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의 주말 밤, 어떤 부유한 여인이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그 범인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 TV 드라마에 빠졌다. 밑바닥 출신 그녀가 치밀한 욕망과 계획에 따라 늙은 부자와 결혼한 뒤 전 재산을 상속받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전처의 자식들과 암투를 벌이는 뻔한 막장드라마다. 세상에! 제목이 ‘품위 있는 그녀’라니... 아무리 돈을 쓰고 허세를 떨어봤자 흉내 내지 못하는 상류사회의 벽 앞에서 절망하는 모습이 묘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품위 없는 그녀에게서 개츠비적 묘한 슬픔이 느껴졌다.

처음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까지는 무려 14개월이 걸렸다. 무엇이든 순차적으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장이 난해해 읽다 말다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펭귄클래식 영문판과 대조해서 읽다 보니 어려웠던 이유는 결국 번역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더 늦기 전에 이 땅에 하루빨리 번역청을 설립해야한다는 박상익 교수의 주장에도 공감하기 시작했다. 답답함에 지친 소설가 김영하가 새로운 번역서를 내놓으며 번역의 속도는 언제나 창작의 속도보다 느렸다고 푸념했지만 독자로서 행복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 11쪽, 캐러웨이 아버지의 교훈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중서부 명문가 출신 닉 캐러웨이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화자인 캐러웨이는 작가의 분신과도 같다. 군복무중 만난 남부 명문가의 딸 젤다와 사랑에 빠졌고, 경제적인 이유로 파혼을 당했으나, 첫 소설이 대박 나는 바람에 간신히 재회했던 자전적 요소가 데이지를 창조했다. 그레이트넥의 신혼집에서 구상된 소설은 프랑스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을 때, 바람난 젤다의 외도에 위기를 겪었으나 보다 화끈한 ‘데이지’의 초석을 다졌다. 1922년 뉴욕에서 시작된 소설은 세상을 돌고 돌아 1925년 로마에서 완성되었다.

월스트리트에 진출한 캐러웨이가 변두리에 낡은 월세집을 계약했는데, 바로 옆집이 너무도 웅장했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집주인의 존재는 뭔가 신비롭고 낭만적이며 잔뜩 호기심을 자극한다. 주말 밤마다 화려한 축제가 있었고,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최고급 과일들이 월요일이면 엄청난 껍질의 피라미드로 뒷문 가득 쌓였다가 치워지는 일상이 반복됐다. 해협 건너 멀리 푸른빛을 바라보며 고독을 삼키던 실루엣의 저택 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증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 그 집의 운전기사가 공식 초대장을 들고 방문한다.

첫 만남의 미소는 유쾌했다. 친분이 쌓이고 몇 차례 대화를 나눈 뒤에 그와는 별로 할 얘기가 없다는 것은 실망스러웠다. 신비로운 거물이 아닌 빈 깡통처럼 품위 없는 졸부의 실체적 진실이 드러났다. 동경과 부러움은 사라졌으나, 그의 진솔한 고백은 온갖 구설수에 휩쓸릴 필요가 없는 연민과 인간적인 신뢰를 회복시켰다. 중서부 출신의 가난한 젊은이는 남부의 부잣집 딸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즐겁고 유쾌한 속물근성의 냄새로 가득했던 그 사랑에 눈이 멀었다. 그녀로 인해 뚜렷한 꿈이 생겼다. 사랑은 위대했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과거와 단절한 캠프 테일러의 제이 개츠비 중위에게 아름다운 데이지는 그렇게 꿈이 되었다. 달콤한 시절도 잠시, 유럽 전선으로 차출된 그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전쟁에서 눈부시게 활약했고, 초고속으로 진급하여 지휘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어서 사랑하는 그녀에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행정착오로 몇 달 간 옥스퍼드에 머물다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는 시카고의 부잣집 아들과 결혼한 뒤였다. 사랑을 잃어버린 슬픔은 시대의 난봉꾼 댄 코디와 조폭 두목 마이어 울프심 밑에서 지하경제를 주무르는 수완으로 팽창한다.

개츠비는 모든 것을 예전처럼 돌려놓겠다고 결심했다. 큰 부자가 되면 옛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 속에 거침이 없었다. 롱아일랜드의 이스트웨그에 그녀가 살았는데, 그곳이 바라 뵈는 신흥 부촌 웨스트웨그 해변에 더욱 화려한 저택을 얻었다.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날이면 날마다 질펀하게 마셔대는 부조리한 재즈의 시대였다. 언젠가 그녀가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주말마다 흥청망청 파티를 열었지만 축제 뒤에 남겨진 허무함만 깊어갔다. 그때 그녀의 먼 친척이라는 캐러웨이가 옆집으로 이사 온 것이다.

개츠비와 점심을 먹던 캐러웨이가 맨하탄에서 우연히 마주친 톰 뷰캐넌을 인사시킨다. 우람하고 예의 없는데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뷰캐넌은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데, 개츠비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불편해 하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며칠 뒤, 개츠비가 캐러웨이와 교재 중인 조던 베이커를 통해 데이지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한다. 캐러웨어는 자신의 집으로 데이지를 초대하여 옛사랑의 재회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위풍당당 개츠비는 창백하고 침울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 당혹스럽게 옛사랑을 마주하고, 데이지 역시 흔들린다.

혼미한 재회의 기쁨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개츠비의 행동은 유치찬란하고 애처롭다. 거대한 에나멜 장롱 속에서 산더미 같은 정장과 차곡차곡 쌓여 있는 셔츠들을 하나하나 펼쳐 보이며 자랑한다. 데이지의 반응은 더 황당하다. 여태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다며 격정 속에서 울먹인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라며 그것들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이 기묘한 장면은 2013년 개봉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에서 ‘Young and Beautiful’이라는 주제가와 함께 섬세한 연출로 빛나는 명장면을 만들었다.

그날 이후 데이지는 개츠비의 저택을 자주 찾았다. 개츠비는 잃어버린 오 년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기대감이 만들어 낸 여신처럼 부풀려진 환상 속의 데이지에 턱없이 모자란 현실의 데이지가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 개츠비는 눈에 콩깍지가 씌어져 판단력을 잃어갔고, 데이지의 영향력으로 화려했던 축제의 장은 싸늘하게 식어간다. 손님으로 떠들썩했던 저택은 낯선 하인들로 채워진다. 뉴 머니의 상징 개츠비가 올드 머니의 상징 뷰캐넌과 결전을 앞 둔 폭풍 전야의 날들이었다.

캐러웨이의 서른 번째 생일은 몹시 더웠다. 데이지는 별다른 준비 없이 친구들을 오찬에 초대했다. 바람난 뷰캐넌은 머틀과 통화 중이었고, 데이지를 닮은 패미는 깜찍하고 예뻤다. 초대가 무색하게 이스트웨그의 찜통에서 겨우 점심을 마친 뒤, 더위를 견디지 못한 데이지의 제안으로 모두가 시내로 향한다. 불쾌지수 최상의 날에 서로의 승용차를 바꿔 타고 맨하탄 플라자호텔로 이동해서 스위트룸을 빌려 파티를 이어 갔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충만했고, 뷰캐넌과 개츠비의 거친 신경전에 모두가 날카롭고 피곤해졌다.

맨하탄에서 롱아일랜드로 가는 잿더미 계곡(The valley of ashes) 인근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하는 윌슨은 바람난 아내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다. 그 무더운 오후, 남편과 심하게 말다툼을 벌인 끝에 거리로 뛰쳐나간 머틀 윌슨이 그만 지나가는 승용차에 치여 즉사한다. 푸른 눈만 기괴하게 남은 닥터 T.J. 에클버그의 광고판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듯 음산한 풍경이었다. 사고를 내고 달아난 고급자동차의 주인은 다름 아닌 개츠비였으나,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엉뚱하게도 데이지였다. 본의 아니게 남편의 정부를 치고 달아난 철없고 양심도 없는 여자였다.

개츠비는 뺑소니 이후 마음이 불안한 데이지의 창가에서 밤새 걱정하며 서성거린다. 뷰캐넌 부부는 자신들의 모든 과오를 개츠비에게 덮어씌우고 짐을 챙겨 달아나듯 여행을 떠난다. 끝까지 뷰캐넌에게 농락당한 윌슨은 죄 없는 개츠비를 향해 총을 겨누고 스스로의 목숨에도 미련이 없었다. 끝까지 이기적이었던 조던 베이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으면 백만 가지 이유라도 댈 것 같던 마이어 울프심 등 모두가 등을 돌렸다. 무더운 날씨 탓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격의 바닥을 드러냈다.

윌슨 부부의 죽음은 자초한 것이었지만 개츠비의 죽음은 억울했다. 데이지를 향한 일편단심이었을 뿐인데 너무도 비싼 대가를 치렀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인용한 캐러웨이의 담담한 고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가랑비 속 장례식장에서 개츠비와 함께 맞는 비의 연대로 차분하게 막을 내리는 서글픈 감동이 있다. 강물을 거스르듯 거친 삶을 살아온 불우한 사나이를 향한 관찰과 애정, 실천적 연대는 결국 입장의 동일함으로 이어진다. 역경을 딛고 꿈을 향해 우직하게 걸어 나갔던 그의 삶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개츠비와 캐러웨이의 냉소적인 연대가 씁쓸하다.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 192쪽, 마지막 만남에서 캐러웨이가 개츠비에게 남긴 말

개츠비는 왜 위대한 개츠비일까? 이 작품을 구상할 때 작가가 살던 곳이 ‘그레이트넥’이었기 때문이란 것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잿더미 계곡과 백만장자들’, ‘트리말키오(Trimalchio)’, ‘웨스트웨그로 가는 길’ 등 다양한 제목 후보들 중에 결국 ‘위대한 개츠비’로 결정된 것은 옳았다. 사랑할 가치도 없는 속물적인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개츠비는 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 물질들을 총동원했을 뿐이다. 배신과 위선의 쓰레기더미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난 그의 숭고한 사랑이 답은 아닐까?

“죽지 않았다면 위대한 인물이 됐을 거요. 제임스 J. 힐 같은 인물 말이오.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 힘을 보탤 수도 있었을 텐데 (If he'd of lived he'd of been a great man. A man like James J. Hill. He'd of helped build up the country).”
- 209쪽, 아버지 개츠의 회상

뒤늦게 장례식장에 나타난 노인 ‘핸리 C. 개츠’는 아들의 장점을 열거하면서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을 가져와 그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아들의 포부와 결심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아들이 살았던 웅장하고 훌륭한 저택을 바라보는 모습에도 긍지가 느껴졌다. 한낱 촌부에 지나지 않는 자신에게 그처럼 훌륭한 아들이 있어 죽지만 않았다면 반드시 더 크게 성공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자부심과 애환을 이야기한다. 개츠비의 짧고도 놀라웠던 삶은 그들에게 충분히 훌륭하고 위대하게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년 전 뉴욕에 갔을 때, 5번가를 배회하며 뷰캐넌이 자주 갔을 법한 보석가게를 서성거렸고, 여전히 건재한 플라자호텔을 올려다보았다. 42번가의 지하 식당 앞에서 홀연히 사라지던 개츠비의 발걸음이 환청처럼 들려왔고, 퀸스보로의 다리 위를 지나가던 젊은이들의 밝은 표정이 마냥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이스트리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한 마리에게 개츠비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응원하기도 했다. 롱아일랜드 해협을 오래도록 바라다보며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잡념에 빠진 개츠비 마니아 한두 명쯤 있지 않을까 상상하니 기분이 좋았다.

미국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았던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이름보다 유명한 개츠비를 세상에 남겼다.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로 미국은 ‘위대한 개츠비’의 폭발적인 판매량과 함께 번성했고 개츠비적(Gatsbyesque)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사치스런 젤다는 남편이 남겨준 엄청난 저작권료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첫 문장이 보여준 캐러웨이 가문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개츠비의 장례식장에서 함께 맞는 비의 진정성을 보여준 닉 캐러웨이적 삶은 아름답다. 그 또한 위대한 꿈이 아닐까?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넥스트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