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가 촉발한 인공지능(AI) 열풍은 지난 3년간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다. 4차 산업혁명 패러다임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산업 곳곳에 AI 접목이 본격화됐다. 가장 활발히 기술개발과 테스트가 진행되는 곳이 의료다. 방대한 의료 데이터와 세계 최고수준 의료 서비스, 정보통신기술(ICT)이 만나 혁신이 일어난다.

의료AI 확산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서울대병원, 연세세브란스병원 등 대형 병원은 물론 중견·중소병원까지 도입이 줄을 잇는다. 뇌심혈관질환 등 질병과 영상의학 분야에 집중됐던 것 역시 간, 폐, 성매개감염병 등 질병군과 병리학까지 확장했다. 이제는 신약개발과 건강예측 등 서비스모델로 진화해 헬스케어 시장 한 축으로 성장할 준비도 마쳤다. 알파고 신드롬 이후 3년간 급속도로 성장해 온 의료AI.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조기 현장 적용과 전문인력 양성 등 산업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알파고 이후 '왓슨 신드롬'…자체 개발로 선회

알파고가 전 산업계에 AI 신드롬을 낳았다면, 의료계에서는 왓슨이 이 역할을 했다. IBM AI 대표 제품 '왓슨 포 온콜로지'는 300종 이상 의학저널, 200권 이상 전문서적 등에서 암 관련 연구 자료를 학습해 의사 진단을 돕는다. 우리나라 병원이 최초 도입한 것은 2016년 8월 가천대 길병원이다. 당시만 해도 환자가 의료진보다 AI가 내린 결정을 더 신뢰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부산대병원, 건양대병원, 계명대동산병원 등 일곱 개 병원이 추가 도입했다.

3년이 지나면서 왓슨 효과는 시들하다. 지난해 왓슨 포 온콜로지를 도입한 병원은 없다. 한림대성심병원이 유전체 분야인 '왓슨 포 지노믹스'를 도입한 것이 유일하다. 서양인에 맞춘 연구결과, 단순 의견제시 등 제한적인 효과 때문에 도입을 검토하지 않는다. 특히 국내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AI 기업과 손잡고 자체 개발로 선회하면서 급속도로 왓슨 효과는 시들해졌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위암은 국내에서 환자 수가 가장 많지만 미국은 흔치 않아 오히려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더 높다”면서 “왓슨이 보유한 정보보다 우리나라 의료진의 지식이 더 뛰어나 단순 참고사항일 뿐”이라고 말했다.

◇영상의학에서 싹틔운 의료AI

우리나라는 세계 수준 의료 서비스와 ICT 기술을 보유한다. 전자의무기록(EMR) 도입률이 높고, 단일보험체제 하에 전 국민 의료 정보를 보유한다. 의료AI가 성공하기 유리한 조건이다.

왓슨 이후 국내 의료AI는 엑스레이,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등 의료영상 데이터를 활용한 알고리즘 개발에 집중됐다. 현재도 개발 중이거나 상용화된 소프트웨어(SW) 대부분이 영상의학에 기반을 둔다.

현재까지 AI 의료기기로 허가받은 제품은 총 세 개다. 지난해 뷰노가 엑스레이 영상으로 뼈 나이를 판독하는 AI 솔루션 '뷰노메드 본에이지'로 국내 첫 의료기기 허가를 받았다. 이어 8월에 루닛과 제이엘케이인스펙션이 각각 흉부 엑스레이 폐결절 진단보조 SW '루닛인사이트', 뇌경색 진단 보조 SW 'JBS-01K'로 허가를 받았다.

올해 6~7개 제품이 추가로 허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3월 기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AI 의료기기 허가를 위해 임상시험 승인을 받은 제품만 9개에 달한다.

루닛은 올해 3분기 내 흉부 엑스레이 폐결절 진단보조, 유방촬영영상 진단보조, 흉부엑스레이 진단보조 솔루션 허가를 기대한다. 딥노이드 역시 연내 척추압박골절, 뇌동맥류, 폐암, 대장암 진단지원 솔루션 허가를 마친다.

◇질병 진단에서 확진까지…B2C 서비스도 침투

초기 의료AI가 영상의학 분야 폐, 심혈관질환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에는 질병영역, 분석 데이터가 다각화된다. 뷰노는 안과(안저 질환), 뇌질환(치매)에 특화된 AI를 개발 중이다. 또 심혈관질환 의료영상 판독에서 한걸음 나아가 심정지를 예측하는 시스템까지 출시할 예정이다. 딥노이드 역시 질병 판독에서 간암 생존률과 재발 예측 등으로 AI 활용범위를 넓혔다.

최근에는 영상의학 분야가 아닌 병리학까지 의료AI 활용을 모색한다. 기존 의료AI 영역에 주류를 이뤘던 영상의학이 '판독'을 했다면 병리학은 '확진'을 한다. 현미경 정보를 분석해 암 세포의 양·음성 등을 확진하는데 쓰인다. 뷰노는 국내 병리검사 1위 업체인 GC녹십자와 공동 개발 중이다. 위암, 대장암 대상 조직세포를 분석해 확진하는 AI 솔루션을 하반기 인·허가 과정에 돌입한다. 루닛은 폐암, 유방암을 대상으로 조직을 분석해 확진뿐 아니라 치료 예측성까지 제시하는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팽경현 루닛 이사는 “영상의학뿐만 아니라 병리학까지 AI가 접목하면서 사람 경험이나 기관별 다른 가이드라인에 의존했던 병리도구가 표준화되고 명확하게 규정된다”면서 “병리학 분야 AI 접목은 질병 확진을 포함해 신약 개발에도 활용될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진단 보조 역할을 하던 의료AI는 기업-소비자간 거래(B2C) 서비스나 제약사 신약개발에도 녹아들었다. 원격진료가 금지된 상황에서 개인 건강기록에 기반한 질병 예측이 대표 서비스다. 셀바스AI가 개발한 '셀비 체크업'은 개인이 1년에 한번 받는 건강검진 정보를 기반으로 4년 내 발생 가능한 질환 위험도를 알려준다. 당뇨, 심장질환, 뇌졸중, 치매, 간암, 위암, 대장암 등 10개 질환이 대상이다. 연세세브란스병원에 공급, 병원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사용 가능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역시 건강검진 데이터를 활용해 국민 누구나 자신의 위험 질병을 알 수 있는 AI 대국민 서비스를 개발 중이다.

◇재도약하는 K-신약, AI가 견인차

통상 1000만개 신약 후보물질 중 실제 임상시험에 진입하는 것은 9개에 불과하다. 최종 판매허가를 받는 물질은 단 하나다. 연구개발(R&D) 비용 역시 막대하다. 미국 제약사가 15년간 신약개발에 쏟아 부은 돈만 520조원이다.

약 100만분의 1 확률을 노리는 신약개발에 의료AI는 효과적인 도구다. 수십 년간 축적한 생물학 데이터베이스(DB)와 다양한 환자정보가 만나면서 AI 활용 기반이 만들어졌다. 절벽에 부딪쳤던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시험 대상자 선정, 약물 효능 예측 등이 AI를 활용해 효율화된다. 실제 신약개발 과정에서 AI를 활용할 경우 평균 15년 걸리던 신약 개발은 최소 5년, 신약 후보물질 발굴 기간은 평균 4.5년에서 1년으로 단축된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국내 기업 중 신약개발 AI를 개발한 곳은 스탠다임과 신테카바이오가 대표적이다. 스탠다임은 기존 의약품 중 다른 약효를 발굴하는 '스탠다임 인사이트'와 기존 물질 중 분자구조 등을 바꿔 새로운 후보물질로 만드는 '스탠다임 베스트'를 개발했다. 실제 회사는 비알코올성지방간, 파킨슨병, 자폐증 치료 후보물질을 직접 발굴했다. 전문 제약사에 맡겨 전임상 시험 중이다.

신테카바이오 역시 유전체 빅데이터 기반 AI 기술을 활용해 승인 받은 약물이나 신약 후보물질의 새로운 적응증을 발견하는 솔루션을 개발했다. 이와 함께 바이오 마커 발굴, 항암 신약 후보 물질 도출 모델까지 보유한다. 2017년부터 CJ헬스케어와 협업, 면역항암제를 개발 중이다.

정부 역시 AI로 신약개발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근 AI 신약개발지원센터를 개소했다. 후보물질 발굴, 전임상 시험, 스마트 약물감지 등 신약개발 전 단계에 활용 가능한 단계별 AI 플랫폼 개발이 목표다. 한미약품, 한독, CJ헬스케어 등 국내 20여개 제약사가 참여할 정도로 관심이 높다.

김경남 셀바스AI 대표는 “바이오헬스 분야 AI 활성화를 위해서는 병원, 기업, 정부가 협업해 의료 산업에 현존하는 비정형 데이터를 AI에 접목해 R&D 기반 사업 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슈분석]서준범 의료인공지능학회장 “의료AI 성패, 조기 현장적용에 달렸다”

“의료 인공지능(AI) 성패는 현장에 적용하는 시스템에 달렸습니다. 규제 개선과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지 않으면 뛰어난 기술도 사장될 우려가 있습니다.”

서준범 대한의료인공지능학회장(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은 우리나라 의료AI 기술과 인력은 일정 수준에 도달했지만, 현장에 적용하는 국가·사회적 시스템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의료 AI가 의료 서비스 개선과 산업적 효과에 긍정적인 기대가 높다. 하지만 각종 규제와 이해관계 등으로 현장 적용은 더디다.

서 회장은 “AI 핵심은 인력과 데이터인데 우리나라는 뛰어난 공학도와 의료진 그리고 상대적으로 양질 데이터를 보유한다”면서 “결국 개발한 결과물을 병원 등 현장에 적용해야 하는데 법적 제약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의료AI 적용이 어려운 것은 수가 등 비용 문제와 강력한 개인정보보호법, 의료법 등 규제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의료영상 기반 AI 판독지원 솔루션이 의료기기로 허가를 받았다. 병원은 도입을 주저한다. 도입에 따른 수가가 마련되지 않아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수가가 마련된다고 해도 논의하는데만 1년 가까이 걸린다.

서 회장은 “우리나라는 단일보험 체제로 국가기관이 혁신기술을 평가하고 수가를 책정해 현장에 들어간다”면서 “이런 논의가 1년 가까이 걸려 혁신 기술을 조기에 적용하는 게 어렵고, 수가 역시 기존 예산에서 할애하는 것이라 수가가 깎이는 영역에서 심리적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개발 혹은 상용화 과정에 강력한 개인정보보호 규정도 혁신을 주저하게 만든다. AI 핵심은 양질의 데이터다. 기술 특성상 많은 데이터를 학습할수록 신뢰도가 높아진다. 국내에서 기업이 개인정보, 특히나 민감성이 가장 높은 의료정보를 활용하는 것은 어렵다. 개인동의와 비식별화 등 과정이 필요한데, 이런 과정으로 수만명의 데이터를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서 회장은 “일반적으로 엑스레이 영상을 활용한 판독지원 솔루션을 개발하려면 10만장에 가까운 영상정보가 필요한데, 현재 법규로는 10만명 모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한다”면서 “미국을 비롯해 최근 무섭게 떠오른 중국마저도 개인정보 규제를 개선해 개발을 지원하고, 조기 현장 적용으로 성능을 향상한다”고 말했다.

AI 기술은 빠르게 진화한다. 매일 쏟아지는 데이터를 학습해 성능을 향상하고, 고도화된 알고리즘은 영역 확장을 지원한다. 결국 현장에 조기 적용해 성능향상을 유도할 수밖에 없다. 정부 역시 최근 AI나 로봇, 3D프린팅 등 혁신 의료기술 조기 현장적용을 위해 '신의료기술평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발표했다. 의료AI 등 혁신 의료기술은 기존 의료기술평가 방식이 아닌 별도 트랙평가를 도입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서 회장은 “정부는 연구개발(R&D) 지원도 중요하지만 개발 후 의료현장에 투입하고, 경제·사회적 효능을 지원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면서 “시판 후 임상시험 등 혁신의료기술을 조기에 적용하는 R&D 기금을 마련하되 안전성을 모니터링해 환자 피해를 막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권선아 기자 sunak@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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