨은 넬이었다. 트루먼의 ‘인 콜드 블러드’ 집필을 위한 취재에도 동행했을 만큼 두 사람은 가까운 벗이었다. 불후의 명작 ‘앵무새 죽이기’로 하퍼 리가 유명해지고 퓰리처상을 수상했을 때 트루먼의 질투가 극에 달하기는 했으나 두 사람의 오래된 인연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트루먼이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뉴욕으로 불려가고 새 아버지 커포티의 성을 따른 후로도 그들의 우정은 지속되었으나 새로운 만남도 있었다. 스무 살 무렵 ‘뉴요커’지의 원고 심부름꾼으로 활동하는 동안 수많은 위대한 문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로버트 프로스트는 악연이었다. 그 명성 높은 시인의 낭독회에서 자신도 모르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해고되는 아픔을 겪은 것이다. 여러 크고 작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작가로서 명성도 얻고 안정을 찾아갈 무렵 어머니가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다. 어머니와 사별한 4년 뒤에 창조된 홀리는 바로 그 애증의 존재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난 그 사람이 얘들을 낳았다고 하지 않았소. 걔들의 소중한 친엄마, 소중한 여자, 하느님 그 사람의 영혼을 굽어 살피소서, 그 사람은 1936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세상을 떠났어요. 몹시 가물던 해였지. 내가 룰러매와 결혼한 건 1938년 12월이었소. 그 사람이 열네 살 되던 때였지. 아마도 보통 사람이라면, 고작 열네 살에 사리분별을 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룰러매 알잖소. 그 사람은 남다른 여자였어요. 내 아내와 애들 엄마가 되겠다고 약속했을 땐 자기가 뭘 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도망가 버렸을 땐 우리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지.”

집 나간 아내를 찾아 5년이나 수소문하다가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늙은 수의사 닥 골라이틀리가 이제는 홀리라고 불리는 ‘룰러매 반스’의 과거를 들려주는 과정은 어이가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지만 너무도 진실하게 다가오는 아픔이 있다. 아내와 사별한 그가 초라한 행색의 프레드와 홀리를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는 우유랑 칠면조 알을 훔쳐 먹다 자신의 큰딸에게 붙잡혀 온 것으로 시작된다. 그 사연을 진지하게 들려주는 그 늙은 수의사 닥 골라이틀리는 결국 집 나간 아내와 재회를 하지만 그녀의 차분한 설득 끝에 쓸쓸하게 고향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작 열네 살에 결혼하고 곧장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는 홀리의 기구한 인생이 가슴이 아프다. 조 벨의 바에서 낮술을 마시며 절대 야생 동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이 닥의 실수였다고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기묘한 과거를 마무리하는 인생이 애처롭다. 언제나 당당하게 생활하며 사회적 법과 규율 보다 스스로의 윤리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그녀의 원칙은 높은 자존감으로 빛난다. 스스로가 레즈비언일 수 있다고 말하고, 사랑의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다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홀리의 진보성은 21세기에도 전혀 녹슬지 않은 매력이 있다.

그 일은 공교롭게도 9월 30일, 내 생일에 벌어졌다. 내 생일이라는 사실이 사건에 별다른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다만, 내 가족이 그날을 금전이라는 형태로 기억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집배원의 아침 배달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 빼면. 사실, 나는 아래층에 내려가서 집배원을 기다렸다. 내가 현관에서 서성거리지 않았다면 홀리가 내게 승마를 가자고 청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 인생을 구할 기회도 갖지 못했을 것이었다. - 120쪽

낙마 사건이 시작되는 이야기에서 화자의 생일과 일치하는 작가를 읽어냈다. 그날 석간신문에 홀리가 남녀 형사 두 명 사이에 껴서 체포된 사진과 함께 플레이걸 마약 추문, 마약 밀수 여배우, 미모의 조직원 구속 등의 헤드라인으로 신문을 장식했다. 그 참담한 상황에서도 홀리는 갱단의 애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검은 안경, 헝클어진 머리, 시무룩한 입술에 매달린 피카윤 담배도 그 인상을 덜지 못했다. 고작 스무 살인 그녀가 수감 중인 조직폭력배 살바토레 ‘샐리’ 토마토와 연관된 국제 마약 밀수 조직의 핵심 인물로 기소된 것이다.

신문에는 호화스런 아파트에서 체포되었다고 나왔지만 홀리는 낙마한 화자의 아파트 욕실에서 상처를 살펴주고 약을 발라주던 민망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당당한 홀리는 자신을 끌어내는 두 경찰을 향해 그 시대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을지 모를 인종 차별적 발언으로 당당하게 맞섰고, 여경의 심기를 건드려 세차게 뺨을 맞았다. 휘청거리는 홀리가 아픈 친구를 돌보기 위해 들고 있던 약병을 떨어뜨렸고, 화자는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에 발가락을 베인 벌거벗은 몸으로 복도를 따라나서며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홀리는 흔들림 없이 당당하다.

“잊지 마요! 고양이 먹이 꼭 줘야 해요!”라는 말만 남기고 끌려가는 여유로운 그녀와 달리 그녀의 친구들은 혹시나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노심초사 외면하며 떠나간다. 결혼을 약속했던 호세의 유약한 이별 편지는 냉혹한 현실을 적절하게 보여준다. 오로지 조 벨과 화자가 억울한 죄목으로 중형이 예고된 그녀를 위해 발 벗고 뛰게 되고, 홀리의 부자 친구인 오제이 버먼을 수소문한 끝에 겨우 보석금을 마련한다. 그렇게 풀려난 그녀는 비 내리는 날 머뭇거림 없이 도주하고, 샐리 토마토는 싱싱교도소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고 사건은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봄에 엽서 한 장이 도착했다. 연필로 흘려 쓴 엽서에는 서명 대신 립스틱 키스 자국이 있었다. “브라질은 짐승같이 흉악한 곳이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정말 좋아요. 티파니 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해. 정말 근사한 세뇨르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어요. 사랑? 그런 것 같아. 어쨌든 살 곳을 찾고 있긴 해요(이 세뇨르는 아내도 있고 애들도 일곱). 주소 보낼게요, 내가 살 곳을 알게 되면. 밀 탕드레스.” - 156쪽

갱단의 마약 밀매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 홀연히 사라져버린 홀리. 스카프처럼 언제나 가볍게 세상을 떠도는 그녀의 인생은 고라이틀리(Golightly)라는 이름과도 너무 잘 어울린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을 발견하며 이 작품을 음미하는 재미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트루먼의 한 친구가 뉴욕에서 가장 좋은 식당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티파니에서 아침 식사를 먹으면 좋다.”는 짓궂은 친구들의 웃음 섞인 대답이 있었다. 세계 최대의 도시라는 뉴욕 그 거친 세계에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상징으로 제목이 되었다는 깃털 같은 사연도 웃프다.

바람은 우리 모두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나뭇잎과 들판을 지나며 그 목소리들을 다시 불어 보낸다는 커포티의 젊은 시절 글귀가 생각하며 읽고 또 읽었다. 젊은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통제된 간결함과 유머 넘치는 명문장에 기가 죽었노라 고백했다.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노먼 메일러는 아무리 노력해도 두 단어 이상을 바꿀 것이 없는 완벽한 소설이라고 극찬했다. 며칠 전에 만난 친구가 이 책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책과 애인은 절대로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농담과 함께 손 때 묻은 책을 선물했다. 아내는 앞서 자신의 생일날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에 1,056권의 책을 기증했다. 모든 것이 홀리처럼 가볍다. Go Lightly!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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