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시대의 배경과 함께 보는 미술의 역사 (2)

지난 기사에서 신고전주의가 나타나게 된 배경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랜드 투어, 누그러진 종교전쟁, 고대 문명의 발굴, 계몽주의 등 사회·정치·문화적으로 급진적인 시대에 새롭게 나타난 신고주의를 대표적인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인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을 통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에 신고전주의는 미술사에 있어 어느 사조와 어떠한 양식을 가지고 있는지 좀 더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여 이번에는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여러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신고전주의’라는 용어가 당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짚으려 한다. '신고전주의'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 푸생의 회화를 설명하면서부터였다. 푸생은 17세기 초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이 시기에 나타난 고전주의와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고전주의를 구분하기 위해 뒤에 나타난 고전주의에 ‘신’을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미지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 런던 윌레이스 컬렉션 소장
이미지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 런던 윌레이스 컬렉션 소장

고전주의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에 반대하는 화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크 미술은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미술로 그들의 위엄과 사치스러움을 투영한다. 때문에 굉장히 화려하고 복잡한 양식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이전 르네상스의 부드럽고 정적인 형식과 반대로 역동적이고 거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바로크 양식에 반대하는 화가들이 이전의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로 돌아가 엄격하고 질서 있는 미술을 주장한 것이 고전주의다.

고전주의가 바로크 미술에 반대했다면 신고전주의는 후기 바로크와 로코코에 반대해 18세기 말 등장한 사조라 할 수 있다. 이전 고전주의와 달리 정치적 성향이 짙게 깔려있음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당시 정치 · 사회적으로 계몽주의와 여러 혁명이 일어났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왕정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발굴 조사를 통해 폼페이나 고대의 건축물, 그리스 문화가 발굴되면서 과거로의 회귀를 바랐다. 즉위한 나폴레옹 역시 자신의 권위를 알리고 싶어 했고 이러한 복합적 요인들로 고전 · 고대의 이상과 이미지를 복구하려는 시도가 신고전주의의 도래를 알렸다.

◇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만큼 시대 상황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조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바로크 양식을 지원한 루이 14세의 죽음 이후 프랑스 왕정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새롭게 권력을 잡은 귀족들은 더욱 쾌락적이고 유희적인 그림을 원했다. 로코코는 이들의 취향을 반영해 그림 속에 주로 쾌락적인 아름다움과 가벼운 사랑 이야기 등을 그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 왕족과 귀족 중심의 바로크와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이는 신고전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가 나타나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함과 동시에 계몽주의 사상이 팽배해지고 신고전주의의 화가들은 새로운 정권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는 작품을 생산하게 되었고 화려하고 가벼운 주제의 그림에서 탈피해 고전의 형식미와 위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주제 또한 사랑 같은 통속적인 주제가 아닌 역사화나 선전화를 주로 그렸으며 엄격하고 균형적인 구도, 명확한 윤곽선,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 등을 우선시하는 것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루브르 미술관)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소재는 티투스 리비우스가 저술한 『로마 건국사』에서 가져온 것으로 연극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소재이다. 기원전 7세기, 고대 로마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로마족과 알바족은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전쟁이 불가피한 이때 두 국가는 각 국가를 대표하여 싸울 세 사람을 내보내 결투를 시키기로 합의하였다.

로마에선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가 알바에서는 쿠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가 선발되었는데 비극은 이들이 사돈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 카밀라는 쿠라티우스 집안으로 시집을 갈 예정이었고 쿠라티우스 집안의 딸은 이미 호라티우스 가문의 며느리였다. 결투 끝에 호라티우스 가문의 막내아들만이 살아남아 로마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지만 약혼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고 분노해 여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하지만 살인죄로 법정에 선 아들을 아버지가 변호하며 무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이미지 :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미지 :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그림에서 나타난 장면은 대의를 위해 즉,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충성과 애국심을 담고 있다. 굳건한 자세로 충성을 바치는 남자들의 절도 있는 모습과 대비되게 오른 편의 여인들은 곧 다가올 비극에 절망하고 있다. 두 그룹의 대비로 작품에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나타내었고 이러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명확한 선을 사용하고 있으며 프리즈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어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관람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배경 또한 도리스식의 열주를 바탕으로 하여 박스형의 공간이 설정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또 다른 신고전주의 화가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를 들 수 있다. 앵그르는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전통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인물로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1806, 파리 군사 박물관)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제작하라는 주문을 받고 그린 그림이다. 나폴레옹은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황제로서의 적통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18세기 황제들의 예복과 왕관은 초상화에 그릴 수 없었다. 이에 앵그르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초상화를 그려야 했고 다른 이미지를 모색하기 위해 과거의 미술을 조사했다.

이 작품 속 나폴레옹은 화려한 벨벳과 세밀한 금장식들로 치장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당시 북유럽의 대표 화가라 할 수 있는 얀 반 에이크의 헨트 제단화에 등장하는 신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황제가 취하고 있는 모습은 고대 로마나 그리스 신의 모습을 닮았고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을 신화에서 위대한 신의 모습과 결부시켰다 할 수 있다. 카펫의 고대 로마와 카롤링거 왕조의 독수리, 프랑크족의 옷에 새겨진 벌 문양은 프랑스 황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초상화 제작을 통해 앵그르는 프랑스 미술계에서 고전주의의 적통을 이어가는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이미지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1780~1867, 파리 군사 박물관
이미지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1780~1867, 파리 군사 박물관

◇앙투안 장 그로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하는 보나파르트'

자크 루이 다비드가 신고전주의의 창시자라면 장 그로는 신고전주의의 마지막 화가라고 할 수 있겠다. 상황을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장 그로는 스승이었던 다비드의 추천으로 나폴레옹의 종군화가로 활동했던 그는 고전의 전통적인 화풍을 고수하면서 현실적인 색채의 명암을 추구해 낭만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하지만 스승이었던 다비드의 엄격한 비판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불만 및 여러 가지 모순 등으로 센 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

이미지 : 앙투안 장 그로,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하는 보나파르트」, 1802년 경, 루브르 미술관
이미지 : 앙투안 장 그로,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하는 보나파르트」, 1802년 경, 루브르 미술관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방문하는 보나파르트'(1804, 루브르 박물관)는 나폴레옹 군대의 이집트 원정 당시를 그리고 있다. 당시 프랑스 군대 내에 전염병이 발생하게 되고 환자들을 격리해 치료받게 했는데 당시 나폴레옹이 격리소에 방문해 환자들을 위문하는 장면을 그려낸 작품이다.

배경에 있는 건축물을 보면 이집트 고유의 건축양식을 찾아볼 수 있고 많은 인물들이 중동지역의 의상을 착용하고 있어 시대적 배경과 지역을 유추할 수 있다. 화면 정중앙에는 나폴레옹이 환자의 몸에 손을 대고 있는데 이와 반대로 뒤의 부관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어 나폴레옹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고 했다.

나폴레옹의 모습은 주변과 분리되며 강한 빛이 내려 실루엣이 강조되었고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영적 행위가 부각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 역시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영웅성을 강조하기 위한 종교적 도상을 사용하고 있다. 환자의 몸에 직접 손대고 있는 모습은 마치 병자를 치료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림에 그려진 것과 반대로 나폴레옹은 전쟁에 방해가 될까 염려해 병에 걸린 군사들은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는 전경에 그려진 병에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이성과 교훈보단 감정이 우선시 되어 그려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신고전주의의 원리에는 부합하지 않는 요소로 낭만주의의 시작을 예고하는 그림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새빈 라이프&컬처팀 객원기자 lifenculture@nextdaily.co.kr

나새빈 기자는 미술사를 전공했다. 젊은 세대의 눈높이에서 어렵고 따분하게만 느껴지던 미술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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