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3월 16일. 고다드 세계최초의 액체로켓 발사 성공

■인류 최초의 로켓 발사 사건

1926년 3월16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오번(Auburn).

로버트 고다드박사(1882~1945)가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차가운 날씨에 대비해 두툼하게 옷을 껴입고 자신이 고안한 피라미드 모양의 철제 로켓 발사 프레임을 잡았다. 그리고 버너에 불을 붙였다. 다음 순간 로켓의 소형 발화장치가 점화됐고 그는 나무 오두막에 몸을 숨겼다.

보기 좋게 날아 올라간 인류최초의 로켓이 착륙한 지점은 눈덮인 에피 아주머니네 농장의 양배추밭이었다.

그는 다음날 일기에 “액체추진체를 사용한 최초의 로켓추진체가 어제 에피(Effie) 아주머니의 농장에서 이뤄졌다"고 적었다.

‘넬(Nell)’이라고 명명된 로켓은 2.5초의 비행기간 동안 41피트(10.25m)날아 오른 후 양배추밭에 떨어졌다. 최대고도는 12m였다.

1926년 3월16일 고다드가 인류최초의 우주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의 모습.
1926년 3월16일 고다드가 인류최초의 우주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의 모습.

이는 액체추진체를 이용한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우주비행의 첫발을 내딛은 인류최초의 실험이었다.

이후 인류가 개발한 모든 우주로켓은 그의 이 원리와 방식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했다.

그는 16살 때 영국의 소설가 H.G.웰즈의 소설 ‘우주전쟁’을 읽고 우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듬 해인 1899년 체리나무 가지 위로 올라갔을 때 문득 로켓 과학자로서 평생을 할 일에 대한 영감을 떠올렸던 인물이었다.

그 해 10월 19일 고다드는 일기장에 “화성까지 갈 수 있는 기기를 만들면 얼마나 놀라울 것인가? 그리고 내 발치에서 농장을 보면 얼마나 작게 보일까?”라고 당시의 기분을 적었다.

■‘지옥의 샘’에서 ‘에덴의 골짜기’로

고다드는 이 실험에 앞선 32세 때인 1914년에 로켓역사상 이정표가 될 다단계 로켓, 그리고 가솔린과 액체질화산소연료를 쓰는 로켓 등 2건의 로켓 특허를 획득했다.

이후 그의 우주로켓 실험은 그 자체가 처음이었던 만큼 시험할 때마다 신문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세를 치렀다. 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는 그의 고향 매사추세츠 워체스터 근방의 ‘지옥의 샘(Hell Pond)’에서 로켓 실험이 이뤄지는 10년간 계속됐다.

■극한고도에 이르는 법

1919년. 고다드박사는 달을 비롯한 행성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일반에게 처음 펼쳐 보여 준 ‘극한고도(Extreme Altitude)에 이르는 법’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출간된 이 69쪽짜리 책자는 로켓비행을 통해 진공상태인 우주로 가기 위한 수학적 이론, 고체연료 로켓 실험, 그리고 그가 본 지구대기와 대기 밖에서의 탐험 가능성 등을 묘사하고 있었다.

고다드는 ‘극한고도에 이르는 법’ 이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이를 실행에 옮겨 액체산소와 가솔린을 사용하는 실린더식 연소엔진을 갖춘 로켓을 제작하기로 했다.

1929년 고다드의 실험 하나가 행해진 다음 날 워체스터의 한 신문은 “달로켓이 238,799.5 마일 벗어났다”는 조롱섞인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달을 목표로 한 로켓이 실패해 공중에서 폭발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실 기자가 본 로켓 잔해는 낙하한 로켓이 지면에 부딪친 것이었다. 게다가 로켓은 예정된 고도에 도달했고 실험은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매사추세츠 주는 로켓 발사 실험 금지조치를 내린다.

정작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세상의 무지였다. 미국정부와 군부, 학계가 로켓의 대기, 우주,군사적 응용연구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비전도, 지원도 없었다.

이 해에 ‘비행기 다음은 로켓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미국의 비행영웅 찰스 린드버그가 그의 후원자로 나섰다. 덕분에 구겐하임 가문으로부터 4년간 10만달러를 지원받게 된 고다드는 1930년부터는 UFO 출몰 소동으로 유명한 뉴멕시코 주 로스웰의 ‘에덴의 골짜기’로 실험장을 옮겼다.

그는 가이던스시스템을 이용해 로켓을 안정화시키고 1935년엔 로켓속도를 시속 880킬로미터까지 끌어올리는 등 자신이 저서에 썼던 `극한 고도에 점점 다가가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후발 주자인 독일은 1942년 V-2로 84km의 고도까지 로켓을 쏘아올리며 대기바깥층의 한계에 도달하는 성과를 내는 등 ‘로켓의 아버지’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1935년 3월 28일 고다드의 A-5로켓이 성공적으로 초음속에 도달했다. 새로운 가이던스시스템을 이용한 이 로켓의 고도는 1.46 km였다.
1935년 3월 28일 고다드의 A-5로켓이 성공적으로 초음속에 도달했다. 새로운 가이던스시스템을 이용한 이 로켓의 고도는 1.46 km였다.

■“왜 우리에게 묻는가? 고다드에게 물어보라!”

1944년 말 메릴랜드 안나스프링스 해군연구소. 전투 중 확보한 독일의 V2로켓 잔해를 넘겨받아 살펴보던 고다드박사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V-2의 명성을 듣고 있었던 터였지만 그로선 어떻게 독일이 이런 수준의 기술을 갖췄으며, 왜 여기에 자신의 핵심기술이 반영돼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다드는 철저한 조사 결과 독일이 자신의 기술을 훔쳤다고 확신했다. 기본 설계가 자신의 첨단 기술과 똑같았던 것이다. 이같은 의구심과 궁금증은 1년도 안돼 밝혀졌다.

■고다드의 연구결과를 베껴만든 V2로켓

“왜 우리에게 묻는가, 고다드에게 물어보라.”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5월 독일과 소련 접경 피네뮌데(Peemunde)에서 미군과 함께 미국으로 이첩된 일단의 독일 로켓과학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런 엉뚱한 말이 나왔다.

`페이퍼클립(Paper Clip)`이란 작전명으로 이들을 데려온 군정보당국자들의 놀라움은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이미 고다드박사의 성과를 알고 있었다.

알고보니 1942년 피네뮌데에서 개발돼 2년 후 런던을 쑥대밭으로 만든 독일의 V-2미사일로켓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고다드 로켓의 변형에 지나지 않았다.

고다드박사의 로켓 설계 내용은 미국의 스파이 구스타프 구엘리히에 의해 독일로 넘어갔고 독일의 V2로켓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다드박사의 로켓 설계 내용은 미국의 스파이 구스타프 구엘리히에 의해 독일로 넘어갔고 독일의 V2로켓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짓궂은 운명의 장난과도 같이, 그의 연구에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나치 독일과 구 소련이었다. 나찌 독일의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박사는 고다드의 이론을 참조해 V-2로켓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배경에는 로켓 선구자 고다드의 연구가 미국정부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로켓 특허사용 및 채택을 윤군에 건의해 주목을 받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육군이 거대로켓의 군사적 응용연구를 위한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지 못하면서 그의 프로젝트도 결국 반려된다.

반면 나찌는 1936년 주미 독일 대사관 무관 프리드리히 폰 보에트리셔를 고다드의 연구소가 있는 로즈웰로 보내 실험을 관찰토록 한 후 4페이지에 달하는 극비보고서를 받았다. 소련비밀정보국 KGB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부(NKVD)역시 그의 실험에 주목했다. 1935년 미해군,미항공우주국에서 활약하던 소련 스파이구스타프 구엘리히가 해군을 위해 연구해 온 고다드의 2년 제출 보고서를 소련으로 빼돌렸다.

■뉴욕타임스, 49년 만의 사과

1969년 7월 17일. 인류 최초의 달나라 착륙선 아폴로우주선이 발사된 다음 날. 뉴욕 타임스는 이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추가 조사와 실험은 17세기 아이작 뉴턴의 발견을 확인했으며 이제는 로켓이 대기에서처럼 진공 속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타임스는 실수를 유감으로 생각한다.”

고다드 박사는 1930년 뉴멕시코주 로즈웰에서 이같은 본격적인 로켓형태의 발사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고다드 박사는 1930년 뉴멕시코주 로즈웰에서 이같은 본격적인 로켓형태의 발사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1920년 로켓 선구자를 비난하는 사설을 쓴 데 대한 49년 만의 뒤늦은 ‘정정’기사였다. 이는 자존심 세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뉴욕타임스가 고인이 된 고다드에게 보낸 반세기만의 사과문이었다. 그 당시 뉴욕타임스는 ‘우주의 진공 상태에서는 로켓이 추진력을 얻을 물질, 즉 반작용을 할 물질인 공기가 없는 만큼 우주로켓의 추진력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타임스는 1920년 1월12일자 1면에 “로켓이 달에 도착할 것을 믿다(니)‘, ‘고효율 로켓에 대한 복합적 비난’ 의 제목으로 사설을 내보냈다.

“....고다드교수가 실제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도 모르며 반작용을 할 수 있는 진공보다도 더 좋은 뭔가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며 “고다드가 매일매일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도 없는 것 같다”고 썼다.

하지만 사과를 받을 사람은 2차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8월에 이미 지구를 떠나 별이 되어버린 후였다. 주인공은 ‘우주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허칭스 고다드박사였다.

■아폴로 박사 폰브라운이 베낀 기술

나찌의 V-2로켓 개발을 주도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아폴로 계획을 지휘한 브라운 박사는 1963년 그의 로켓연구에 대한 선구적 업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고다드의 로켓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조악한 것일지는 몰라도 가장 현대적 로켓과 우주 운항체에서 사용되는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고다드의 업적은 로켓이론의 선구자인 치올코프스키의 계보를 잇는 한편, 소련 로켓개발의 선구자인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발렌틴 글루쉬코의 연구와 수많은 후속 우주프로그램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생전의 고다드는 1930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스미소니언 편지에서 이미 로켓추진비행체를 통해 찍은 달과 지구의 사진을 조각한 금속판메시지를 먼 문명에 보내는 것, 우주에서의 솔라에너지 사용 등에 대해 두루 생각을 제시한 선구자였다.

고다드가 인류 최초로 로켓을 발사한 지점에 그를 기려 세운 표지 동판. 당시 발사된 로켓 모습이 보인다.
고다드가 인류 최초로 로켓을 발사한 지점에 그를 기려 세운 표지 동판. 당시 발사된 로켓 모습이 보인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1957) 이후 미-소 간 우주개발경쟁이 가열되어 가던 1960년 8월. 미국정부는 고다드의 로켓특허에 대한 침해를 인정하고 고다드의 미망인과 구겐하임재단에 100만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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