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중찬의 書三讀]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 이야기’ - 류큐 왕국의 눈물

발행일시 : 2018-04-13 10:57
[안중찬의 書三讀]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 이야기’ - 류큐 왕국의 눈물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를 100가지쯤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위안부는 성노예였다’며 방대한 증거자료를 제시한 호사카 유지 교수나, 이토 다카시 감독의 취재기록을 읽으면 충격과 함께 혼란이 밀려온다. 채현국 선생님께서는 일본을 미워하지만 말라고 하셨다. 일본과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의 ‘친일파’를 그렇게 비난할 필요는 없으며 일본과 친하게 지내거나 일본을 더 많이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만 일본에 부역했던 부일배(附日輩)에 대해서 만큼은 단호한 청산이 필요할 뿐이라고 강조하셨다.

결혼 15주년을 맞아 오키나와(沖繩) 여행을 떠나며 그 땅의 역사를 생각했다. 나하공항에서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인도받아 좌우가 뒤바뀐 도로와 운전대에 적응하며, 해변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58번 국도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철조망 너머에 ‘후텐마 비행장’을 보았고, 이태원이 연상되는 ‘아메리칸 빌리지’와 고즈넉한 ‘요미탄 촌’을 둘러보았다. 코발트빛 바다를 붉게 물들인 자탄의 석양을 바라보며 70여 년 전 봄에 시작된 핏빛 역사를 되새겼다.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그 땅의 슬픈 이야기를 읽었다.

[안중찬의 書三讀]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 이야기’ - 류큐 왕국의 눈물

”1945년 3월, 오키나와 섬 주변에 약 1,500척의 미군 함대가 집결했다. 25일에는 일제히 포격과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들이닥친 미군은 지상 전투부대만 18만 명이나 되었고, 해군부대와 후방 보급부대까지 합하면 5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중략) 오키나와 전에서는 본토 출신 군인 약 6만 5천 명과 오키나와 출신 군인 약 3만 명, 그리고 약 9만 4천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그 외에 군부 또는 종군 위안부로서 한반도에서 강제 연행되어 온 만 명 남짓한 이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오키나와 전에서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더 많이 희생되었고 결국 본토 결전은 없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참전하자,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 77쪽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종말이 오키나와를 향한 포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4월 3일, 요미탄촌 치비치리 가마에 숨어 있던 주민 82명이 집단자결을 단행했다. 가족끼리 주민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참하고 충격적인 이 사건은 ‘살아서 굴욕 당하지 말라’, ‘항복은 수치’라는 철저히 반복 학습된 결과였다. 천황·국가·민족의 존립과 발전을 최우선하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 따위는 새의 깃털만큼 가볍게 취급하던 야욕의 제국다웠다. 근대국가 일본의 왜곡된 실체는 오키나와에서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1949년 미국 독립기념일에 ‘일본은 공산주의에 대한 방패’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일본 전역을 미 군사기지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과 더불어 오키나와를 일본에서 분리시켜 아시아 전략의 거점으로 지배하겠다는 점령군다운 발상이었다.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이런 정책들이 구체화되었다. 한국 전쟁은 패전국 일본에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피폐해진 일본 경기가 단숨에 회복되고 소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전범국가 일본이 한 많은 우치나(오키나와)를 미국에 상납한 것은 상호이익에 부합했다. 미국이 일본을 패전국으로 취급하지 않고 편리한 동맹국으로 취급한 것은 결과적으로 일본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 번영의 그늘에는 민족상잔의 수백만 희생자를 낳은 한반도와 베트남 전쟁이라는 비극이 있었다. 오키나와를 방패삼아 본토 결전을 모면했던 비열한 일본의 선택과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미국의 갑질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오키나와의 드넓은 사탕수수밭은 차츰 미군기지로 변해가는 동안 모두가 눈을 감았다.

[안중찬의 書三讀]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 이야기’ - 류큐 왕국의 눈물

“지도를 보면, 규슈 남쪽 끝에서 대만에 이르는 약 1,300km 해상에 활처럼 연결된 200개에 가까운 섬이 있는데, 그중 약 1/3만이 사람이 사는 섬이다. 이 섬을 지리학이나 지질학에서는 류큐호 또는 류큐 열도라 부른다. (중략) 오키나와 현을 이루는 섬들은 류큐 열도라 불리는데, 사츠난 제도와 아울러 난세 제도라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질학 또는 지리학 용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섬들의 명칭은 그다지 엄밀하게 분류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류큐호가 류큐문화권(아마미 제도 이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 23쪽


오키나와는 원래 중세 무역의 중심지 ‘류큐 왕국’이었다. 한때는 원나라 대군을 해상에서 제압했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명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태평성세를 누리면서 독립된 지위를 지킨 안온한 왕국이었다. 조선의 태종·세종·세조에 걸친 교류의 기록과 신숙주라는 걸출한 사신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해동제국기’로 새겨둔 매력적인 왕국이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무사가문 시마즈씨(島津氏)가 찾아와 조선 침략을 위한 출병을 요청했을 때에도 당당하게 거절한 자부심 있는 평화의 왕국이었다.

1609년, 도쿠가와 막부의 에도시대가 완성되자 시마즈씨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침공이었고, 100년간 전쟁을 멀리했던 평화의 왕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형식적으로는 중국에, 실질적으로는 일본에 지배당하는 이중속국으로 전락했다. 1853년, 이번에는 강력한 프랑스 군함이 접근해서 화친·통상·기독교 포교 등 세 가지를 요구했다. 당황한 막부는 도마뱀 꼬리 짜르듯 구미열강의 진출을 저지하려는 고식적인 방법으로 류큐를 활용했다. 포교는 금지하되 무역은 허용했다. 막부의 방침에 따라 시마즈씨는 무역이익을 독점하고, 군비를 강화시켰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시대를 열었다. 메이지 12년, 사츠마 사족(시마즈씨)의 무장반란인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을 제압한 마츠다 미치노리의 정예부대는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류큐 국왕과 왕세자를 도쿄로 강제 이주시키며 메이지 정부의 권력 기초를 확립하게 된 이 사건을 ‘류큐 처분’이라고 한다. 류큐와 책봉 관계에 있었던 청나라는 당황했고, 류큐는 450년 왕조를 끝내고 일본의 광역자치단체인 도도부현(都道府県) 중 마지막 47번째 오키나와 현이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에 군함을 파견하여 개국을 강요했다. 1876년 강화도에서 맺어진 그 불평등 조약으로부터 시작된 침략은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하며 만주까지 세력을 확대해갔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해가 맞아 떨어진 영국의 지지에 힘입은 것이었다. 한편, 독일의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우려한 영국이 프랑스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했다. 온 세상이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24년, 오키나와는 ‘소철지옥’을 겪었다. 아열대 유독식물 소철의 독을 뺀 다음 전분으로 만들어 먹는 지경에 이르렀던 시절이다. 가난한 오키나와 사람들이 소철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오사카나 게이힌 공업지대로 일자리를 찾아 몰려 들었다. 오키나와 전통악기 산신(三線)을 퉁기면서 향수를 달래던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할 때 우치나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야마토(본토)인들의 차별로 타향살이 설움은 더욱 깊어졌다. 멀리 하와이나 남미, 태평양까지 일자리를 찾아 떠난 사람들도 많았는데, 우리 민족의 보릿고개나 애니깽 이민사를 연상시킨다.

유럽의 아시아 침략에 한 발 앞서 유사한 군사행동을 단행한 일본은 1932년 3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등에 업고 괴뢰국가 만주를 세웠다. 마치 이스라엘이 아랍인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한 것처럼 오족협화(五族協和)의 구호를 앞세워 많은 이주자를 보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중국 잔류 고아·부인 문제가 일본 사회를 시끄럽게 했는데, 무책임한 일본제국주의의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만주국의 건설·확대로 국제사회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고립화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안중찬의 書三讀]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 이야기’ - 류큐 왕국의 눈물

“1960대 후반으로 돌아가 오키나와를 보자. 미국은 베트남 정책 실패로 말미암아 당연히 오키나와를 지배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시마구루미 투쟁'은 결국 경제적 조건 투쟁으로서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던 미군에게서 일정부분 양보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오키나와 민중은 이후 상황을 크게 변화시켜 나갔다. 1960년에는 ‘오키나와현 조국복귀협의회'가 생겨나 대중운동의 조직화가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오키나와 대중운동이 크게 발전한 계기는 뭐니 뭐니 해도 베트남 전쟁이었다. 그때까지 대중운동의 가장 시급한 당면 목표는 ’일본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 101쪽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부터 일본에 속하게 되었다. 사토 수상과 닉슨 미 대통령은 정상회담 결과에 따른 3년만의 오키나와 반환이었다. 한 달 뒤 일본 자위대가 배치되기는 했지만, 본토의 미군기지는 줄어든 것과 달리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일본 정부는 토지 소유자에게 비싼 임대료를 지급하고 미군에게 제공하는 꼼수를 썼고, 1978년부터는 ‘배려예산’이라는 편법으로 미군을 지원했다. 일본 전국 면적의 0.6%에 불과한데 전체 미군시설의 75%를 차지하는 기형적인 섬 오키나와는 그렇게 병들어 갔다.

혐오스런 미군범죄도 많았다. 1955년 6세 여아 폭행 참살 사건과 1995년 9월에 세 명의 미군이 초등학교 여학생을 강간한 사건, 2016년 4월 우루마시 강간살인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련의 사건이 생겨날 때마다 오키나와 민중의 분노는 미일 안보체제를 뒤흔들 정도로 컸다. 한 소녀의 안전조차 지킬 수 없는 안전보장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군사적 요새로 과중한 부담을 강요받아온 오키나와가 과연 그렇게 되어도 괜찮단 말인가? 2002년 6월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이와 효순이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1995년 시민들의 압력을 등에 업고 오키나와의 오타 마사히데 지사는 미군기지 강제사용 절차 갱신에 대해 서명을 거부했다. 일본 정부는 클린턴 정부와 정상회담을 통해 미군기지 축소와 후텐마 비행장의 전면 반환을 약속하며 오키나와를 달랬는데, 오히려 도심의 낡은 기지를 헤노코 연안으로 이전하여 최신기지로 바꿔주는 꼼수에 불과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위정자들의 굴욕적인 협상이 갈수록 늘어가자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반대편에는 일장기와 성조기를 든 극우세력들이 “매국노!” “일본에서 꺼져!” 등의 폭언으로 맞불을 놓는 풍경들이 낯설지 않다.

[안중찬의 書三讀]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 이야기’ - 류큐 왕국의 눈물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은 일본 본토에서 서서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어 유엔군 사령부가 한국으로 이전했다. 미 해병대는 모든 병력을 오키나와로 이전하여 일본 본토에는 미 육군과 보급부대만 남게 되었다. 분업체제의 구조와 기능이 강화되어 일본 본토 안에서는 적어도 평화주의와 경제적 번영이 달성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군기지가 집중된 오키나와와 한국의 존재는 일본 사회에서 점차 잊혀져갔다. 패전 이후 일본은 침략전쟁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 없이 미국 지배에 종속되어, 천황의 전쟁 책임도 묻지 않고 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 신스케를 수상 자리에 앉히는 그런 지배체제를 만들어 냈다. 이런 체제를 확립한 것은 1952년의 강화조약과 미ㆍ일 안보조약이었고, 배후에서 이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이 조약에 따라 일본에서 분리되어 미군 요새로서 남게 된 오키나와였다.” (173쪽)


오키나와에서의 첫 날 아침, 이 책의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新崎盛暉)’ 선생의 부고를 접했다. 1936년 도쿄에서 태어나, 뿌리를 찾아 오키나와로 건너간 뒤 오키나와대학의 교수로 후학을 양성한 전후 시민운동의 중심인물이다. 학자라기보다는 동시대를 기록한 저널리스트에 가까운, 연구보다 실천을 강조한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현장에 있는 사람은 현장에서, 현장에 갈 수 없는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하라’시던 생전의 말씀을 복기한다. 일본의 또 다른 모습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의 거울이 되어주신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마지막 날 오후에 들른 곳은 ‘한국인 위령탑 공원’이었다. 위령탑을 둘러싼 해변의 거대한 ‘오키나와 평화공원’은 구조적으로 ‘제주4.3평화공원’을 연상시켰다. 일제에 강제 동원되어 노예처럼 일하다 사라진 우리 조상들의 한 많은 땅을 둘러보며 세상 모든 평화롭지 않은 땅에는 반드시 평화공원이 있다는 모순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만약 미국이 오키나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고도미사일 배치라든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소식을 볼 때마다 오키나와와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ahn0312@gmail.com 블라디팜 총괄이사 /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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