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수린의 소통팔달(疏通八達)] 놀이, 인간, 그리고 디지털

발행일시 : 2017-07-12 00:10

 이향선 기자 (hslee@nextdaily.co.kr)

[노수린의 소통팔달(疏通八達)] 놀이, 인간, 그리고 디지털

외국에는 없는 우리나라 기업의 직책이 있다.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다. 그러나 용병술 좀 한다는조직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늘 존재하는 자리이다. 바로 '술상무'이다. 술상무는 그 명칭에서 보듯 술과 접대가 업무이다. 회사의 대외 업무가 매출과 성과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기업에 주로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대 기업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 술자리 문화가 중요한 것이 현실이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그래서 술상무는 주량이 세고 자리를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자리가 단순히 술만 잘 마신다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좌중을 압도할 기대감을 주어야 한다 이 기대감은 술상무의 개인적인 매력에 비례하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끌고 집중시키는 능력이 뛰어나서 함께하면 즐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근한 기대의 이면에는 이 사람이 밤 문화를 잘 알고 주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그들의 설레임이 자리한다. 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오늘 술자리는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꿈과 모험의 세계가 가능할 것 같다는.

그래서인지 꼭 대외 업무가 주가 아닌 기업에서도 임원들의 단합을 위해 술상무 역할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서로 술상무의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조용한 경쟁도 일어나기도 한다. 술상무란 어찌되었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경험상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나 일본 그리고 중국과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더 많이 보인다. 중국이 경제권을 잡고 있는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서구보다는 아시아권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을까.

이 국가들의 특징은 단시간 내에 제조와 건설 중심의 고도 성장을 이룬 국가들이다.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집단화 성향이 강하다. 이 국가들의 구성원들은 지난 세대 동안 늘 바빴다. 놀 시간이 없다. 생산성의 증대에 집중해야 했고, 효율성을 실현하기 위한 경쟁과 도태 의식이 생활화 되어있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바쁜 꿀벌들이다. 여가 시간도, 감성에 충실할 시간도 없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한 생산(creation)만으로 평가되다 보니, 여가와 유흥을 통한 재생산(re-creation)을 즐겨본 경험이 없었다. 심지어 놀이와 유흥에 대한 죄책감이나 위축감을 갖게 되기까지 한다.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영향도 크다.

[노수린의 소통팔달(疏通八達)] 놀이, 인간, 그리고 디지털

인류는 Homo Faber, 즉 도구를 만들어 일하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Homo Ludens, 노는 인간이기도 하다. 휴식과 여가, 나아가 놀이는 '다시 생산하기 위한(re-create)' 생산의 전제 조건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일하기 위해 놀고, 놀기 위해 일한다. 심지어 네덜란드의 철학자 요한 호이징거는 '인간의 놀이가 문화보다 오래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인간의 문화는 놀이의 결과라는 이야기이다. 놀아야 일할 거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고도성장기에 자신을 버리고, 놀이를 버리고, 생산에 몰두한 우리의 '아버지들'. 그들은 제대로 된 놀이가 무엇인지 익힐 기회도 계기도 없었다. 그러나 뿌듯한 생산 결과물을 쌓아 놓는다고 놀이에 대한 목마른 본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이 하나 둘 모여 집단 무의식이 되어 누군가가 불을 지펴 주기를 바란다. 그 대상이 술상무다.

제조와 건설을 잘하게끔 요구되는 남성중심의 고도성장 사회. 그 안에 놀이는 문화가 없다. 늘 생산경쟁을 하던 그들은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긴장도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도 불안했다. 놀아본 '가닥'이 없는 세대들, 술이 없으면 놀 수 없는 이들. 낮에는 일해야만 했던 이들에게 놀이란 밤유흥와 술로 국한된 빈곤한 영역이었다. 그래서 셋만 모여도 술상무는 필요했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 밤의 유흥 세계에서 가장 잘 놀아본 사람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유흥을 동경하며 다른 한편으론 배격하는, 생산과 재생산의 불편한 '내외'의 시절이었다.

경제가 완숙기에 들어섰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던 경제가 한 풀 그 성장폭을 꺾고 실업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면 되었던 제조업의 시절이 저물고 이제는 서비스다. 서비스는 아이디어와 감성의 이해로 구성된다.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21C 경제는 IT를 기반의 디지털 혁명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바야흐로 전 영역의 디지털 변환(Transformation)이 진행되고 있다. 모든 서비스는 IT기반의 새로운기획이 요구되고 있다. 서비스 Re-creation의 시대인 것이다.

기술과 자본이 만나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 더욱 부각되지 않을까 우려가 높은 지금이다. 기술에서 가지를 치는 기술, 자본이 투입된 만큼의 산출을 요구하는 기술은 사람을 기술에 적응하도록 강요하기 마련이다. 이런 암울한 디지털 디스토피아는 피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서비스 재창조(Re-creation), 디지털 변환(Transformation)의 시대를 인간 중심으로 균형있게 발전시켜줄 핵심 요소일까.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디지털 혁명은 사람의 본능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때, 어떻게? 가 항상 문제다. 해답은 바로 re-creation의 본질에 있다. 바로 노는 것이다. 우리 모두 ‘놀아야’ 한다.

[노수린의 소통팔달(疏通八達)] 놀이, 인간, 그리고 디지털

문화보다 오래 되었다는 '놀이' 를 통해 Homo Ludens를 실현함으로서, 우리는 스스로의 본질을 재발견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데이터화 되어 새로운 관계로서 재정의되는 디지털 혁명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충실한 본능에 의해 재발견되는 사람의 진정한 속성을 우리는 그간 성장 구호를 외치면서 잊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부정적인 면을 억제하는데 급급하다 보니 반짝이는 인간성의 차원을 서로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와 우리가 함께 행복해지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이 서비스의 진정한 본질이다. 디지털은 이것을 도와주는 놀이 도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 때의 놀이는 지금의 술상무가 주도하는 단선적 집단적 유흥 문화는 아닐 것이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와 경험 그리고 다층적인 지식 욕구와 인정 욕구에 기반한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이 놀이의 본질이다. 이로서 Homo Ludens의 놀이는 Homo Sapiems의 생각과 지향을 담아, 도구가 되는 IT를 쓰는 Homo Faber의 모습으로 인간답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중심의 IT가 제대로된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한 잔의 술 정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지는 아주 유용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AI가 감정의 패턴을 인식한다 하더라도 희노애락을 증폭하는 술을 마시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노수린 suerynnroh@gmail.com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언론홍보 석사, MBN 기자, KTF 해외마케팅과 플랫폼 기획팀장을 거쳐, IoT스타트업 운영과 컨설팅 및 교육 강의를 해왔다. 현재 한림대 사회학과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IT는 사람의 행복과 가치추구를 위해 서비스와 콘텐츠로 관계를 연결하는 장치라 생각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용한 오픈 IT를 기반으로 사용자UX가 주권처럼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많은 이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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