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2018년 10월에 난생 처음 스페인을 방문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1학년 때 스페인어를 배운 적이 있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스페인어 실력이 늘 것이라는 꽤 의지에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10일 동안이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해서 약간의 스페인어를 알아듣게 됐다. 그러나 역시 무리한 계획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마드리드 시내에서 떨어진 에어비엔비 숙소에 머물면서 매일 열심히 여러 곳을 방문하고 또 거리를 구경하며 다녔다. 프라도 미술관과 같은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고 오랜 시간 동안 동네 답사도 했다. 마드리드에 가까운 톨레도와 알칼라데에나레스도 가봤다. 톨레도는 깊은 인상으로 두 번 방문했다. 첫 날은 덥고 맑은 날이었는데 엘 그레코 그림처럼 흐린 날에도 가고 보고 싶어서 두 번째 날은 흐린 날에 방문했다. 밤에는 스페인어로 된 책이나 웹사이트를 독해하면서 그간 잊고 있었던 단어를 복습했다.

엘 그레코 그림처럼 흐린 톨레도
엘 그레코 그림처럼 흐린 톨레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스페인어를 연습하고 싶어서 이곳 저곳에서 용기 내서 질문을 자주 했다. 시장과 작은 가게에서 질문하는 것이 쉬웠다. 한번은 시장에서 햄버거를 시켰는데 “고기를 어떻게 구워 줄까요?”이라는 질문을 금방 알아들어 기뻤다. 정확한 대답을 잘 몰라 엉터리로 말을 했지만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 듣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한 번은 신발을 사려고 신발 가게에 갔는데 의외로 스페인어 대화가 잘 통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마지막 날에 공항에 갈 택시를 스페인어로 예약했을 때다. 사실 전화상으로 대화하는 것은 대면하면서 말하는 것보다 어려워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불안했고 다음 날 아침에 택시가 과연 올까 고민했다. 그런데 택시가 보이자 너무 기뻤고 기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 순간들의 공통점은 말이 통한 것에 대한 즐거움이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하면 통하겠지 생각하면서 건넨 말이 통한 것은 일종의 가설 확인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 이러한 가설 확인의 작업이 항상 필요하다. 비원어민은 원어민 만큼 언어 감각을 갖지 못해 항상 불안한 입장에 있어서 원어민에 비해서 한정된 정보와 감각으로 말을 만든다. 물론 초보자가 더 불안하지만, 유창한 사람도 약간은 불안하다. 불안감은 외국어를 괴롭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다.

비단 외국어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람은 보통 사소한 불안은 견딜 수 있는데 불안이 커지면 이를 기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군인, 경찰, 그리고 소방관은 불안에 대한 내성이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 사람 마다 인지 기능이 달라 불안을 느끼는 상황도 다르다.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불안감을 덜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기피이다. 즉 외국어를 싫어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한국처럼 학교 교육에 영어를 필수 과목으로 하는 나라에서 영어 공부에 대한 불안을 느껴 기피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이유로 영어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은 교육을 다 마치면 영어를 거의 쓰지 않고 막상 써야 할 경우 불안과 답답함을 느낀다.

이런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2000년대 중반에 일본어 현화에 대한 문화청(文化庁)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은 75% 지난 일년 동안 외국인과 한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조사를 한국에서 하면 외국인과 대화를 나눈 비율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50%를 넘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 외국어에 대한 불안감에 더해 영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영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세르반테스 집에 있는 전시 안내판. 돌아다니면서 각 안내판을 정독했다
세르반테스 집에 있는 전시 안내판. 돌아다니면서 각 안내판을 정독했다

그런데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불안감이 있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불안감이 크면 기피하지는 않지만 연습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 답답한 상태로 연습하기 어렵고 결국 무의식적으로 기피하게 된다.

반면에 불안감이 적으면 열심히 연습하게 된다. 연습하면 할수록 불안감이 작아지고 연습의 강도도 높아진다. 필자가 마드리드에서 택시를 예약할 때와 같은 즐거움을 자주 느껴야 외국어 연습에 대한 흥미가 생기고 외국어 공부를 계속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계속’ 즉, '지속성'이다. 유창하게 말하는 수준까지 외국어를 배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연습하면서 머리 속에 만든 가설을 확인하면서 말이 통했다는 즐거움을 느낄 때마다 불안감이 줄어 두고 자신감이 조금씩 생긴다. 필자는 마드리드 공항으로 가는 날에 자신감을 얻었지만 그 날 비행기를 타고 영어의 바다인 미국에 돌아와서 스페인어 연습 흐름이 끊겼다.

필자의 스페인어 체험은 수많은 외국어 성인 학습자처럼 현지에서 그 언어를 연습할 수 있는 시간과 예산이 한정됐었다. 미국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들을 수 있지만 그것도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많은 성인 학습자는 외국어 연습을 위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싶어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성인 학습자들의 가장 큰 과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의 부담이 크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가장 적합한 방법은 매일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꾸준히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학습자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외국어 그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에 다른 길이 없을 것 같다.

로버트 파우저 robertjfouser@gmail.com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교육을 가르쳤고,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가르쳤다. 한국 사회를 고찰하면서 한국어로 2016년에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을 출간했고 2018년 ‘외국어 전파담’을 출간했다. 취미는 한옥과 오래된 동네 답사, 사진촬영으로 2012년 종로구 체부동에 ‘어락당(語樂堂, 말을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짓기도 했으며, 2016년 교토에서 열린 ‘KG+’ 국제 사진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했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 학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참여형 새로운 외국어 교육법을 개발 중이고 세계 여러 도시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넥스트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