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학생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네 살 때부터 시집을 가까이 했다. 서툰 풋사랑의 연애편지를 운치 있게 띄워보고자 외우고 또 외웠던 그 시절 암송의 기억들은 이후로 감성을 지배하는 큰 축이 되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그 여학생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시 몇 편 외우기도 전에 끝장났으며 그저 먼 추억으로 남았다. 그 때 만난 박인환과 김춘수, 릴케의 문장들이 혀에 착착 감기는 나만의 언어로 체화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어른이 된 후로도 여전히 시집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좋은 시집은 여러 권 구입해서 선물할 만큼 시가 좋다.

이름만 들어도 신뢰가 충만했던 출판사의 시집들을 나오는 족족 구입하던 시절도 있었다. 기 천 권의 시집으로 가득 찬 서가의 한 쪽 벽면을 바라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요즘은 예전 같지가 않다. 좋은 편집자와 서점이 사라진 빈 공간을 인쇄 기술과 온라인 유통만이 채워주고 있기 때문일까? 정성이 부족한 글들이 생각과 잉크와 종이를 낭비하며 마구 쏟아지는 현상에 책값이 아까울 때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석 같은 시를 발견하는 희망으로 버틴다. 이를 테면 해마다 가을이면 찾아오는 올해의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기쁨 말이다.

누가 가을비는 소리만 온다고 했나.

비는 꼬리를 올려 세우고 고목이 다 된 호두나무를 기어오르거나
순간 허공의 거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오늘 저 숱한 새끼 얼룩 고양이들 발소리 죽여
이 나라 전역에 흩어져 달아난다.

찬바람머리 가을비는 소리도 없이 고양이 걸음으로 온다.
- 제17회 노작문학상 수상작 홍신선 ‘가을비’ 전문

올해로 17회를 맞은 노작문학상은 계산하기도 수월하게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는데, 작년부터 희곡 창작 부문까지 확장된 것이 더욱 반갑다. 희곡 창작 부분 첫 수상작은 이정운의 ‘아버지를 찾습니다’였고, 올해는 김명주의 ‘달빛에 달은 없고’가 선정되었다. 대회를 주최하는 곳은 화성시고, 주관하는 곳은 화성시문화재단의 ‘노작홍사용문학관’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왕이로소이다’로 유명한 노작 홍사용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3.1운동이 실패한 절망적 상황에서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만든 행동하는 지식인이었고, 극단 ‘토월회’를 이끌었던 종합예술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는 동안 친일로 오해받을 만한 글 한 줄 남기지 않으신 분이다. 노작문학상은 신인에게도 등용문이 되는 희곡 분야와 달리 시 분야는 등단 10년 이상 된 중견 시인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여간 수준 높은 대회가 아닐 수 없다. 역대 수상자로 안도현, 이면우, 문인수, 문태준, 김경미, 김신용, 이문재, 이영광, 김행숙, 김소연, 심보선, 이수명, 손택수, 장옥관, 신용목, 신동옥 시인이 있다.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벼본다
- 제1회 노작문학상 수상작 안도현 ‘시인’ 전문

제 1회 수상작은 불혹의 안도현이 쓴 ‘시인’이었다. 살구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 내부의 보일러를 덥힌다는 유쾌한 상상이 멋스럽다. 자신도 그런 살구나무 보일러처럼 예쁜 꽃 같은 시를 피워낼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동심처럼 빛나는 첫 단추를 잘 꿴 작품이라 생각된다. 처음에는 해를 넘겨 수상작이 확정되고 시상식과 작품집도 늦게 나오던 것이 해를 거듭하면서 걸출한 수상자를 배출하는 전통과 함께 안정된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비교적 젊고 왕성한 시인들의 몫인가 싶던 편견도 70대 중반 홍 시인의 수상으로 폭넓게 확장된 것이 고무적이다.

경기도 화성 동쪽 여울목에 홍 씨들의 집성촌인 돌모루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홍신선 시인의 고향이자 노작의 고향인데, 삼성전자의 눈부신 성장과 함께 옛 자취가 사라지고 동탄신도시 석우동으로 부활한 곳이다. 노작의 5남매와 항렬이 같은 홍 시인은 몇 년 전까지 날카로운 심사평을 남기던 노작문학상 심사위원이었다. 탁월한 시적 완성도를 담보한 후보작이 많지 않음을 아쉬워하거나 시력 높은 원로들이 밀려나는 현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시랍 52년의 거목에 꽃이 핀 것이다. 심사위원에서 심사 대상으로 입장이 바뀐 것이 당황스러웠다는 소회도 밝혔다.

아침나절 읍내 버스에 어김없이 장짐을 올려주곤 했다
차안으로 하루같이 그가 올려준 짐들은
보따리 보따리 어떤 세월들이었나
저자에 내다 팔 채소와 곡식 등속의 낡은 보퉁이들을
외팔로 거뿐거뿐 들어 올리는
그의 또 다른 팔 없는 빈 소매는 헐렁한 6.25였다
그 시절 앞이 안 보이던 것은 뒤에 선 절량 탓일까
버스가 출발하면
뒤에 남은 그의 숱 듬성한 뒷머리가 희끗거렸다
- 제17회 노작문학상 대표 수상작 홍신선 ‘합덕장 길에서’ 앞부분

수상작인 홍신선 시인의 ‘합덕장 길에서’를 낭송하다가 부인 노향림 시인의 ‘추억이 마려운 얼굴’이 떠올랐다. 고속도로 휴게소 간이식당에서 찐 감자 몇 봉지를 사들고 서 있는 고단한 얼굴이 남편의 옛 모습인가 싶다가도 합덕장 길에서 버스 위에 장짐을 올려주던 외팔이 노인을 연상시키는 아픔으로 밀려왔다. 물론 트럭을 타기 위해 등 돌리는 추억이 마려운 얼굴의 그 남자가 같은 사람일리는 없지만 계속해서 한 인물처럼 다가왔다. 휴게소에서 늙음으로 향하던 그가 합덕장 길 버스정류장에선가 돌모루에선가 사라져버린 존재처럼 느껴졌다.

홍신선 시인은 ‘절량(絶糧)’이란 낯선 말을 처음 가르쳐 주신 분이다. 끊을 절(絶)자에 양식 량(糧)자의 결합으로 ‘양식이 떨어짐’을 의미하는 그 낱말이 시인의 시대에는 너무도 일상화된 말이었던 걸까? ‘합덕장 길에서’는 홍 시인에게도 한 세대 앞 선 불우한 인생의 굴곡진 초상을 소묘하고, 그 죽음을 길에서 조문하는 만가라는 것이 후배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평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상이용사로 추정되는 시골 노인의 고단한 삶을 살짝 떨어져 관찰하며 그의 사라짐을 푸른 하늘로 구름장들 틈새로 옮겨 놓은 것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시랍 52년의 무게가 아닐까.

그 사내가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
깨빡치듯 생활 밑바닥을 통째 뒤집어엎었는지
아니면 생활이 앞니 빠지듯 불쑥 뽑혀 나갔는지
늙은 아낙과 대처로 간 자식들 올려놓기를
그만 이제 내려놓았는지
아침녘 버스가 그냥 지나친 휑한 정류장엔
차에 올리지 못한
보따리처럼 그가 없는 세상이 멍하니 버려져있다

읍내 쪽 그동안 그는 거기 가 올려놓았나
극지방 유빙들처럼 드문드문 깨진 구름장들 틈새에
웬 장짐들로
푸른 하늘이 무진장 얹혀있다
- 제17회 노작문학상 수상작 홍신선 ‘합덕장 길에서’ 뒷부분

홍신선 시인은 언제나 한자가 빠지지 않을 만큼 함축성 강한 시를 써왔다. 지천명에 남긴 시집 ‘황사 바람 속에서’는 이미 시간 앞에 고개 숙인 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인생의 작품들이 마치 연작시처럼 묵묵하게 다가온다. 또 다른 수상작 ‘직박구리의 봄노래’에서 ‘절량의 시절도 아닌데 웬 쌀을 풀어먹일 참인지’라고 다시 등장하는 빈도가 예사롭지 않다. 배고픔과 거리가 먼 시대에 태어난 독자에게 ‘절량(絶糧)’처럼 간절하지 못한 단어가 어색하다. 이 나라 세대 갈등의 근본에 도사리고 있는 문화의 차이로 느껴질 때도 있다.

노작문학상의 금번 수상자는 분명 홍신선 시인이지만 공광규, 김승희, 김중일, 맹문재, 박성우, 우대식, 이채민, 이현승, 최문자, 함민복이라는 열 명의 후보자가 각자 다섯 편의 시와 함께 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효치 선생을 비롯해 모두 여섯 사람의 심사위원은 공통의 심사평을 통해 공광규, 우대식, 김승희 시인의 노작들이 호평을 받았던 과정을 공개했다. 논의와 투표가 더 진행되면서 박성우 시인의 자연 친화적 서정 시편들이 생사의 허전한 간격을 유난히 남다른 깊이로 성찰한 홍신선 시인의 작품들과 끝까지 경합했노라고 밝혔다.

시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평론가들이 뭐라던 심사위원이 뭐라던 관심이 없다. 그저 홍신선 시인이 묵직한 낱말과 어휘 하나하나가 좋았다. 누구나 각자의 마음으로 감동하고 울림을 느낄 수 있는 기호식품처럼 시를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 찾아 나섰더라면 찾기 힘든 매력적인 작품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이번 수상작이 맘에 들었다. 추천우수작 중에서는 함민복 시인의 두 줄 시 ‘달력’이 인상적이었다. 노작문학상에 대해 한 마디로 평가해 달라는 후배의 질문에 브라이언 아담스의 오래된 앨범 제목이 튀어 나왔다. “So far so good!”

세월이여
발자국을 먼저 찍어 놓다니!
- 152쪽, 제17회 노작문학상 추천우수작 함민복 ‘달력’ 전문

멋진 시가 예쁘지 않은 글로 기록된다면 섭섭한 마음이 든다. 그런 마음으로 책을 대하다보니 투박한 서체에 불편한 자간과 행간으로 편집된 투박한 출판물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부터 새봄출판사가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발간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보다 발랄한 디자인에 예뻐졌다. 평론가도 학자도 아닌 그저 행복하게 글을 읽고 싶은 독자로서 평범한 욕심이다. 반대의 경우도 문제지만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이 좋고 정성스럽게 써진 글이 좋다. 노작문학상 출품작들은 다른 어떤 시집에도 뒤지지 않는 정성스럽게 써진 글이라 더욱 그렇다.

홍 시인은 얼마 전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던 동탄신도시를 떠나 산골로 귀촌했다고 한다. 새로운 자연 속에서 노작의 시대를 살다간 유럽의 제임스 조이스와 헤르만 헤세도 만나고, 당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시인이 떠난 도시에 삶의 뿌리를 내린 나는 나만의 길을 걷는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새끼 노루와 마주칠 수 있는 반석산 숲길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다. 해발 122m 반석산은 엄밀히 말해서 산(Mountain)이 아니라 언덕(Hill)으로 그보다 두 배쯤 높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둘러싼 안타깝고 부조리한 숲이다.

오늘도 나는 융건릉을 거닐다 반석산을 향한다. ‘노작홍사용문학관’ 방향으로 감춰진 숲길에 배롱나무와 함께 노작 부부의 소박한 합장묘가 있다. 돌모루에 잠든 노작과 가까이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작은 행복이다. 영랑이 머무는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30년, 이제는 노작의 땅이 나의 터전이다. 아무리 뛰어난 시인도 자본과 지역민에게 외면 받는다면 결국 독자에게 외면 받는 수순을 밟고 말 것이다. 노작서거 70년을 맞아 17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노작문학상이 별 탈 없이 2100년까지 지속될 수 있기를 서애의 마음으로 꿈꾼다. 먼 것은 가까운 것이 쌓인 것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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