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란 대세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운 분위기에서는 누구나 멋진 말을 할 수 있다. 멋진 생각을 글로 남기거나 말로 옮기는 연예인, 선생님 그리고, 매력적인 오빠들은 우리 주변에 차고 넘친다. 문제는 그의 말과 행동이 일관성을 갖고 자기 자신과 주변, 세상의 변화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가에 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극소수의 영웅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복잡하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다른 수많은 경쟁자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는 무모함으로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하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진리와 함께 말조심하라는 선현들의 가르침은 후손들에게 안온하고 행복한 세상살이를 보장한다. 하지만, 순리를 따르는 다수가 침묵할 때, 현상에 적응하며 생존에 급급할 때,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뚝심으로 신념을 불태우며 부당함에 저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온 역사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겠다.

“용기는 두려움을 버리는 게 아니다. 용기란 두려움을 직면하는 의지, 평생 위험에 맞서는 의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반드시 해내는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작가들은 알리가 리스턴을 두려워하고 입대를 두려워하고 ‘이슬람국가’를 외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알리는 두려웠지만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에 맞설 만큼 충분히 분별이 있고 담대했다. 알리는 인생에서 다운된 적도 있었고 다시 일어날 용기도 있었다.” - 223쪽

1942년 1월 17일, 루이빌에서 태어난 ‘캐시어스 클레이’는 포스터의 명곡 ‘켄터키 옛집’이 울려 퍼지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자랐다. 노예 소유자이면서도 동시에 노예 폐지론자였던 그 지방 유력 정치인 ‘헨리 클레이’의 이름을 이어받은 검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이름을 그대로 물려줬다. 아버지는 간판 그림을 그리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어머니 오데사는 십대부터 시작한 가정부 생활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매사 긍정적인 침례교도였다. 철저한 흑백 인종 분리 정책에 따라 백인전용 식당과 학교, 버스, 극장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피부색 때문에 마실 수 없는 음수대를 바라만 보는 그저 검은 소년이었다.

열두 살 클레이는 아끼던 자전거를 도둑맞고 화가 났다. 분하고 속상해서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컬럼비아체육관의 경찰관 조 마틴은 누군가를 두들겨 팰 생각이라면 싸우는 법부터 배우라고 조언했다. 루이빌 그레이스 주민센터의 프레드 스토너는 소년에게 상냥한 말로 신뢰와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착하기만 했던 삐쩍 마른 소년은 그때부터 체육관에 나가기 시작했다. 특별한 자질은 없었지만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꾸준하게 권투에 몰두했다. 검은 청년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던 시절에 두 사람의 다정한 스승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은 고교를 중퇴하고 권투에 모든 것을 걸었던 클레이가 세계무대에 존재감을 드러낸 축제였다. 올림픽 금메달로 금의환향한 클레이를 위해 고향의 부자 백인들이 ‘루이빌 후원회’를 만들어 생계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권투에만 집중하라고 지원을 약속하며 격려했다. 그렇게 만난 트레이너는 스물아홉 살이나 더 많은 신중한 노장 아치 무어였다. 약관의 클레이는 끊임없이 떠들어대며 텔레비전에서 시를 암송하는 잘생긴 흑인 청년으로 ‘루이빌의 떠벌이(The Louisville Lip)’라는 별명을 얻었고 호불호가 엇갈리는 흥행카드로 성장했다.

클레이를 경멸하는 권투 팬들은 갈색폭격기 ‘조지프 루이스 배로’를 자주 언급했다. 그는 겸손했고, 흑인의 전통적인 지위에 도전하지 않는 소박하고 매너 있는 존재로 설익은 클레이와 비교할 수 없는 KO 주먹을 검증받은 자랑스러운 미국인이었다. 전 스승 아치 무어가 경제적인 문제로 아들 뻘 제자에게 도전했을 때 클레이는 그를 4라운드에서 KO 시키겠노라고 떠들었고 원하는 대로 승리하며 기고만장했다. 이후, 클레이는 매 경기마다 상대를 몇 라운드에서 KO시키겠노라 떠들어대는 악동이 되었다. 자칭 ‘더 그레이티스(The Greatest)’라 할 만큼 한없이 경솔했다.

베트남전이 발발했을 당시 흑인 선수들은 대개 침묵했다. 잘 나가는 흑인들은 애써 비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며 백인 동네로 이사하기도 했다. 약관의 클레이는 디트로이트까지 직접 운전을 해서 블랙 무슬림(Black Muslim)의 지도자 ‘엘리야 무하마드’의 연설을 들었고, ‘맬컴 엑스’를 만나며 주변을 당황시켰다. 이듬해 피츠버그에서 찰스 파월을 3라운드 만에 KO 시켰고, 뉴욕에서 더그 존스를 10회 판정승으로 물리친 후, 런던으로 건너가 헨리 쿠퍼를 5라운드 TKO로 제압했다. 비틀즈와 어울려 홍보 영상을 찍고 영국의 귀족들과 어울리는 세계적인 스타로 급부상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평화대행진이 있었다. 킹 박사가 그 유명한 ‘I have a dream’라는 연설을 했고, 흑인사회에서 민중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1월 22일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하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격동의 시절, 주류 사회의 미국인들은 그 어리석은 청년이 정치에 무관심하기를 바랐지만 침묵하지 않는 것이 ‘루이빌의 떠벌이’다웠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라고 일갈하며 엘리야 무하마드와 킹 목사, 맬컴 엑스 등과 함께 할 것임을 선언했다.

1964년 2월 25일, 스물두 살의 클레이는 역대 최강의 핵주먹이자 암흑가 출신 무적의 ‘소니 리스턴’을 침몰시켰다. 마이애미비치 결투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짜릿한 7라운드 TKO승으로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노예에게 부여한 성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이슬람국가(Nation of Islam)의 지도자로부터 ‘무하마드 알리’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기자들에게 자신이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고, 백인 여자와 혼인할 생각도 없으며, 백인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는 않을 것임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링 옆의 관중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클레이는 뛰어난 권투 선수처럼 보였고 챔피언 리스턴은 굼뜨게 터벅거리는 듯했다. 과연 클레이는 전체 경기 내내 리스턴을 피해서 춤추듯 움직일 수 있을까? 별안간 리스턴이 로프에서 클레이를 붙잡았다. 클레이가 리스턴의 머리를 자신 쪽으로 잡아 내렸다. 리스턴이 입을 틀어막고 싶어하는 풋내기가 바로 코 앞에 있었다. 클레이의 몸통에 한바탕 맹렬한 펀치를 퍼부었다. 크레이가 로프를 떠나자 리스턴이 뒤쫓아 돌진했다. 다시 클레이가 번개같이 잽을 날리다 리스턴에게 펀치를 내리쳤다. 날랜 오른손 펀치에 리스턴이 순간 멈칫하더니 돌연히 클레이에게서 물러섰다. 리스턴은 춤을 추려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리스턴의 움직임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고 장담하던 클레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25쪽

이듬해 맬컴 엑스가 암살당하고, 흑인사회가 대혼란에 빠지는 동안에도 알리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루이스턴에서 있었던 소니 리스턴과의 재경기에서 1회 KO승으로 압도했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블랙무슬림과 그들이 상징하는 것을 경멸한다고 선언한 기회주의자 플로이드 패터슨을 12라운드 TKO 승으로 입 다물게 했다. 베트남전은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했는데, 어리석은 알리는 반전 평화를 외치며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주류사회는 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싶었다.

적당히 타협하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될 수 있었으나 챔피언은 우직하게 세상의 변화를 요구했다. 1966년 토론토에서 조지 추발로, 런던에서 헨리 쿠퍼와 브라이언 런던, 프랑크푸르트에서 카를 밀덴베르거, 휴스턴에서 클리블랜드 윌리엄스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1967년 뉴욕에서 어니 터렐과 조라폴리를 연속해서 쓰러뜨릴 때까지 최강의 주먹을 자랑하던 그가 소환되었다. 링에서 패한 적 없던 스물다섯 살 알리의 입대거부는 재판 끝에 유죄로 인정되어 챔피언 지위까지 빼앗았다. 징병위원회는 알리의 행동이 전체 흑인들에 확산될 것을 두려워했고, 알리는 담대했다.

알리는 브로드웨이 연극 배우로 활동했고 노래도 불렀다. 20대 중후반 육체적으로 절정의 시기에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 알리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변했고, 베트남전에 대한 국민 여론도 알리의 주장에 걸맞게 우호적으로 변해갔다. 알리 스스로 자신은 타인종에 적개심 없는 그저 강인한 흑인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처세하며 자신을 향한 동정론을 극대화시켰다. 부자 흑인들이 많은 애틀랜타에서 스물여덟의 알리가 돌아왔다. 3년 동안 쉬었던 알리는 예전보다 덜 민첩했으나 제리 쿼리를 상대로 3라운드 TKO 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대담한 스타일과 매력을 지닌 데다 끊임없이 불거지는 논란의 주인공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에 새로운 차원의 관심을 불러왔고 권투 시합의 수입 수준을 급격하게 바꾸었다. 알리의 대중매체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결과였다. 알리 앞 세대의 선수들은 말하지 않고, 언급되기만 했다. 조 루이스 시절을 살았던 권투 팬들은 오랜 시간 타이틀을 지녔던 그 남자에 대해 별로 말할 게 없었다. 팬들이 루이스에 대해 아는 것은 기자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알리는 시합과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매체를 이용했다. (중략) 무하마드 알리는 역사상 다른 어떤 권투 선수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링에서 알리를 상대한 선수들도 알리 없이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얄궂게도 그 선수들 대다수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128쪽

모든 권투 경기는 상처와 더불어 끝난다. 경기가 끝나면 몸에는 상처가 가득하고, 어떤 경기는 영혼에까지 상처를 입힌다. 관중들은 로프에 어쩔 수 없이 기대거나 링 바닥에 심하게 비틀거리는 선수에게 계속 싸우라고 소리 지를 수 있지만 진짜 선수의 주먹을 비스듬하게라도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몸이 그만두라고 비명을 지를 때 그만두지 않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팬들은 알지 못한다. 무하마드 알리는 턱뼈가 부셔진 채로 끝까지 싸운 적도 있었다. 링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류 세력들의 반격을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굳건하게 흑인이자 이슬람교도로서 자신의 종교적 소명을 공표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 험한 길을 걸어간 진정한 챔피언이었다.

그는 기득권 사회규범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는 길을 거부했다. 고도로 상업화된 미국 사회에서 위대한 스포츠영웅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달콤한 것들을 거부한 대가를 기꺼이 감내했다. 결과론적으로 3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지만 육체적으로 최고의 전성기에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했던 그 결단의 순간은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1974년에 펼쳐진 조 프레이저와 조지 포먼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위대함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지만... 전성기가 한참 지난 나이에 레온 스핑크스, 트레버 버빅과의 경기에 임한 것도 용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무표정한 성화 봉송주자 알리를 기억하는가? 그것은 결코 추하지 않았고 힘든 모습 그대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준 순간이었다. 세 번의 결혼 실패와 혼외 자식 문제 등 사생활적인 면에서 흠결 많은 남자였지만 미국 문화와 스포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웅이 기립박수를 받았다. 루이빌의 떠벌이라는 별명답게 “나는 복싱보다 위대하다.”는 낯간지러운 말을 남겼으나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은퇴와 함께 파킨슨병으로 투병을 시작한 뒤로 30년 넘게 병마와 싸워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도 그 위대함을 충분히 증거했다.

“타인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타인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센데 불과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자라야 진정한 강자이다
족함을 아는 자가 진정한 부자이며
억지로 행하는 자는 특정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리할 곳을 잃지 않는 자가 오래 가고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자가
진정으로 장수하는 사람이다.“
- 노자 도덕경 33장

알리의 일생을 읽으며 노자의 도덕경 서른세 번째 장을 떠올렸다. 육체는 지상을 떠났지만 그의 용기와 자존감은 오래오래 장수할 것이다. 우리 동네에 새로 개업한 대형 중고서점에 피서를 갔다가 그 공간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마이크 마커시와 짐 해스킨스가 쓴 무하마드 알리에 관한 책을 구했다. 지난 달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구입한 작고 붉은 책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꺼내 읽었다. 알리 서거 1주년 기념일에 맞춰 출간된 책이다. 동네 카페에서,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월터 딘 마이어스의 시선으로 알리를 읽으며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지금의 내 모습을 읽고 또 읽었다. 과연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는가?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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