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수화의 4차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지성의 역사 그리고 인문학의 역할

발행일시 : 2017-08-01 00:00
[이수화의 4차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지성의 역사 그리고 인문학의 역할

LG G5와 32bit 업스케일 샘플링하는 하이파이 모듈로 96kh-24bit 샘플링된 고품질 음원, ‘야노슈카 스타일’을 소니 XBA-H3 이어폰으로 반복해서 들으며(하루키가 그리스의 까페에서 비틀즈를 반복해 들으며 상실의 시대를 집필했다고 한다.), 눈 위쪽으로는 파나소닉에서 만든 인플라이트 HMD모니터로 비행기의 좌표, 속도, 고도, 남은 거리를 제공받으며, 손으로는 맥북 프로 2015 15인치로 칼럼을 쓰고 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지상 10km의 성층권을 날고 있는 보잉 787-900이다. 여기 등장하는 거의 모든 기계가 1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에 있는 물건이다. 전화기는 벨, 무선통신은 마르코니, 스피커-녹음기는 에디슨이, PDA는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는 튜링-노이만이, 비행기는 라이트 형제가 만들었다. 19세기의 혁명을 이어받는 20세기 초반의 폭발적 스퍼트가 정말 많은 놀라운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이들 중 단 하나의 물건에 머신러닝-인공지능이 얹혀져 있다. 바로 약 3억불정도 값이 나가는 787-900. 저녁 먹고 잠을 청해서 컴컴한 캐빈의 지금 이 시점에도, 자율비행 컴퓨터는 열심히 이 큰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더 진행되면 위에 언급된 모든 물건이 지능화-자율운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위에 언급된 모든 물건에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얹혀져 있다.

지능의 혁명이 불연속,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와 내가 깔고 앉아 마치 아라비안나이트 마법의 양탄자처럼 하늘을 날게끔 했다. 마법의 양탄자에 올라타 있는 채팅로봇이 알아서 전화 받는 비서 역할로 내일 줄 돈 며칠 설득해서 미루고, 정도전이 만든 경복궁 상공을 비행할 때엔 ‘천년학’ 대금연주를 틀어주고 머리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하면 자동키보드가 알아서 살을 붙여줘서 글을 완성할 것이고 글에 대한 환호성 SNS피드백에 흥분해서 착륙한 북촌의 서당 마당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발효균을 채집하여 컴퓨터가 발효시킨 나만을 위한 북촌막걸리가 시원한 한 사발에 담겨있다.

[이수화의 4차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지성의 역사 그리고 인문학의 역할

‘19세기에서 살아보기’라는 책이 있다. 19세기에는 전쟁, 기근, 홍수, 가뭄, 산불, 전염병이 끊이지 않았기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 백만명이 굶어 죽은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을 생각하거나, 유럽에서 천 만명 이상 플루-독감으로 죽은 20세기 초반의 스페인 독감을 떠올리면 우리의 지금은 너무 심심하고 편하고 춥거나 덥거나 괴롭지 않아서 답답할 지경이다. 지금의 너무 심심하고 편한 상황에 익숙한 젊은이가 한심하다는, ‘노오력’을 주장하는 70년대 근본주의자들은 백 년 전 1870년의 상황이 어땠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전 세계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총-칼-대포질이었다. 하루 하루가 TV 서바이벌 게임에서 나오는 생존의 턱걸이였을 것이다.

마법의 양탄자 2017년과 온통 전쟁터였던 1870년, 아니 어떤 조건의 연도가 들이닥치더라도 지성의 최후 보루인 인문학의 역할은 지성의 현재 좌표를 중립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출발하여 인간 지성이 지금의 성취에 도취하거나 비하하거나, 과거를 무시하거나 근거없이 숭앙하거나, 미래에 대해서 환상적으로 대하거나 종말론으로 대하거나 하는 한 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는 일이다. 모든 군사작전, 우주비행, 나들이 운전, 항공기 조종에서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내가 죽거나 상대방이 죽거나 둘 중 하나 죽어야 결판나는 끝장 결투에서 나의 비교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중립적으로 파악하는 태도가 승리의 비결이다. 삼국지의 천재 제갈량처럼.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언이다. 인간의 사유체계 안에서 세계가 존재한다. 데카르트에게는 생각이야말로 변함없는 불변의 한 지점, 즉 북극성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 좌표이므로 인간의 합리성 이야말로 절대 불변 진리를 탄생시키는 우주 성운과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기계론적 합리론은 계속해서 과학의 진보를 가져왔으며, 결국 뉴튼이라는 대천재가 만들어낸 중요한 몇 가지 원리 ‘principle’을 바탕으로 열역학이 폭발적으로 이용됐다. 인간 지성의 선형적 발전이 끝이 없으며, 마치 오펜하이머가 그가 개발한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을 지켜보며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천 개의 태양’을 손에 넣게 되었다!’는 끝없는 발전을 희망했다.

끝없이 발전해서 맛보게 된 연속적 발전 문명이 2017년일까? 그렇지 않다. 19세기의 제1차 산업혁명은 결국 소련에서 2,300만명이 죽고 독일에서 1,200만명이 죽고 유태인과 집시가 합쳐 600만명이 잡혀 죽었던 지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인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천 개의 태양이 최초로 사용된 상황이 사람 죽이는 일이었다!

[이수화의 4차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지성의 역사 그리고 인문학의 역할

데카르트의 생각을 바꾸어 본다. 인간의 합리성은 객관적일 수 없으며 인간 진화의 산물이고 시간의 흐름, 물질적 조건, 앎의 깊이와 같은 너무도 다양한 변수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생각이라면 먼지 한 톨 들어갈 여지 없는 근대과학적 엄밀성도 절대적 불면의 진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정에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술과 인간과 함께 흘러왔던 문명의 가장 기본인 ‘수사학’. 수사학자의 저질적 호칭인 궤변론자라는 말처럼, 수사학은 그럴듯하면 진리라는 진리의 상대성을 옹호한다. 데카르트의 절대불변 지성과 정반대이다. 절대 불변의 원리도 실은 큰 판 위에서 어떠한 공유하는 성질의 변수를 잔뜩 담고 있을 때에나 원리이지, 시간이 흐르고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세상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 과학도 마치 수사학처럼, 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 (1970)’에서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말했다. 공약 즉 공유가 불가능하므로, 이전 세대의 공리가 다음 세대에 연속적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즉 바통 터치하듯), 전혀 관계없는 지각변동의 틀로 도약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쪼개지는 큰 사이즈의 지각 틀이 바로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유명한 단어,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 시프트를 하세요!”라는 주장은 혁명이 주장하듯 지금까지 맞다 혹은 틀리다고 알고 있는 상식을 근본적으로 때려 부수고 원론부터 다시 생각해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라는 무시무시한 말이다. 생각을 바꿔 보험 상품을 갈아타거나, 도발적인 외관의 자동차를 구입하라는 당의정이 아니다.

인간의 지성은 연속적 발전의 길 위에 얹혀있는 속성이 아니라, 발전이라는 단어의 근본적 가정이 ‘절대점’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점인데, 정반대로 지능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 ‘구성’된다는 점이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생각이며 여기엔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와 같은 유럽대륙철학의 흐름이 관계되어 있지만 지식의 구성이 바로 인공지능의 폭발성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이 소름 끼치도록 놀랍고 오싹한 점이다.

패러다임, 지식의 상대론, 불연속, 구성. 단어로 보면 매우 어려운 단어이다. 이를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가장 쉬운 단어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바로 ‘창조’이다. 창조는 ‘새롭게 뭔가를 만드는 일이다. 한 번도 눈으로 구경하지 못했던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는 미술창작, 영종대교를 건널 때 들었던 바하의 파사칼리아-인벤션같은 음악을 창작하는 일,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의 회의를 불러 일으키는 인셉션과 같은 영화를 연출하는 일이 바로 창조에 어울리는 활동이다.

위에서 계속 말했던 것처럼, 창조에는 시작도 끝도 없고 발전도 퇴보도 없다. 그래서 상대론에 잘 어울린다. 재작년에 맨하튼의 걷는 고가다리 밑 화랑에서 봤던 충격적인 미술작품, 벽에 때려 박힌 공사장 각목에 녹슨 못이 비스듬하게 대충 박혀있던 작품. 작품을 보면서 너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지긴 첨이었다. 갤러리의 여름 보수공사중인줄 알았었다. 구글에서 ‘녹슨 못 각목’으로 검색하니 그 작품 사진이 나온 것으로 봐서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작품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비교해 ‘우월’이나 ‘열등’의 척도로 언급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수화의 4차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지성의 역사 그리고 인문학의 역할

크다-작다, 비싸다-싸다, 빠르다-느리다, 가볍다-무겁다 같은 물리적 속성을 지닌 실세계의 물리적 환원성이 바로 데카르트가 좋아했던 절대성 기반 사고체계다. 반면 패러다임-상대론-구성-창조라는 상대성 기반 사고 체계는 인간 지성의 또다른 한 축이다. 이 상대론 기반 창조성이 있었기에, 프로메테우스가 창의력을 발휘해서 불을 뺏어 오는게 성공했고, 훔쳐온 불을 바탕으로 내연기관을 탄생시켜 거대한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창조성이 있었기에, 인간의 시기 질투와 이기심이란 종족의 본성을 창조적으로 해석해서 온갖 종류의 군사무기를 만들어냈고, 더 나아가서 불을 뺏어 오지 말고 직접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을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인간의 손아귀에 ‘천개의 태양’을 움켜쥘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빨리 없애 버리는데 천개의 태양을 제일 먼저 썼다.

1936년에 인류는 마음속의 ‘천개의 태양’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앨런 튜링이 계산가능성에 대한 수리적 논증을 통해 생각하는 기계 ‘컴퓨터’를 만드는 기반 이론을 만들어 냈다. 동성연애로 괴롭힘 당하다가,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방법을 그대로 따라해서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자살을 했다. 한입 베어먹은 사과의 모양이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애플의 로고이고, 매킨토시라는 컴퓨터 이름은 애플이 위치한 캘리포니아에서 많이 나는 사과 품종이름이다. 컴퓨터를 만들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피노키오 나무 인형과 같은 ‘오토마톤’을 피노키오 어린애로 살려낸 소설 창작의 앞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튜링은 그의 계산가능성을 논증하는 계산 절차로 ‘유한 상태 오토마타 Finite State Automata’라고 지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 중에 가장 큰 불연속적 창작품이 컴퓨터인데, 이를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 조차도 발전의 연속선상에 있지 않았다. 한 명의 과학자가 발휘해낸 창조적-구성적 아이디어가 큰 힘을 발휘한 것이다. 비행을 향한 인류의 오랜 욕망을 청교도적 성실한 연구 개발에 몰두한 라이트형제가 한번에 해결했듯이.

공항으로 오는 리무진 버스 안, 중국으로 발표를 가는 성형외과 의사가 실리프팅과 피부관리에 관한 슬라이드를 노트북으로 만들고 있다. 발표자료는 영어인데, 영어로 슬라이드노트-자신의 멘트-를 문장을 구성하여 입력하고 있다. 어느 문장에서 막히는 듯 싶더니 화면에 네이버가 제공하는 신경망 기반 번역기인 ‘파파고’를 불러 한국어 문장을 입력하고 영어로 번역된 문장을 받아보곤, 검토해서 자기의 멘트에 첨가했다. 이제 머지않은 시점에 파파고가 알아서 사람의 말을 듣고 알아서 번역하고 알아서 슬라이드를 완성하고, 학회장에 가서 연사가 발표할 때 청중의 눈과 몸짓을 보고 청중의 반응 상태를 점검해서 연사에게 ‘더 말을 빨리할 것’, ‘유머를 넣을 것’, ‘쉬었다 할 것’, 발음이 어두움’, ‘청중의 절반이 졸고 있음’과 같은 실시간 피드백을 하게 될 것이다.

기원전 5,000년전에 4대 강가에서 글자를 만들어 내면서 출현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천개의 태양’을 만드는데 까지 다다른 인간 지성의 위대한 발전은, 이제 그 어느때보다도 창조적-구성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강력하게 요구 받고 있다. 창조-구성의 결과물이 굳건하게 성장하여 아버지가 보다 더 창조적-구성적이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문하는 모양새다. 비록 근거가 희박하지만 매우 낙관적인 희망은,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탄생이 창조적-구성적이었으므로, 인간지성은 2017년의 상황을 뛰어넘을 창조력을 여전히 발휘할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변화해야만 하고, 변화할 인간 지성의 좌표를 찾아주는 역할은 여전히 인문학이 담당할 것이다. 다만, 공약불가능한 변화로 도약해야한다. 이것이 4차산업혁명의 새로운 인문학이 될 것이며, 인문학이라는 말만 과거와 비슷하지 정말 많은 부분이 혁명적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한다.

[이수화의 4차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지성의 역사 그리고 인문학의 역할

강력한 인문학이 뒷받침하는 새로운 휴먼러닝은, 물리적 척도로 비교해야 직성이 풀리는 낡고 쾌쾌한 줄 세우기, 즉 우등-열등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내가 하는 생각이면 정답이라는 전면적인 창조적 휴먼러닝으로 변모할 것이다. 기성의 정답에 자기 머리를 끼워 넣으려고 매일매일 고달프게 살아나가는 구체제의 휴먼러닝이 사라지길 기대한다. 그렇게 진화하길 갈망한다. 머신러닝을 바라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수화 westwins@mtcom.co.kr 서울대학교 서양사학 전공, 서울대 인지과학협동과정에서 석사•박사과정 수료. ㈜LGCNS 시스템 엔지니어,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두뇌 인지활동의 기능적 MRI 연구, 벤처기업에서 논리학습을 위한 기능성 게임, 인공지능 비즈니스모델링 •영어교육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해왔다. 각종 벤처창업학교에서 퍼실리테이터•강사•멘토 역할을 맡아 활동 중이다. 현재 (주)엠티콤에서 인공지능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며, 한국인지과학산업협회 인문계와 이공계의 융복합적 전공 경험뿐 아니라 수행했던 다양한 직업 경험, 그리고 인간지능에 대한 깊은 이해•관심을 바탕으로, ‘지능산업’의 발전과 육성을 위한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2017 nextdaily.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주)넥스트데일리 | 등록번호 : 서울 아 01185 | 등록일 : 2010년 03월 26일 | 제호 : 넥스트데일리 | 발행·편집인 : 이선기
서울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23, 701호ㅣ발행일자 : 2005년 08월 17일 | 대표전화 : 02-6925-6318 | 청소년보호책임자 : 나성률

Copyright © Nextdail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