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중찬의 書三讀]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이 남긴 가능성

발행일시 : 2017-10-27 00:00
[안중찬의 書三讀]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이 남긴 가능성

기독교 국가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감동적인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1620년 가을, 영국의 청교도 102명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너왔다. 지금의 보스턴 인근에 도착한 그들은 추위와 배고픔, 질병에 시달리며 44명이나 목숨을 잃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이듬해 봄, 마음씨 좋은 원주민들이 그 불쌍한 이방인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 더 이상의 희생을 겪지 않게 되었고, 11월에는 첫 수확에 성공한 기쁨의 축제가 있었다. 이제는 미국의 건국 신화처럼 전해지는 그날의 기억이 해마다 반복되는 감사의 명절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다코타 족의 인사말 ‘미타쿠예 오야신!’은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로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핵심 철학이다. 인디언의 영혼과 통하는 금언으로 논어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있다. 모든 갈등하는 사람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공자의 통찰인데. 상대방에게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동(同)’의 관점에서는 동질적이고, ‘화(和)’의 관점에서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다. 해석하는 이마다 다르지만 본질은 결국 ‘동’을 넘어 ‘화’의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평화의 말씀이다.


“민주주의는 같음이 아니라 다름을 의미한다. 우리가 당신들의 특성을 인정하듯이 당신들도 우리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해 주는 관계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들 각자는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이 있다.”
- 724쪽, 다코다 족 ‘레너드 펠티에’의 이야기



가을 깊은 길상사 다녀오던 길에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1993년 정신세계사에서 214쪽 작은 책으로 처음 선 보인 책이다. 십 년 뒤 김영사에서 920쪽 두꺼운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스테디셀러다. 몇 년간 절판되는 바람에 중고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던 중에 ‘도서출판 더숲’이라는 새 옷을 입고 나타났다. 좋은 책은 결국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이 책을 처음 추천한 분은 법정스님이다. 무소유를 강조했던 스님이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펼쳐 볼 지혜의 말씀이라며 소유를 권하신 것이다.

흩어진 지혜를 한 데 모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사람은 명상과 사색의 시인 류시화다. 자신들이 살던 대륙을 ‘거북이 섬’이라 부르며 스스로 자연의 일부였던 사람들의 말과 글, 사진을 15년 동안 수집하고 재구성하여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서문을 대신한 글에서 이 대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서 잠시 빌린 것임을 잊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인디언의 영혼으로 빙의하듯 읊조린 시인의 관점에서 생산된 명언들은 수십 년간 세상을 떠돌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했다.

[안중찬의 書三讀]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이 남긴 가능성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는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린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 20쪽, 수콰미쉬·두와미쉬 족 ‘시앨트 추장’의 연설문 중에서



스타벅스의 고향이자 로맨틱한 영화 제목을 생각나게 하는 항구도시 ‘시애틀’의 지명은 바로 그 땅에 살다 간 추장의 이름 ‘시앨트’에서 비롯되었다. 얼굴 흰 사람들이 찾아와 문명을 예찬하고 철도를 놓겠다고 했을 때, 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고유의 문화를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이다. 인디언 말을 2년 동안 공부한 그의 백인 친구 헨리 스미스 박사가 추장의 목소리를 받아 적어뒀다가 아주 오랜 훗날 철도 개통을 앞두고 한 언론에 공개하면서 더 유명해진 연설을 한 장본인이다.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고 18년이나 흐른 후에 발표된 탓에 진실공방도 있었다.

거북이 섬 사람들은 침략자인줄도 모르고 이방인들을 환영했다. 들소들은 죽임을 당하고, 야생마들은 모두 길들여지고, 숲의 은밀한 구석까지 사람들의 냄새로 가득해졌다. 섬기는 신이 다른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다 뒤덮을 것이라고 우려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모순적인 구역을 정해 가두려는 그 계획을 보다 못한 추장이 어리석은 침입자들을 향해 일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추장의 이름을 딴 도시명이 결정되었지만, 무덤에 풀이 자라기도 전에 그 도시에 인디언이 거주할 수 없다는 법안이 통과 되었다.

[안중찬의 書三讀]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이 남긴 가능성

“나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인디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물질을 손에 넣는 것, 나아가 많은 소유물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평화에 이끌렸다. 그는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계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랑으로 일한 것에 대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문명은 그런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인디언들은 예수가 말한 그 단순한 원리들을 늘 지키며 살아왔다. 그가 인디언이 아니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 97쪽, 다코타 족 ‘오히예사(찰스 이스트먼)’의 저서 ‘인디언의 영혼’ 중에서 발췌



인디언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찰스 이스트먼 박사의 본명은 ‘오히예사’다. 옛 책에서는 ‘미타쿠예 오야신!’이란 부족의 인사말을 제목으로 사용했던 이 연설문에서는 설교도 개종도, 박해도 없으며 타인의 종교를 비웃거나 무시하지도 않는 대자연 속 인디언들의 영혼을 이야기한다. 오로지 자연 속의 신앙을 믿으며 언제든지 신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더욱 진실하고 시적임을 강조한다. 흰 얼굴의 목사들이 돈을 받고 하는 설교나 물질에 취약한 것으로 봐서 영적인 것들과 거리가 있는 교회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1858년 겨울, 지금의 미네소타 주에 있는 삼나무 폭포 부근의 들소 가죽 천막 안에서 태어난 오히예사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와 형제자매를 모두 백인들의 손에 잃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인디언 전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문명화 되어 돌아왔고, 아들을 데려가 백인들의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이게 했다. 찰스 이스트먼은 보스턴 의과대학을 나와 세속적으로 성공한 의사가 되었고, 보이스카우트 창단에도 깊이 관여해서 인디언들의 정신과 생활방식을 백인들에게 전수시킨 인물로 명성을 얻었다.

황혼에 이르러 자신을 문명으로의 동화를 이끌었던 백인 아내와 갈라선 뒤,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 온타리오의 숲에 터를 잡고, 인디언의 생활과 관습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에 이끌려 백인들의 고등 교육을 받은 오히예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에 강한 인디언 정신을 불어 넣어준 무명의 삼촌 덕분이었다. 이 책의 다섯 번째 연설문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통해 이익 추구, 계급 사회, 노예 제도, 은행 이자, 시간을 나누는 행위 등을 지적하며 백인 문화를 비판한 사람이 바로 그 삼촌이다.

[안중찬의 書三讀]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이 남긴 가능성

"너의 가슴속에 죽음이 들어올 수 없는 삶을 살라.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그들의 시각을 존중하라. 그리고 그들 역시 너의 시각을 존중하게 하라. 너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너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라. 오래 살되,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목적을 두라. 낯선 사람일지라도 외딴 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한두 마디 인사를 나누라.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누구에게도 비굴 하게 굴지 말라.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침 햇빛에 감사하라. 네가 가진 생명과 힘에 대해, 네가 먹는 음식, 삶의 즐거움들에 대해 감사하라. 만약 네가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너의 잘못이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처럼 되지 말라. 슬피 울면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그 대신 너의 죽음의 노래를 부르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인디언 전사처럼 죽음을 맞이하라."
- 232쪽, 쇼니 족 추장 ‘테쿰세’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연설문 중에서



세네카 족 추장이며 웅변가였던 ‘빨간 윗도리’는 검은 코트의 선교사들이 인디언 아이들을 데려가 교육을 시켜 돌려보낸 것에 분노했다. 사냥도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욕망에 길들여져 종족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도 백인들에게는 멸시를 당하는 어중간한 존재가 되었다며 슬퍼했다. 그는 손자에게 네 가지 물음을 던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행복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 혼란을 가져다주지는 않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평화와 만족을 가져다주는가? 내가 세상을 떠나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백인들은 인디언이 빙하기 때 베링해협을 건너 왔다고 주장하면서 반대의 경우는 생각조차 않는다. 나라간세트 족 ‘키 큰 참나무’는 콜롬버스가 찾아오기 전에 ‘참사람’으로 불렸던 조상들을 이야기하며 ‘인디언’이라는 부당한 이름을 거부한다. 참사람은 스스로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다. 왕파노그 족 ‘느린 거북’은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까칠하게 지적한다. 문명인들은 자기 자신이 되려고 진정으로 노력해 본 적이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되게끔 허용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통제받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안중찬의 書三讀]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이 남긴 가능성

“당신이 내 기도문을 사용해선 안 된다. 그것은 나를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기도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언어로, 당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넣어서 스스로의 기도문을 만들어야 한다. 인디언은 또한 남이 써놓은 경전을 읽으면서 ”이것 봐! 이 사람이 이렇게 말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런 경전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모든 날이 새로운 날임을 이해한다. 그리고 생명은 영원한 것이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 425쪽, 왕파노그 족 ‘느린 거북’의 연설문 ‘이름으로 가득한 세상’ 중에서



테톤 수 족의 ‘서 있는 곰’ 추장은 라코타 족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세상이 거대한 도서관이며, 돌과 나뭇잎, 풀, 실개천, 새와 들짐승이 책이라는 명언도 남겼다. 아이들은 늘 자연에 가까이 지내며 부드러운 심장을 갖도록 했으며, 과장된 칭찬이나 아첨, 세련되고 목청 높은 말 따위를 무례하게 여겼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경계했다. 오글라라 라코타 족의 전사 ‘미친 말’은 평생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물 없어’의 아내 ‘검은 들소 여인’을 유혹하여 함께 달아난 정열적인 사랑으로도 유명했고, “호카헤이! 오늘은 죽기에 참으로 좋은 날이 아닌가!”란 명언을 남겼다.

아무 상관도 없는 기독교의 교리를 강제로 구겨 넣으며 헌금을 받아가 도대체 어디 쓰는지? 누군가가 먹여 살리지 않으면 굶어죽을 게으른 백인들이 답답했던 인디언들은 어디에 호소해야 했을까? 꽃으로 나무를 판단하게 하고, 열매로 그 꽃을 판단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어보지만 백인들의 신은 인디언들을 돌보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인디언들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악당의 이미지로 미디어를 채워나갔다. 손도끼 ‘토마호크’는 착한 사람들을 습격하는 서부영화 속 무시무시한 인디언 악당들의 무기였고, 왜곡된 세뇌의 세월 속에 슬픈 나날을 보냈다.

코만치 족 추장 ‘열 마리 곰’은 케빈 코스트너 감독·주연의 영화에 등장한 실존 인물이다. 1867년, 캔자스 주의 한 지역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심오하고 우아한 ‘평원에서 생을 마치다’라는 연설 후에 백인들과의 조약에 서명했다. 어려서부터 인디언들에 의해 길러진 백인 처녀 ‘주먹 쥐고 일어서’와 결혼해 인디언 전사가 된 백인 존 덴버 중위는 ‘늑대와 춤을’이란 이름의 인디언으로 재탄생 했지만 뒷이야기는 비참하다. 백인들은 ‘주먹 쥐고 일어서’ 모녀를 야만인들로부터 구출(?)하고, 부족의 절반을 죽인 뒤 나머지를 오클라호마 보호구역 안에 가둬버렸다.

[안중찬의 書三讀]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이 남긴 가능성

“자신을 치유하라. 그러면 그대는 가족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족이 공동체를 치유할 것이고, 공동체가 나라를, 나라가 세상을 치유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세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539쪽, 믹맥 족 영적 조언자 ‘게후’의 이야기



21세기 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에 누구에게 감사하고 있을까? 새로운 땅에서 확장되는 교회를 기뻐하고 있을 하나님일까? 그 추상적인 대상과 달리, 굶주린 이방인들을 구원했던 거북이 섬의 원주민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더란 말인가. 콜럼버스는 자신이 어디에 도착했는지도 모르던 실패한 사업가에 불과했는데, 새로운 땅을 하나님께 봉헌한 대가로 천국에 갔을까? 기독교와 질병·총을 한 보따리 안고 배 멀미를 하며 인디언을 찾아간,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주장했던 얼굴 하얀 야만인들의 후예와 무참히 짓밟힌 그 섬의 영혼들을 생각한다.

인디언들은 서로에게 잘해줬고, 서로를 존중했고, 서로를 보살폈다. 인디언들은 남을 미워하지 않았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하며 살았다. 하지만 인디언이 사라진 땅에서 인디언처럼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침략자들에 의해 거의 박멸되다시피 짓밟힌 북미 인디언들과 달리 혼혈로 명맥을 유지하는 라틴아메리카라고 사정이 나을 리도 없다. 인디언의 영혼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세상을 분류해야한다면 기꺼이 인디언처럼 살고 싶을 뿐이다. 요슐라! 그저 행복하라고...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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