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의 주인공들을 모티브로 한 여성 수필집이 인기를 끌고 있다. 바로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해 한마디도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페미니즘을 잘 이해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금기가 많고 여자 자신도 원하는 바를 아는 것도 쉽지 않으며,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도 어렵다. 이런 현실에 과감히 금기를 깰 때 고난과 시련 속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강한 울림을 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조이스 박(박주영)은 인천대학교에서 영어강의를 하고 있으며 수많은 영어교재를 집필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세상의 구석에서 ‘유색인종,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피부양자가 딸린 비혼자’라는 지표들을 달고 생존한 것이 성공이라 당당하게 말한다. 솔직하고 대담하고, 톡톡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그 동안 영문교재를 주로 썼는데 첫 인문학 수필집을 낸 소감은?

전공을 영문학에서 영어교육학으로 바꾸면서 영어 교재를 많이 냈다. 영어 교재의 집필은 돈을 벌기 위한 문학과 현실 사이의 타협이었다. 영어교육학을 하면서 책을 깊게 읽는 법을 터득했지만 국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라 책, 그것도 에세이 서적을 쓸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5년전에 과로로 심한 번 아웃을 겪으며 나를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면의 심리 이야기를 영화나 동화를 모티브로 풀었는데 글을 읽는 독자들이 많아졌고 반향을 일으키면서 책을 출간하게 됐다.

이번 출간은 글쓰기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전환점이 됐다. 내가 글을 썼지만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시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바라보게 됐다. 글쓰기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도 체감했다. 페이스북에는 마치 배출하듯 글을 썼는데 책을 위한 글쓰기는 내면을 가다듬는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글이 타인에게 닿는 순간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 되므로 책임감을 더 크게 느꼈다.

▶ 책에는 다양한 동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과 그 이유는?

장미나무 이야기와 마지막 부분의 캣스킨 이야기가 좋다. 장미 나무가 장미꽃을 피우기까지 그 나무 아래 시체 하나는 파묻었다는 말이 있다. 꽃이 피는 것은 고통과 슬픔의 계절을 버틴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장미나무를 보지 않고 예쁜 장미꽃만 바라본다. 한 사람을 받아들일 때도 그 사람의 단면만 바라보지 말고 다른 부분도 받아 들여야 한다. 나도 늘 그 점을 경계하고 있다.

캣스킨은 천 마리 동물의 가죽을 둘러써 공주였던 신분을 감추고 부엌데기로 일하게 된 여자의 이야기이다. 가죽을 둘러 쓴 이유는 자신의 본질, 즉 주체성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 여자는 별빛과 달빛 드레스를 입고 빛나는 존재가 된다.

이 주인공이 본래의 공주의 모습을 되찾는 데에는 다른 동화와는 달리 왕자의 구원이 필요치 않다. 주인공 혼자의 힘으로 빛나는 존재가 된다. 스스로 빛을 내면에서 길어 올려 그 빛으로 빛나는 완성된 여성성을 보여준다.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과 주체성을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멋지다.

▶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가?

여자로 사는 것은 여성성을 완성하는 긴 여정이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생물학적인 차이는 벗어날 수 없다. 여자인 사람으로 살아가며 삶을 충만하게 채워가는 것이 여성성을 완성해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여성성의 완성은 내면을 깊이 바라보고 변화시켜가는 과정 속에 있다. 참다운 자신을 들여다보며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글이 작가를 떠나면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이 독자의 내면에 파문을 일으켜 독자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진다면 작가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 페미니즘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페미니즘을 말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고 말로 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 영미권에서 페미니즘은 90년대 초중반에 아카데미에 학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었다. 나는 당시 원서로 몇몇 책들을 읽으며 관심을 가지게 됐고, PC통신 페미니스트 동호회에서 활동도 했었다.

철학자들이 주도한 프랑스 페미니즘과 달리, 미국 아카데미의 페미니즘은 여자 시인들이 이끌었다. 그 중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는 독보적이다. 그녀는 미국 학술대회 MLA에서 학회에 참석한 여자 교수들을 향해 ‘당신들은 토큰 우먼(token woman)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토큰(token)은 상징적인 의미로 토큰 우먼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아버지의 책을 읽고 아버지의 돈으로 대학에서 공부하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사회에서 엘리트 자리에 올라서, 가부장 사회가 억압을 해도 성공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예시로 사용되는 여성들을 말한다.

그녀의 말에 영향을 받아 아버지나 혹은 남성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페미니즘 활동가로 행동한 적은 없지만, 내 삶의 영역에서 남자의 돈으로 공부하지 않고 남자의 돈으로 먹고 살지 않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20대에 맹세했고, 이것 하나는 지켜냈다.

딜레마는 있다. 아웃사이더로 살려면 사회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노바디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 자존을 지키기 위해 경제적인 자립이 필요하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면, 바로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유리천장은 단단한 데도 체감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20대나 30대 여성들은 차별받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카도 20대인데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사회에 나가기 전 학교에서는 여성들이 공부도 잘하고 있고, 부모들로부터 풍요로운 환경을 제공받으며 사랑을 받고 있기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여성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비로소 이야기가 달라진다. 남녀가 갈라지고 다른 대우를 받는 경계에 가보아야 여성들은 변화의 필요를 느낀다. 자신이 중심이었던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부대끼며 만나는 경계에 가보아야 다른 세상에 사는 타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의 성장은 그렇게 시작된다. 자신이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할 때 비로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만의 경계 안에 안주하기 보다 가장자리까지 가서 그 경계를 밀어보아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공감에도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타고난 기득권이 각자 다른 부분에서 있을 수 있고 동시에 타고난 결핍이 각자 다른 부분에서 있을 수 있다. 사람은 결핍을 통해 타인에게 손을 내밀고 기득권을 양보하고 포기하면서 개인으로 성장하는 존재이다. 누군가의 기득권이 더 많을 수도 있으나,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타인들의 세계로 나아가서 꼭 타인들을 만나야 한다.

▶ 향후 계획은?

영어 교육 서적은 지속적으로 쓸 것이다. 좀더 욕심을 낸다면 아버지들의 아버지들의 정신적인 유산을 계승하는 딸인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환상동화를 쓰고 싶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전통과 유산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계승하는 딸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게 다음 단계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만드는 길이라 믿는다. 한국에는 이런 옛날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아니 나라도 쓰고 싶다.

그러나 최근에는 변화가 일고 있다. 중심이 해체되고 주변들이 부상하고 있다. 여성으로 상징되는 주변인들,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찾는 세상을 꿈꾼다. 더 나아가 모두가 주체로 서되, 어떤 중심도 주변을 지배하지 않는 그런 세상도 꿈꿔본다. 그게 유토피아일지라도.

이향선기자 hslee@nextdaily.co.kr
사진촬영지원 : 소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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