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 삼양라면 지면 광고. 사진=삼양식품 제공
1960년대 초반 삼양라면 지면 광고. 사진=삼양식품 제공

-76.1개(2016년 기준 국민 1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

-1963년 9월 15일(국내 최초, 최고 역사의 라면 '삼양라면' 출시)

-10원(삼양라면 출시 가격, 당시 커피 한 잔은 35원)

-100g(최초 삼양라면 중량, 당시 일본 라면은 80g)

-1965년 7월(누적판매량 100만개 돌파)

-1969년 1월(국내 최초 베트남에 라면 수출)

국내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 사진=삼양식품 제공
국내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 사진=삼양식품 제공

우리나라 국민의 라면 사랑은 유별나다. 지난 2016년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WINA)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1명이 1년에 먹는 라면은 76.1개에 달한다. 세계 1위다.

세계 최초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가 선보인 '낫싱 치킨 라멘'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1945년 9월 2일) 당시 이미 중국 군인들이 건면을 튀겨서 휴대했으며 이를 타이완 출신인 그가 응용해 상품화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1963년 삼양식품의 라면 제조 모습. 사진=삼양식품 제공
1963년 삼양식품의 라면 제조 모습. 사진=삼양식품 제공

우리나라 라면 역사는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1963년 9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54년 전 이날 삼양식품㈜ 전신인 삼양식품공업㈜이 선보인 '삼양라면'이 국내 최초다.

1961년 설립된 이 회사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삼양'이라는 이름은 '하늘'과 '땅' '사람'을 뜻하는 '삼(三)'자와 영양 '양(養)'자를 통해 '영양을 공급해 성장을 돕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삼양라면 탄생은 이처럼 가난했던 우리나라 근대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삼양식품 창업자인 故 전중윤 명예회장은 1960년대 초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먹을 게 없어 버린 음식으로 만든 일명 '꿀꿀이 죽'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노동자들을 보고, 식량난 해결을 위해 일본에서 라면을 들여와 만들기로 결심했다.

전 회장은 정부 관련 부처를 설득한 끝에 어렵게 5만달러를 배당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낫싱 치킨 라멘의 창시자 안도 모모후쿠가 자사의 라면 제조특허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삼양식품이 삼양라면 생산을 위해 최초로 도입한 라면 생산기계. 사진=삼양식품 제공
삼양식품이 삼양라면 생산을 위해 최초로 도입한 라면 생산기계. 사진=삼양식품 제공

하지만 원천기술이 전무한 상황에서 일본 업체는 기술지도와 관련해 까다로운 조건과 많은 금액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향후 한국 수출을 위해서 라면 제조 전수를 꺼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중 전 회장은 '묘조(明星)식품' 오쿠이 기요스미 사장과 만나 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963년 첫 제품인 '삼양라면'을 생산할 수 있었다.

최초의 삼양라면은 '닭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만들었다. 현실적으로 소나 돼지를 사용해 육수를 낼 만큼 원료를 조달하기가 쉽지 않았고, 생산 원가 측면도 고려된 것이다.

최초 라면에 포함된 전중윤 회장의 결단력은 현재 한국 라면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 회장은 초심을 잃지 않고 국민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당시 일본 라면 중량은 봉지 당 85g이었지만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삼양라면은 100g으로 늘렸다. 가격도 꿀꿀이죽이 5원이었던 것을 감안해 많은 사람이 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최대한 낮춘 10원으로 책정했다.

이 때 커피는 35원, 영화는 55원, 담배는 25원 수준이었다. 진 회장은 라면으로 돈을 벌기보다는 이웃의 배고픔을 해소하고 식량난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삼양라면이 나왔지만 소비자 반응은 냉담했다. 오랫동안 쌀 중심의 식생활이 하루아침에 밀가루로 바뀌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라면의 '면'을 옷감, 실, 플라스틱 등으로 오해한 사례도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삼양라면 무료 시식행사 모습. 사진=삼양식품 제공
1980년대 후반 삼양라면 무료 시식행사 모습. 사진=삼양식품 제공

삼양식품 측은 전 직원과 가족을 동원해 직접 극장이나 공원 등에서 무료시식 행사를 열어 라면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낯설고 꺼려하던 이들도 직접 맛을 본 후 라면이라는 새로운 맛의 매력에 빠지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은 1963년 12월 월간 출하량이 20만개였으나 1974년 5월에는 73만개로 3.5배 신장률을 보였다. 1965년 7월에는 판매량 100만개를 돌파했다. 1966년 11월 240만 봉지에서 경품 행사 등의 영향으로 1969년에는 월 1500만 봉지로까지 신장했다. 이로 인해 삼양식품 매출액은 초창기 대비 무려 300배까지 뛰었다.

분식장려운동 등과 맞물려 삼양라면에 대해 특집 기사를 작성한 매일경제신문 1967년 6월 3일자 2면.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분식장려운동 등과 맞물려 삼양라면에 대해 특집 기사를 작성한 매일경제신문 1967년 6월 3일자 2면.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6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분식장려운동, 식생활 개선운동 영향으로 라면 먹기가 권장됐고 호황을 누리자 경쟁제품도 속속 출시됐다.

1967년 9월 20일자 신문 기사(매일경제 참고)를 보면 이때 삼양라면 이외에 롯데식품공업의 '롯데라면', 스타식품공업의 '스타라면', 신한제품의 '신한라면' 외에도 '러키라면' '해표라면' 등이 있었다. 도매가격은 16~17원(개당), 소매가는 18~20원 정도였다. 같은 신문 1968년 2월 14일자를 보면 삼양라면은 월 1400만 봉지, 롯데는 700여만 봉지, 신한은 200여만 봉지를 생산했으며 1봉지에 20원으로 첫 출시 때보다 봉지당 중량이 150g으로 늘어나면서 가격도 20원으로 올랐다.

1967년 당시 라면 삼양, 롯데(현 농심라면), 신한, 러키 라면 등 소개한 1967년 9월 20일자 매일경제 신문.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67년 당시 라면 삼양, 롯데(현 농심라면), 신한, 러키 라면 등 소개한 1967년 9월 20일자 매일경제 신문.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65년 롯데라면을 선보였던 롯데공업은 현재 업계 1위인 농심의 전신으로 1974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삼양라면 월남(베트남) 수출 내용을 다룬 1967년 9월 5일자 매일경제신문 기사.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삼양라면 월남(베트남) 수출 내용을 다룬 1967년 9월 5일자 매일경제신문 기사.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삼양라면 베트남 수출 계약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삼양라면 베트남 수출 계약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국내 인기에 힘입은 삼양식품은 1969년 국내 최초로 베트남에 150만달러에 달하는 라면을 수출하며 라면의 세계화를 열었다.

현재 우리나라 라면의 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발표한 '2017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라면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라면 수출은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2007년 3만375톤에 불과했던 수출량은 지난해 7만9586톤으로 162.0%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수출액은 1억1567만달러에서 2억9037만달러(약 3100억원)로 151.0% 늘었다. 수출대상국가도 이미 130여개 국가를 넘었다.

정영일 넥스트데일리 기자 wjddud@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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