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라던 어느 시인의 이야기가 귓전에 맴돌았다. 한국자산관리공사의 사회공헌 프로젝트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에 목소리 재능기부자로 참여하는 아내가 낭독할 책을 본 첫 느낌이다. 세계 패권 국가들의 역사를 통해 그들이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원인을 분석하고 보편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바나나 보다 훨씬 당도가 높고 크기도 컸지만 유전적으로 순종 생물이라 전염병에 취약했던 그로미셸 바나나의 멸종을 사례로 인간사회의 순혈주의를 비판하는 서문부터가 매혹적이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이 평원에서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다. 제1차 포에니전쟁의 패장‘하밀카르 바르카’는 어린 아들에게 절대 로마인과 친구가 되지 말 것과 반드시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베리아의 평원에서 전쟁광으로 성장한 한니발이 알프스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로마를 공격했고, 압도적인 전력으로 승리한 것이다. 속전속결 한니발은 권력과 영광을 위해 전쟁에 임했고, 로마는 성인 남자의 10%가 몰살되는 참혹함 속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보통의 국가라면 완전히 소멸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생결단 로마는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으로 무려 14년을 버텼다. 패배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동맹국들은 한니발에 회유되지 않고 묵묵히 로마를 지지했다. 새로운 독재관 파비우스는 전쟁을 질질 끌며 한니발을 지치게 하며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헌신적으로 전쟁에 임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더니, 이쯤 되면 제 아무리 강력한 한니발의 군대라도 전쟁을 끝낼 주도권과 의욕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동맹국들은 연전연패 만신창이로 맞서 싸우는 맹주를 배신하지 않고 어떻게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를 롤 모델로 전쟁에 임한 한니발은 폼 나게 이기고 싶었다. 식민지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아버지와 함께 배타적 복수심에 인생을 걸었던 바르카 가문의 아들은 로마의 동맹국들을 회유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봤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자 좌절했다. 그들에게는 가치로 환산하기 힘든 무기가 따로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로마의 저력은 ‘로마 시민권’에 있었다. 로마의 영광과 충성심의 근본 원인은 순혈주의에 반하는 관용이었다. 20세기 초강대국 미국이 그러하듯 로마는 이민자의 힘으로 건설되고 유지된 건강한 제국이었다.

알렉산더의 재현은 카르타고가 아닌 로마에 있었다. 아프리카누스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한니발 전쟁이 시작된 BC 218년에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처음 참전한 17살 소년 스키피오였다. 오랜 관찰을 통해 적군을 완벽하게 이해했고, 지연전으로 징검다리가 되어준 백전노장 파비우스를 발판 삼아 한니발을 제압하고 전쟁의 종결자로 역사에 남았다. 제국이 역사를 거듭하는 동안 식민지 출신의 지도자가 하나둘 씩 생겨났으며, 이민족들은 전혀 차별받지 않으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에 동화되어 갔다.

"뛰어난 전쟁 능력을 갖고 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왜 멸망했습니까? 그들이 정복한 자들을 이방인으로 배척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들과 달리 로마의 창설자이신 로물루스는 너무나 현명하셔서 여러 종족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날로 정복한 자들을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출신으로 왕이 된 자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듯이 우리가 정복한 땅의 자유민들의 자손들에게 공직을 부여하자는 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혁신이 아니라 유구한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관습입니다. 정복당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금과 자신을 로마로 가져오게 하십시오."
- 79쪽, AD 48년 클리디우스 황제의 원로원 연설 중에서

예수게이는 타 부족 전사의 아내를 납치해 첩으로 삼고 아들을 얻었는데, 자신의 손에 죽은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 그대로 테무진이라 불렀다. 타타르족은 다시 예수게이를 죽여 원수를 갚았다. 아홉 살에 고아가 된 테무진은 친족들에게마저 버림받지만 원수보다 은혜에 감사하는 어른으로 성장해 부족의 우두머리 칭기즈칸이 되었다. 혈투가 난무하던 시대에 양아버지 옹칸의 배신으로 온통 진흙탕뿐인 발주나 호숫가로 쫓겨난 칭기즈칸은 각기 다른 부족이었고 종교도 달랐던 19명의 부하들과 함께 그 흙탕물을 마시며 몽골 제국 정체성의 기초가 되는 결의를 다졌다.

1236년 말,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이 6,000km의 원정길에 나서자 동부유럽과 발트해 연안 국가들이 공포에 떨었다. 동유럽 최대도시 키예프를 찍고, 헝가리마저 정복하는 과정은 파죽지세였다. 1241년의 일식은 잔혹한 야만족의 침략이 신의 저주로 해석되는 클라이막스였다. 1242년 봄, 서유럽 국가들이 자포자기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떨고 있을 때, 몽골군은 느닷없이 사라져 버린다. 어리둥절한 평화를 되찾은 중세 유럽인들은 신이 용서했다는 등 종교적인 해석으로 분주했는데, 몽골군은 단지 칸의 서거로 귀향한 동방의 용사들일 뿐이었다.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다. 주력군은 물론 초원의 경기병들이었지만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군대에 합류시켰다. 순수한 몽골인만의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던 것이다. 1253년 프랑스왕의 사절 ‘기욤 드 루브룩’이 카라코룸에 도착했다. 수도사였던 루브룩은 종교전쟁으로 들끓는 유럽과 달리 어떤 탄압도 없이 모든 종교가 공존하는 경이롭고 평화로운 칸의 땅에 감동받았다. 부족 간에 차별이 없는 동등한 시민권의 사회가 드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몽골인은 원래 기마 궁병입니다. 중기병도 약간 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경기병입니다. 몽골군은 정복에 나서면 현지인을 군대로 흡수할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특정한 유형의) 전투에 익숙한 사람에게 다른 일을 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코카서스 산맥의 알란족처럼 전통적인 중기병의 방식을 이용했습니다. 몽골군이 백병전 공격을 원할 때는 주로 몽골인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진족, 킵차크 투르크족, 알란족, 러시아인인 루스족이 전투에 나섰습니다. 몽골은 매우 유연성 있게 사람들을 기용했습니다.” - 114쪽, 티모시 메이 인터뷰

레판토 해전(1571년)에서 오스만 튀르크를 제압하고 세계제국을 완성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기고만장한 상태로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다. 가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그는 무적함대를 이끌고 콧대 높은 여왕을 폐위시킨 뒤, 해적 수준의 섬나라 전체를 개종시키려는 어렵지 않은 목표로 침략을 단행했다. 하지만, 17년 전 지중해를 집어 삼킨 세계 최강 아르마다 무적함대는 생각지도 않았던 패전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이 단지 영국의 날렵한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 때문이었을까?

펠리페2세도 똑똑한 사람인지라 영국의 대포 기술자들을 초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주로 독일 출신이었던 대포 기술자들은 악명 높은 스페인의 종교재판 때문에 단 한 사람도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비록 신교도였지만 가톨릭교도에게도 종교적 탄압을 한 적이 없었기에 무적함대를 견딜 수 있었다. 변방의 허약한 섬나라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1588년의 승리는 결코 완성품이 아니었고 대영제국으로 나아가는 의미 있는 신호탄이었다.

“영국 해군의 혁신은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영국 해군에서 보병이 적함에 뛰어드는 전술을 적용하지 않고 포격전에 치중했던 것은 애초에 영국에 믿을 만한 보병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철 대포를 개발한 것도 청동 대포를 만들 만한 자원이 부족하고 재정도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스페인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혁신의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보병의 위력을 지키기 위해 포격전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무관심했고 대포의 개발에도 덜 열성적이었다.“ - 241쪽

네덜란드 제국의 뿌리는 1492년은 스페인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1492년에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중요한 사건 두 가지와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다. 두 번째 사건은 250년간 유지되던 그라나다 왕국의 함락으로 이베리아 반도 내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것이다. 이 축제의 와중에 스페인 왕국은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해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탄압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다시피 쫓아냈다.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 제국의 서막이 된 세 번째 사건이다.

1492년, 차별과 괄시 끝에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눈물을 머금고 포르투갈로 밀려 났다가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병합되자 다시 떠돌이 생활 끝에 네덜란드에 정착했다.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독으로 종교적 관용주의자였던 빌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외에는 인정하지 않았던 펠리페 2세의 선택은 두 제국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종교의 자유를 확고한 신념으로 제시한 그곳에서 유능한 인재들이 어떻게 유럽 상업의 맹주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세상 모든 시민혁명의 시초가 된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강소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끌어 나갔다. 암스테르담에는 동인도회사라는 세계최초의 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증권거래소도 등장했다. 고작 200만의 인구와 경상도만한 크기의 좁은 땅덩어리에 국토의 1/4은 수면 보다 낮은 저지대 국가는 대단했다. 17세기 초, 전 세계 무역선의 3/4이 네덜란드 차지였고, 대서양을 건너간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한 ‘뉴 암스테르담’은 오늘날의 ‘뉴욕’으로 세계를 호령한다. 인디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나무 벽을 세운 자리는 ‘월스트리트’라 불리며 오늘날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분명 스페인은 불관용의 면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1492년 유대인을 추방했습니다. 1520년까지 무슬림을 강제로 개종시켰습니다. 17세기인 1610년 무슬림 혈통을 가진 기독교인이라 말하는 모든 사람을 추방했습니다. 인종주의의 기원인 혈통의 순수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6~17세기에는 대학교수나 정부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가장 독실한 기독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만약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의심을 받았습니다.” - 312쪽, 폴 프리드먼 인터뷰 중에서

1964년 6월, 미국 법무부는 미시시피 버닝 사건에 대한 수사를 미제 상태로 종결한다고 발표했다. 1964년 6월 21일 미시시피주 네쇼바 카운티에서 흑인의 투표권을 독려하던 인권운동가 세 사람이 잔인하게 살해되어 암매장된 사건에 대해서 말이다. 흑인들은 격분했고, 불완전한 해방을 맞은 이민자들의 나라는 요동쳤다. 미시시피 자유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백인들의 전용석을 용납하지 않는 운동과 프리덤 라이더스 운동들이 일어났고, 이를 저지하는 백인우월 집단의 협박과 폭행들이 잇따르며 민권운동과 인종갈등이 극에 달했지만 정의와 관용이 승리했다.

혹자는 미국의 진정한 동력은 혁명이 아닌 이민의 힘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이민자가 밀려오면, 기존의 시민들과 권리를 위해 싸우고, 통합과정에서 또 다른 투쟁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이는 미국의 개방성과 새로운 동력을 이끌어 장기적으로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최근 반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도 독일 이민자 3세에 모계는 스코틀랜드 출신임에도 마치 자신이 아메리카 인디언이라도 되는 양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자기모순에 빠졌다. 물론 초강대국의 저력은 그 부조리한 상황을 오래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미국에서의 인종 차별은 끝나지 않았다. 흑인들의 경제적 처지는 아직도 열악하며 일반적인 백인들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흑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남아 있다. (중략) 하지만 다른 인종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아서 인종문제라는 게 생길 여지 자체가 없는 나라들에 비한다면 미국의 인종적, 문화적 관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분명 인정해야 할 것이다.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과연 흑인 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미국의 관용은 더더욱 분명해지지 않을까?” - 406쪽

저자는 EBS 다큐프라임 ‘강대국의 비밀’을 만든 이주희 PD로 영상과 책을 통해 관용과 포용만이 강대국을 만들 수 있고, 강자의 조건 또한 그러한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적 근거로 명확히 증명했다. 지난 십 년간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의 퇴보와 함께 수많은 경제지표가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그것은 자국민을 상대로 화이트리스트와 블랙리스트를 작성에 차별적으로 우대하거나 탄압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앞장서서 시민을 사찰하고, 이념적으로 편을 갈라 가혹하게 불이익을 주는 사회가 어떻게 건강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합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당당하면서 약한 사람에게는 관대한 사람과, 반대로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비굴하면서 약한 사람에게는 오만한 사람입니다. 강한 사람한테 비굴하면서 약한 사람한테 관용적인 사람은 없습니다.”라시던 신영복 선생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살아가면서 특별히 강해지고 싶은 욕망은 없었지만 보다 관대하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과 히틀러의 나치를 떠올려보면 이 책이 이야기하고 싶은 강대국의 비밀과 강자의 조건은 보다 선명해진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넥스트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