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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숫자로 알아보는 국내 最古](33)63년 동안 '국민 구두'로 각광…국내 기성화 1호 '금강제화 리갈'

발행일시 : 2017-08-08 00:00

-1954년 (금강제화의 모태 '금강양화' 탄생 및 기성화 1호 리갈 출시)

-1960년 (수제 공정에서 기계공정으로 전환, 기성화 대규모 제작)

-320만 켤레 (금강 리갈 1호 모델의 1960년부터 2016년 말까지 누적 판매 수)

-제16회 기능올림픽 (우리나라가 국제 기능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해. 당시 칠성제화 배진효군 등이 금메달을 수상했다)

-1973년 (국내 최초 캐주얼 슈즈 랜드로바 론칭)

-1993년 (국내 유일 한국제화기술연구소 설립)

국내 기성화 1호 제품인 금강제화의 리갈 광고. 1982년 9월 25일자 매일경제 신문.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국내 기성화 1호 제품인 금강제화의 리갈 광고. 1982년 9월 25일자 매일경제 신문.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신사를 완성하는 물건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있다. 바로 '구두'다. 구두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에스키모인들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는 '모카신'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구두는 기본적으로 바닥을 대고 끈으로 연결하는 샌들 모양에서 발등을 덮는 형태로 발전을 거듭했다. 모양도 시대에 따라 달려졌다. 대량 생산, 즉 기성화는 1846년 미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구두'라는 어원은 사실 순수 우리말은 아니다. 표준국어사전에서 '구두'는 일본어 'kutsu'에서 따 온 말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 짚신이나 고무신 등을 신었던 우리나라에서 구두는 언제부터 신었을까? 역시 알 길이 없다.

양화점 전문 절도범을 검거했다는 1921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양화점 전문 절도범을 검거했다는 1921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다만 1921년 3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최만복이라는 절도범이 작년(1920년) 10월부터 천도교청년회 등 시내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43회에 걸쳐 370여원어치의 구두 등을 훔친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유추해 당시 상황을 보면 구두는 고가품으로 전문 절도범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구두제품 광고.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3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구두제품 광고.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전문 제화점의 신문 광고도 1930년대 중반 이후 속속 등장하면서 국내 구두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숙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제화 특집 기사. 1990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금강제화 특집 기사. 1990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수많은 수제화 업체가 생겨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성화 제조업체는 63년 전인 1954년 10월 서울 서대문구 적십자병원 맞은편에서 '금강제화산업사'로 출발한 금강제화이다.

서울 명동이 여성화를 중심으로 핸드백과 함께 일류 양화점가로 번성하고 있다는 1967년 2월 27일자 매일경제 신문 기사. 내용 사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서울 명동이 여성화를 중심으로 핸드백과 함께 일류 양화점가로 번성하고 있다는 1967년 2월 27일자 매일경제 신문 기사. 내용 사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금강제화산업사는 설립 초기에는 5~6명의 기술자가 모여 주문을 받고 직접 제작해 배달하는 수공업체로 시작했다. 국산 구두가 흔치 않았던 당시, 새로운 패션과 우수한 질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금강제화 상품이 인기를 끌었던 가장 큰 이유는 6·25전쟁 이후인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화가 아니면 신발로 인정받기 어려울 정도로 구두들의 수준이 조악했기 때문이다.

리갈 광고. 1988년 9월 7일자 매일경제 신문.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리갈 광고. 1988년 9월 7일자 매일경제 신문.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금강제화가 설립과 동시에 국내 신사화 최초로 판매를 시작한 제품이 '리갈 001(모델명 MMT0001)'이다.

이 제품은 국산 기성화 1호이자, 지금 부모세대들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신어 '국민 구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특히 근대식 설비를 도입하기 시작한 1960년부터 본격 생산되면서 매년 5만족 이상 팔리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현재도 생산되고 있는 리갈의 이 모델은 2016년 말까지 누적 판매 수만 320만켤레에 달한다. 이는 성인 남성 발 사이즈를 260㎜라고 가정했을 때 남산타워(탑신 135.7m+와 철탑 101m=236.7m)를 3514회 왕복할 수 있고, 63빌딩(274m) 높이 3036배에 달한다.

지난 2016년 말 기준 리갈 전체 46개 모델 누적 판매량이 1040만켤레인 것을 감안할 때 '리갈 001'이 차지한 판매량은 31%에 육박할 정도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제17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을 소개한 1968년 7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사진 위에서 세번째가 금강제화 소속의 김윤선 선수.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제17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을 소개한 1968년 7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사진 위에서 세번째가 금강제화 소속의 김윤선 선수.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이 제품의 인기 비결은 소비자가 만족할 수 있는 제품력에 기인한다. 1960년 3월 수제공정에서 기계공정으로 전환해 대량생산 기틀을 마련한 금강제화는 수제공정에서 쌓은 기술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금강제화 소속 김윤선씨는 1968년 7월 스위스 베른에서 개최된 '제17회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해 당당하게 제화부문 금메달을 수상, 대내외적으로 금강제화가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출전한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제화부분 칠성제화 배진효군 등 금메달 수상자를 소개한 1967년 7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우리나라가 최초로 출전한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제화부분 칠성제화 배진효군 등 금메달 수상자를 소개한 1967년 7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앞서 우리나라가 국제기능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던 1967년 제16회 스페인 마드리드 대회에서는 1947년 설립돼 현재도 수제화 제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는 칠성제화 소속 배진효군(당시 19세)이 금메달을 수상했다. 배씨는 지금도 국내 수제화 메카인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성수동 251슈즈 공작소'에서 기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금강제화는 신규 제화업체들의 등장으로 시장 경쟁의 과도기를 맞이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금강제화는 수출로 눈을 돌렸다. 이는 당시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맞물려 회사가 번창하는 계기가 됐다.

금강제화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국민의 발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 힘썼다. 1973년 국내 최초로 캐주얼 슈즈 브랜드 '랜드로바(Landrover, 법인명 대양)'를 설립하면서 신발에 대한 지속적 연구개발과 신발기술을 꾸준히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6년에는 이태리 북부에 위치한 도시 이름을 딴 '비제바노(VIGEVANO)' 제화(비제바노시는 지금까지도 이태리풍의 고품격 가죽제품을 만드는 명품 지역으로 유명함)를 설립한 후 1979년 이태리 국제피혁 콘테스트에서 골드 머큐리상과 오스카상 수상을 시작으로 세계 유수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1978년 금강제화 부평 공장 설립. (사진제공= 금강제화) <1978년 금강제화 부평 공장 설립. (사진제공= 금강제화)>

금강제화는 1978년 제화 기업 최초로 인천시 효성동에 국내 최대 규모(약 2000평) 부평공장을 설립했다. 이곳에는 현재 분야별 최고 기술을 보유한 25년 이상 경력의 장인들을 위한 수작업 공정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정통 굿이어 웰트화를 완벽하게 재현해 내기 위해 이태리와 영국 등 각지에서 어렵게 공수된 90여종 기계설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현재까지도 국내 제화 브랜드로는 유일한 곳이다.

금강제화가 1993년 인천 효성동에 제화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는 1993년 12월 2일자 매일경제 신문 기사. 사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금강제화가 1993년 인천 효성동에 제화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는 1993년 12월 2일자 매일경제 신문 기사. 사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93년 겨울에는 한국 최초로 지금의 품질관리팀으로 편성된 제화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최상의 제품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구두 제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구둣골 개발을 포함한 제품에 대한 연구 등 우수한 인력시스템을 이용해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제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금강제화 명동점을 방문한 고객이 3D 풋스캐너를 이용하고 있다. (사진제공= 금강제화)> <금강제화 명동점을 방문한 고객이 3D 풋스캐너를 이용하고 있다. (사진제공= 금강제화)>>

현재 국내 제화업계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5년 2조원때까지 치솟았던 시장 규모는 2016년 1조2000억원으로 급감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제화 업체들이 신성장 동력 마련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금강제화의 경우 지난 2016년 업계 최초로 3D 풋스캐너를 도입했다. 이 신기술은 소비자 자신도 몰랐던 발을 정확하고 면밀히 체크해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정영일기자 wjddud@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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